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조선 왕실 호위군, 한때 2만명 달하는 거대 조직이었죠
금군: 조선의 경호처
왕을 호위하는 ‘금군’, 그 핵심은 ‘내금위’
중국과 한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에서 임금과 궁궐을 지키는 친위대를 보통 금군(禁軍)이라고 했어요. 조선의 금군은 사병(개인이 사사로이 부리는 병사)에서 시작됐습니다.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을 기반으로 한 ‘의흥친군위’를 설치했습니다. 태조의 아들 이방원이 3대 태종으로 즉위한 후 금군은 체계를 갖춰가게 됩니다. 1407년(태종 7년) 조선 시대의 금군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내금위’가 설립됐습니다. 역시 처음에는 태종의 신임을 받는 수하 병사들이 중심이었으며, 60~90명으로 구성된 정예부대였습니다.
이후 나라의 기틀이 잡혀가면서 그 숫자는 늘어났습니다. 성종 때 완성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내금위의 정원이 190명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주로 양반 자제로 편성됐고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내금위는 뛰어난 무술 실력과 임금의 신임을 받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내삼청’ ‘금군청’ 거쳐 ‘용호영’으로
금군에는 내금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극에 종종 등장하는 ‘겸사복’ 역시 조선 초기에 설립된 기관입니다. 정원 50명으로 이뤄진 겸사복의 특징은 주로 말을 타고 달리는 기병이라는 점이었어요. 이들은 신분보다 무예 실력을 더 중요하게 따졌기 때문에 양민과 서얼(양반 남성과 양민·천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천민, 향화인(조선에 귀화한 외국인)까지 여러 계층 출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용모와 키, 학식까지도 중요하게 따졌다고 하네요.
중종 때는 궁성 수비를 맡은 정원 50명의 ‘우림위’도 설치됐습니다. 우림위를 만들었던 이유는, 여진족이 자꾸 북방 국경을 침입하자 정예병인 내금위와 겸사복 병력을 파견하는 관행이 생겨 정작 궁궐 수비가 소홀해졌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의 금군은 내금위·겸사복·우림위의 ‘금군삼청’ 또는 ‘내삼청’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어요. 이들은 병사들 중에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사극을 보면 ‘내삼청 군사들은 무엇을 했기에 이런 변고가 일어났단 말이냐’ 같은 대사가 나오는데, 바로 내금위·겸사복·우림위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금군삼청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효종 때 내금위·겸사복·우림위를 통합하는 ‘내삼청’이란 기관이 실제 만들어졌어요. 내삼청 정원은 700명이었습니다. 1666년(현종 7년)에는 이를 계승한 ‘금군청’이 설치됐고, 1755년(영조 31년) ‘용호영’으로 다시 명칭이 변경됐죠. 이 무렵 금군은 국왕을 호위할 뿐 아니라 한양 도성의 문 여덟 곳(사대문·사소문)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근무했고, 난잡한 행동이나 부정한 일을 조사해서 적발하는 일종의 내사 업무도 맡았다고 합니다. 백성들 입장에선 무시무시한 존재였겠죠.
정조 임금의 큰 그림 ‘장용영’
그런데 국왕 경호의 업무에는 조선 22대 임금 정조(재위 1776~1800) 때에 이르러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미 경호 업무를 맡은 용호영(금군)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경호 부대가 창설된 것이죠.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인 영조의 명으로 죽은 뒤 세손이 됐던 정조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임금이 된 뒤에는 호위 강화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임시로 만든 관청이 ‘숙위소’였습니다. 책임자인 숙위대장을 맡은 사람은 정조의 세손 시절부터 측근이었던 야심만만한 세도가 홍국영이었습니다. 정조는 즉위 초 홍국영에게 “경이 없었더라면 어찌 지금의 내가 있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홍국영은 정조의 정적인 노론 벽파를 공격하는 데 ‘칼잡이’처럼 나섰고 최고 실세로 부상했으나, 정조의 후계 구도에 지나치게 개입하다가 1779년(정조 3년) 갑자기 실각했습니다. 이듬해 숙위소 역시 폐지됐습니다.
그러나 정조에겐 ‘더 큰 그림’이 있었습니다. 1785년 국왕 호위 전담 부대인 ‘장용위’를 창설한 뒤 1793년 ‘장용영’으로 확대했던 것이죠. 장용위 때 처음 50명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나중엔 무려 2만명가량으로 확대됐고, 내·외영으로 나눠 내영은 한양 도성에, 외영은 수원 화성에 주둔시켰습니다.
장용영에는 국왕 호위를 넘어서서 기존 5군영을 통폐합해 조선군의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려는 정조 입장의 ‘국방 개혁’이자 ‘왕권 강화’라는 거대한 목적이 존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참여한 유명한 무관인 백동수도 장용영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한 뒤 조정에선 막대한 예산이 드는 장용영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봤고, 1802년 장용영은 폐지됐습니다.
기존의 금군인 용호영은 개항 이후 ‘무위영’, 이어 ‘친위영’으로 개편됐고 이후 ‘훈련대’와 ‘시위대’가 업무를 맡다가 대한제국의 ‘친위대’로 통합됐습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조선보병대’가 창덕궁에 거주하던 순종의 경호를 맡았고, 1931년 조선보병대가 해체된 뒤 창덕궁경찰서가 옛 조선 왕가의 경호를 담당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창덕궁경찰서는 ‘경무대경찰서’로 바뀌어 대통령을 경호하게 됐죠. 1963년 대통령 직속 기관인 ‘대통령경호실’이 창설됐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실 산하 ‘대통령경호처’로 격하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