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그래도 고종 임금은 반대파 '척결'엔 성공했다
친위 쿠데타의 성격도 있었던 1896년 아관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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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년을 맞아 쓴 지난번 글에선 120년 전 을사년의 진실 한 조각을 추적했습니다. 1905년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을 거부했는데 그 뜻과 달리 을사오적이 조약에 찬동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직전 이토 히로부미와 대면해 벌인 협상에서 ‘외교권을 양도하기로 결론을 지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고종이 한국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망국의 군주’라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해도, 과연 그가 정치적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아주 무능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난달 12·3 계엄령이 선포됐다 철회되고 아침이 밝은 뒤, 저는 학자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물었습니다. 그중엔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도 있었습니다. 김 교수는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제자로 고종과 대한제국기를 전공한 역사학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무나 황당하다. 조선 시대에는 언관(言官)이 존재해 군주를 견제했고, 고종조차도 아관파천이나 대한제국 수립 같은 큰 결정에는 명분과 지지 세력을 갖춘 뒤에 실행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두 가지가 모두 없다. 이렇게 밀어붙이는 정책은 일제 때나 있었을 만한 일이다.”
여기서 고종에 대한 언급이 주목됩니다. 사실 김 교수는 최근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휴머니스트)이란 연구서를 냈습니다. 개화 지식인 윤치호, 프랑스인 귀스타브 뮈텔 주교, ‘대한계년사’의 정교, ‘매천야록’의 황현, 평민 출신의 상공인 지규식까지 당대 인물 5인이 남긴 방대한 기록을 교차 분석하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국을 분석한 책입니다.
‘유약하고 정치력이 부족한 임금’으로 인식됐던 고종은, 그러나 을미사변 한 해 뒤인 1896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 해에 아관파천이 일어났습니다. 흔히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일’로만 알고 있는 이 사건은, 가만히 살펴보면 이미 1894년 청일전쟁 때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의 감시와 압력, 을미개혁파 신료들의 견제를 피해 정치적 실권을 되찾으려는 ‘거사’이기도 했습니다. 항일의 성격도 물론 있었지만 자신의 반대파를 전격적으로 공격해 궤멸시켰다는 점에서 정적(政敵)인 신하들에 대한 친위 쿠데타의 성격 또한 어느 정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제 생각이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 일본의 도움을 받아 집권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은 태양력 사용과 단발령이라는 큰 변화가 포함된 을미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고종은 사실상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실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아관파천이 일어난 1896년 2월 11일 아침 7시 30분, 고종은 경복궁을 벗어나 이어(移御)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치밀한 준비를 거쳐 전격적으로 단행됐습니다.
거사보다 훨씬 일찍부터 궁녀들이 가마를 타고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궁궐을 자주 드나들도록 은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감시하는 군사들이 가마를 들춰 보면 늘 궁녀 2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사 당일엔 이 가마에 고종과 세자(훗날의 순종)가 타고 있었지만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도록 밀지를 내려 일본군 병력 상당수가 한양을 이탈하도록 사전 조치했습니다.
2월 10일 밤 고종과 세자는 잠자리에 드는 척했다가, 나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 궁녀의 방으로 들어간 뒤 동트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가마에 탔습니다. 각자 가마 앞 좌석에 궁녀를 태우고 그 뒤에 앉았습니다. 문지기들에겐 미리 술과 맛있는 국을 주고 구석에서 마시게 했습니다. 이 모든 계획은 친러파 관료였던 이범진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범진의 아버지는 대원군 집권기에 ‘낙동의 염라 대왕’으로 불렸던 포도대장 이경하였고, 이범진의 아들은 훗날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으로 활동한 이위종이었습니다.
영추문을 나와 금천교, 내수사 앞길, 새문고개를 거쳐 러시아 공사관에 고종이 진입한 뒤, 여러 관리와 백성 수천 명이 공사관 담장을 에워싸고 환호했다고 합니다. 경복궁을 벗어나는 데 있어 ‘일본에게서 벗어난다’는 명분과 지지 세력을 이미 확보했던 것입니다.
이제 고종은 스스로 정적으로 여겼던 을미개혁의 주도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반격에 나섰습니다. 아관파천 성공 직후 ‘머리를 자르는 문제는 각자 알아서들 하라’며 을미개혁의 상징인 단발령을 사실상 철회했습니다. 또한 경무관 안환에게 이런 어명을 내렸습니다.
“빨리 궁으로 가서 역적 김홍집과 정병하를 베어 죽여라!”
명령은 전광석화와도 같이 실행됐습니다. 총순 소흥문이 경무청 문 앞 소석교에서 김홍집을 칼로 찔러 죽였고, 정병하도 칼을 맞아 죽었습니다. 소석교는 지금의 광화문 앞 KT 광화문지사와 주한 미국대사관의 중간 지점이라고 합니다. 을미개혁의 주도자 중 유길준은 순검에게 붙잡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고종이 이들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공격한 것에는 ‘저들이 감히 내 아내를 공격했다’는 판단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내인 명성왕후(’명성황후’는 훗날 대한제국 수립 후 추존된 명칭)의 피살에 두 사람이 관여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온건 개화파였으며 조선 말 역사의 주요 장면에 등장했던 김홍집은, 실제로 을미사변에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왕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는 데 서명했기 때문에 군주의 미움을 샀다는 것입니다.
아관파천 직후 누군가 김홍집에게 ‘어서 몸을 피하라’고 권했으나 김홍집은 의연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재상이었으니 조돈(趙盾)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간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조돈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재상이었습니다. 포악한 군주 영공(靈公)에게 간하다가 미움을 샀고, 영공이 그를 죽이려 하자 이웃 나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막 국경을 넘으려 할 때 조천이라는 사람이 영공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조돈이 군주를 시해했다.’ 그걸 알게 된 조돈이 사관에게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신하로서 직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시해한 것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조돈의 고사를 인용한 김홍집은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이었겠죠. ‘나는 근대 개혁을 위해 힘썼으나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막지 못했으니 나 또한 도의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은연중 고종을 포악무도한 군주인 진 영공에 견주고 있었습니다.
‘척결(剔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리 척결’ ‘부정부패 척결’처럼 ‘나쁜 부분이나 요소들을 깨끗이 없애 버린다’는 뜻으로 종종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의 원래 뜻은 대단히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바를 척(剔)’에 ‘긁어낼 결(抉)’, 그러니까…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냄’이란 의미입니다.
이미 칼에 찔리고 베여 죽은 김홍집과 정병하는 글자 그대로 ‘척결’ 당했습니다. 두 사람의 시체를 종로 큰길가에 널어놓자 격분한 백성들이 돌멩이로 때려 시체의 팔다리와 몸통이 깨졌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고종은 전격적인 아관파천 단행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보기에) 파렴치(破廉恥)한 반군주세력(反君主勢力)을 일거(一擧)에 처단(處斷)하고 척결(剔抉)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결코 흥분해서 어설프게 저지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김태웅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종은 주도면밀한 준비를 거쳐 이범진 등 탄탄한 ‘지지 세력’을 확보했습니다. 또 살해당한 왕비의 복권을 주장하고 단발령을 철회하는 등 백성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명분’을 갖춰 실행했던 것이죠.”
우리가 사극에서 곧잘 보는 고종의 모습은, 예를 들어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에서 남궁원이 그랬듯, 늘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생부 흥선대원군과 왕비 명성왕후의 위세 아래 짓눌려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치 일선에서 모두 사라진 1890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은 달랐습니다. 김 교수는 “고종은 그들에게서 정치력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과감한 추진력과 아내의 은밀한 용인술이 그 학습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로부터 정치를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너무나 어설플뿐더러 손발이 맞지 않는 결단과 행동과 변명으로 자신과 국민과 나라를 나락에 가까운 곳으로 빠뜨린 정치 지도자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차라리 고종에게서라도 판단력과 추진력만큼은 배워야 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附記: 글을 올린 뒤에 굳이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고종이나 아관파천에 대한 미화가 아닙니다. 김홍집 살해는 정당한 법 집행과 거리가 먼 폭거였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은, 무능한 군주로 여겨지는 고종조차 스스로 준비한 ‘거사’만큼은 계획의 주도면밀성과 실행의 과단성, 집행의 결단력에 있어서 ‘실패한 쿠데타’보다는 훨씬 나은 점이 있었다는 평가였습니다.
독후감 : 어쨌든 망국의 주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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