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 많은 청소년 8명과 ‘불수도북’ 2박3일 걷다
카드 발행 일시2024.09.03
에디터
김영주
호모 트레커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끝까지 완주할 겁니다.”
지난달 28일 서울시 중계동 불암산 등산로 입구, 8명의 청소년은 불·수·도·북 40km 종주 40㎞를 시작하는 지점에서 한입으로 이렇게 말했다.불수도북 종주는 서울 시내를 둘러싼 불암산(508m)·수락산(637m)·도봉산(740m)·북한산(836m) 4개의 산봉우리를 이어 걷는 장거리 하이킹이다. 산에 꾸준히 다닌 사람도 쉽게 도전하기 힘든 코스를 중고생들이 종주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다음 달 시작하게 게 될 백두대간 지리산(1915m)~태백산(1567m) 450㎞ 종주를 앞두고 있어서다.
호모 트레커스는 서울 대림동에 있는 청소년보호시설 살레시오청소년센터와 손잡고 이곳에서 생활하는 아이들 8명과 함께 내달 18일부터 ‘청소년 백두대간 한달걷기’에 나선다. 1984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부산~진부령) 700㎞를 완주한 남난희(67)씨, 김미곤(52) 대장 등 10명의 산악인이 멘토(동행자)로 참여할 예정이다.
지난달 28일 불수도북 종주에 나선 서울 살레시오청소년센터 아이들과 멘토들이 불암산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불수도북 종주는 2박3일 일정으로 계획됐다. 첫날은 불암산 남서쪽 공릉역에서 출발해 수락산장(해발 약 600m)에서 야영한 뒤, 둘째 날은 수락산과 도봉산에 오른 후 우이동가족캠핑장으로 내려와 야영하는 일정이다. 지난해 한국산악회가 인수해 새 단장한 수락산장은 향후 일반인에게 개방할 예정이다. 우이동가족캠핑장은 지난 2021년 문을 열었다. 두 곳의 야영 장소가 있었기에 2박 3일 종주가 가능해졌다.
8명 중 3명의 아이들은 앞서 지난 7월에 진행한 북한산 1박 2일 트레이닝캠프에 참여한 경험자다. 김빈(18·가명), 신비(15·가명), 한산(15·가명)이다. 나머지 5명은 이번 캠프에 새로 합류했다. 스스로 한범(18·가명), 준산(17·가명), 이산(17·가명), 강산(15·가명), 백두(15·가명)라고 이름 지었다.
한범은 예전 백두대간 능선을 오갔던 호랑이처럼 백두대간의 범(虎)이 되고 싶다는 뜻에서 “한범으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또 이름에 ‘산(山)’ 자를 붙인 아이들이 많았다. 준산은 “지리산에서 태백산까지 꼭 완주하고 싶고,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산은 “평소 아버지와 산에도 가고 자전거도 같이 타곤 했는데, 백두대간을 하겠다고 하니 ‘’잘 생각했다’고 응원해주셨다”면서 “멋지게 완주해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불수도북 종주에 나선 서울 살레시오청소년센터 8명의 청소년과 동행자들. 김영주 기자
아이들의 다짐과 달리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먼저 2박 3일 동안 먹고 자야 할 짐을 모두 짊어지고 걷는 백패킹(Backpacking)이라 배낭 무게부터 만만치 않았다. 2인 1조로 팀을 짠 아이들은 텐트와 침낭, 취사 장비, 식량, 식수 등 약 10㎏의 짐을 배낭 안에 욱여넣고 걸었다. 평소 안 해본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다 보니 다들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또 이날 한낮의 기온은 33도까지 올랐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날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다 보니 땀이 줄줄 흘렀다. 다들 식수를 약 2L 정도 준비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소진됐다. 중간에 물을 구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불암(佛岩)은 부처를 닮은 바위라는 뜻이다. 암릉으로 이뤄진 불암산 정상에 서면 서울의 동쪽과 남양주 방면 산하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정상에서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그러나 공릉역에서 불암산까진 약 6㎞, 전체 일정에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서둘러 수락산으로 향했다. 불암산에서 수락산을 가기 위해선 덕릉고개로 내려와 다시 능선을 타고 산꼭대기로 치고 올라가야 한다. 반복되는 오르막내리막이 아이들에겐 쉽지 않은 구간이다.
아이들이 불평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줄곧 내려가는 줄만 알았는데, 작은 봉우리가 수시로 나타났다. 달래서 같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황철현(47·살레시오청소년센터장) 신부를 비롯해 동행자로 참여한 이들 모두 아이들을 달래고, 때론 채근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물통이 거의 바닥을 보였다. 이날 일정을 마치기 위해선 수락산까지 4~5㎞를 더 가야 하고, 식수를 구할 곳도 없었다. 무더운 날씨를 고려하지 않고 운행 전략을 짠 결과다. 누군가 먼저 내려가 식수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급한 마음에 배달 앱에 접속해보니 덕릉고개까지 배달이 가능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이날의 ‘트레일 앤젤’이었다. 아이들도 혼쭐이 났는지 너도나도 “내일은 물을 2배로 준비하겠다”고 했다. 비싼 비용을 치르긴 했지만, 산에서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워준 계기가 됐다.
덕릉고개서 이온음료로 목을 축였지만, 갈증은 더해갔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 친구가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백두는 신체는 건장했지만, 상·하체 근력이 부족해 보였다. 걷는 자세도 좋지 않았다. 멘토로 참여한 홍흥기(블랙야크 셰르파) 씨가 “두 발이 11자가 되도록 똑바로 걸어야 한다”고 일렀지만, 단번에 고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남식(44) 신부와 남난희씨, 그리고 기자가 백두의 전담 동행자로 나섰다. 덕릉고개에서 불암산까지 약 4㎞.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벌써 황혼이 지고 있었다. 백두는 “못하겠다”, “더는 못 가겠다”, “여기서 이대로 자고 싶다” 등 피로를 호소했다. 최 신부와 남난희씨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묵묵히 같이 걸어줄 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남난희씨는 10여년전 중범죄를 저지른 청소년 1명과 지리산 둘레길을 한 달간 동행하며, 멘토링(Mentoring) 한 경험이 있다. 당시 그 학생은 걷기가 시작된 첫 1주일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름쯤 지났을 때 비로소 대화가 시작됐다고 한다. 그 친구에 비하면 살레시오청소년센터의 아이들은 “잘 걷고 있다”고 했다.
“한 번도 안 해본 아이들인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특히 오늘은 날씨도 무척 덥고, 걸으면서 먹을 것도 충분치 않고, 아이들한테 아무런 보상도 없잖아요. 그런데도 백두대간을 하겠다고 2박 3일 훈련에 참여한 아이들이 너무 기특합니다. 다들 신체 건강하고 몸과 마음도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데, 같이 하는 어른들이 조금만 도움을 주면 모두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멘토들은 아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살레시오청소년센터에 오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센터장을 맡은 황철현 신부도 아이들의 ‘신상 카드’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보고 나면 선입견을 가질 수 있어서다. 묻고 않고, 선입견을 갖지 않고, 같이 걸어줄 뿐이다.
오후 8시가 돼서야 수락산장에 당도했다. 한국산악회 곽호청 이사 등 2명이 일행을 맞았다. 곽 이사는 지난해 한국산악회가 수락산장을 인수한 후, 유지·보수를 위한 자원봉사를 줄곧 해왔다고 한다. 덕분에 산장에 전깃불이 들어오고, 새로 마련한 야영 데크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짓기로 했다. 한 달간 백두대간 종주를 염두에 둔 훈련이었다. 걷고 스스로 밥을 해먹는 과정이 백두대간 종주의 주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내 밥 탄 냄새가 산장에 진동했다. 가서 보니 더 심각했다. 밥이 탄 게 아니라, 코펠 바닥에 처리된 방염재가 타서 난 냄새였다. 코펠에 구멍이 날 정도로 탔다. 물을 끓이는 데 쓰는 일체형 버너·코펠에 밥을 해서 생긴 문제였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밥을 해 먹었다. 설익은 밥에 반찬은 햄·김치 등 부족한 식단이었지만, 아이들은 “산에서 먹는 밥이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고 했다.
이날 일정은 오후 11시가 돼서야 마무리됐다. 16명의 인원이 한데 움직이며, 야영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앞으로 백두대간에서 맞이해야 할 밤과 해결해야 할 밥이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아이들은 처음 해본 야영이 신났는지 밤늦게까지 재잘거렸다.
지난달 29일 오전, 출발 전 준비 운동을 하는 참가자들. 김영주 기자
둘째날, 오전 6시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1시간 늦춰졌다. 이날 아침은 모든 참가자가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이 되는 간편식으로 해결했지만, 그것 말고도 할 일은 많았다. 텐트를 걷고, 사이트를 정리하고, 배낭을 싸고, 준비체조를 하는 일들이다. 이것들이 하나씩 몸에 익혀야 아이들이 산꾼이 될 것이다.
아침 준비 운동은 ‘UDT 전설’로 불리는 유병호(63)씨가 맡았다. 그는 이번 트레이닝캠프를 참가하기 위해 전날 부산에서 새벽 차를 타고 올라왔다. 평소에도 재능 나눔을 위한 일이라면 앞장서는 그는 “청소년을 위한 일이라면 꼭 참석하겠다”며 달려왔다. 아이들은 UDT에서 33년간 근무하며, 강릉잠수함침투사건·재미니호인질구출작전 등 위험한 작전의 최전선에 섰던 유씨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10대 후반 남자아이들의 눈에 그는 ‘영웅’이었다.
지난달 29일, 수락산 정상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김영주 기자
수락산에서 도봉산 가는 길은 서쪽 능선을 따라 내려와 후, 망월사역 근방에서 원도봉계곡이나 다락능선을 타고 포대능선 정상에 오르는 게 보통이다. 이후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가족캠핑장으로 내려서게 된다. 수락산 정상에서 망월사역으로 내려오는 5㎞는 수월했다. 내내 내리막이었고, 경사도 급하지 않았다. 점심은 망월사역 인근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해결했다. 8명의 아이 모두 ‘짜장 곱빼기’를 주문했다.
짜장면으로 배를 채웠지만, 얼마 가지 못해 아이들이 길에 널브러졌다. 도봉산 오르는 초입, 심원사로 가는 가파른 경사에서 모두 힘들어했다. 길바닥에 드러눕는 아이들도 있었다. 또 8명 중 5명이 피부 쓸림을 호소했다. 날이 더운 데다 장거리 산행을 해보지 않은 아이들이라 사타구니 부위가 쓸려 생채기가 난 것이다. 중간에 약국에서 거즈를 사서 덧댔지만, 이내 땀에 차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 중 한 명은 상태가 심해 이날 산행을 그만둬야 할 정도였다.
남난희씨가 평소 알고 지내던 임훈 순천향대 부천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를 급히 호출했다. 임 교수는 전날 야근을 하고 쉬는 날이었지만, 이날 야영 장소인 우이가족캠핑장까지 오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포대능선 정상과, 자운암, 우이암을 거쳐 우이가족캠핑장까지 내려오니 오후 8시에 다 됐다. 이틀 연속 늦은 시간까지 산행해 모두들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사타구니 상태가 심해 다음날까지 걷는 것은 무리였다. 임 교수가 작은 텐트 안에서 아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의 피부가 약해 그런 것이니 이번에 겪고 나면 앞으론 더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일종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결국 2박3일 캠프 중 산행은 이틀만 하기로 결정했다. 사흘째 날, 걷기 대신 유병호씨의 강연으로 대체했다. 강의 내용은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도전”이었다. 이틀간 산행으로 녹초가 됐지만, 강의를 듣는 난 후 아이들의 의지는 더 단단해진 듯 했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꼭 백두대간을 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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