선거철 되자 우후죽순 자서전... 그보다 한 줄 '참회록' 부터 쓰십시다
[윤동주 80주기 -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3] 참회록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1942. 1. 24.
선거철이 되자 자서전 출판이 늘어났다는 보도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상당한 연륜을 지닌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형식을 취한다. 제대로 된 자서전이라면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담겨 있을 것이다.
윤동주는 이십사 년 1개월의 젊은 나이에 참회의 글을 쓴다고 했다. 젊은 나이인데도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참회한다고 고백했다. 진정으로 부끄러운 것은 그렇게 보람 없이 살면서도 거기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못한 나약한 자신을 “어느 왕조의 유물”로 표현했다. 녹슨 구리거울 속에 잔영처럼 남아 희미하게 보이는 자신의 무력한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그뿐 아니라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윤동주는 어둠 속에서도 별을 노래한 시인이다. ‘소년’이라는 시에서는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고, 산문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는 서리 내린 낙엽을 밟으면서도 봄이 올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만큼 미래를 긍정하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즐거운 날이 오리라는 믿음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윤동주는 그가 맞이할 즐거운 날에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윤동주의 진실성이 있다. 정작 참회록을 써야 할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던 그 시대에 윤동주는 미래의 그날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쓰고자 한 미래의 참회록은 “그때 그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라는 솔직한 자기 인식이다. 이 대목에서 나약하게 보였던 그의 참회가 자기반성에 근거를 둔 강한 의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탐색한다. 온 힘과 정성을 기울여 자기의 본모습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결과 우울하고 고독한 형상을 발견한다.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그것이다. 운석은 하늘의 별이 지상에 떨어져 빛을 잃고 응고된 돌덩이다. 그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저앉은 정지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는 진행의 형상으로 표현했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의지가 여기 투영되어 있다.
어두운 시대를 홀로 걸어가야 했던 윤동주는 자신의 무력함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반성과 참회의 자세를 표현했다. 그 반성은 일회로 끝나지 않고 미래의 시대까지 이어진다고 믿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참회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한 점이다. 한 젊은이가 뼈에 새기듯 백지에 적어 놓은 참회의 글을 통해 우리는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정직하고 올곧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진정한 자기반성이 사라진 우리 시대에 윤동주의 정직한 참회를 되살려 마음의 등불로 삼고 싶다. 천상의 별처럼 빛나는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저마다 한 줄의 참회록을 써 보면 어떠할까?
◇비애 금물… 상급… 창씨개명 앞두고 쓴 ‘참회록’ 속 번민·고뇌
시 ‘참회록’은 윤동주가 낱장에 적은 자필 원고 상태로 남아 있다. 괘선 용지에 세로로 내려쓴 시의 하단에는 영어 글자를 썼다가 사선으로 지운 흔적과 여백에 쓴 글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번민과 고뇌의 과정을 알려주는 생생한 증거다.
사선으로 지운 자리에는 ‘poem’ ‘poetry’ ‘sentimentalism’ 등 시와 관련된 영어 단어들이 있고, 그 아래 여백에는 ‘渡航(도항)’ ‘證明(증명)’ ‘上級(상급)’ 등의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이 글자들을 보면 윤동주의 정신이 시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당면한 문제가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한 도항 증명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테두리 선으로 묶여 있는 “비애 금물”이라는 단어는 감상에 잠기지 말고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는 각오를 엿보게 한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한 도항 증명, 그와 연관된 창씨개명 신고를 앞두고 괴로운 번민의 시간을 보내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단상들을 여백에 적어 놓았다.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나중에 이 시를 정서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처음 상태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시의 문맥은 정제되어 있어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수용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일본 유학에 오르기 직전 윤동주의 내면 상태를 알려주는 귀한 작품이다.
◇윤동주와 사람들
단짝은 석 달 먼저 태어난 사촌 형 송몽규… 日유학 제안, 1942년 두 사람은 현해탄을 건넜다
윤동주에게는 석 달 먼저 태어난 고종사촌 형 송몽규가 있었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명동소학교부터 연희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고락을 함께한 사이였다. 용정의 은진중학교도 같이 다녔는데, 중학교 3학년을 마치던 1935년 1월 1일 ‘동아일보’ 신춘원고 응모에 콩트 ‘술가락(숟가락)’이 당선되어 윤동주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후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비밀리에 중국 난징으로 가고,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여 잠시 헤어지게 된다. 두 사람은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함께 입학함으로써 다시 동학의 길을 걷는다.
송몽규는 민족의식이 뚜렷했고 사상적으로 강경한 면이 있었지만,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41년 4학년 때 문과 학생회지 ‘문우’가 한글 사용 통제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간행되었다. 전에 언급했던 강처중이 문과 학생회장을 맡아 학생회지 발간을 주도했고,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 편집을 담당했다. 이 ‘문우’ 지에 윤동주의 ‘새로운 길’과 ‘우물 속의 자상화’가 실렸고 송몽규도 ‘밤’과 ‘하늘과 더불어’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 송몽규는 당시 시책에 따라 일본어로 편집후기를 썼는데, 문우회가 해산되고 ‘문우’ 발행도 마지막이 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더욱 강압적인 전시 체제로 전환했다. 졸업도 석 달을 앞당겨 12월 27일에 시행되었다. 갑자기 졸업을 맞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탈출구를 찾는다는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추진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송몽규가 먼저 제안했고 윤동주도 여기 호응했을 것이다.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윤동주는 도쿄의 릿쿄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송몽규와의 동행을 원했던 윤동주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로운 진로를 찾아 1942년 3월 두 사람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를 탔다. 송몽규는 교토로 윤동주는 도쿄로 향했다. 두 사람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