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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조절장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15. 14:44

[에디터 프리즘] 

분노조절장애
중앙선데이
입력 2024.07.13 00:10

업데이트 2024.07.13 06:05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프로야구 막판 순위 다툼이 한창이던 지난해 가을 ‘야구팬들이 항상 화나 있는 이유’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SNS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든 지든 늘 불안하고 화가 나는 게 야구팬의 숙명이란 것이 강의 요지였다. 크게 지면 “또 졌네”라며 대노하고 아깝게 지면 “기껏 따라붙었는데 이걸 지네”라며 극대노한다. 심지어 꾸역승을 해도 “이렇게 꼭 진을 빼야 할 경기였냐”며 화를 내고 크게 이겨도 “내일과 나눠서 좀 치지”라며 이내 불길함에 사로잡힌다. 게다가 1위 팀도 10번 중 4번은 패하고 3할 타자도 7번은 범타로 물러나니 그때마다 화날 수밖에 없다는 분석에 많은 야구팬이 좋아요를 눌렀다.

분노는 마른 벌판의 들불과도 같아
서로 배려하며 공동체 지켜 나가야

올해도 전반기에만 600만 관중이 몰리는 등 자타공인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프로야구를 보면서도 이처럼 화를 참지 못하는 건 그만큼 팬들의 애정이 깊기 때문일 거다. 그렇게 화내고도 다음날 또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게 한국의 찐팬들이다. 하지만 야구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마음속 분노가 툭하면 밖으로 폭발해 상대방을 찌르고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이,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를 자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우리 곁에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분노조절장애. 공식 의학 용어로 간헐적 폭발성 장애인 이 정신질환은 폭력이 동반될 수 있는 행동 장애라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도 뜬금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충동적 고함이나 과도한 책망을 일삼으며,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공격적인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게 대표적 증상으로 꼽힌다. 더 나아가 이들은 분노를 표출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여기고 반복적·의도적으로 분노를 폭발시키곤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가히 ‘분노 공화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회사에선 꼰대 상사의 버럭이 일상화·만성화돼 있는가 하면 가정에선 밤마다 부모와 중고생 자녀가 서로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 소리가 층간소음의 한 축이 돼버린 지 오래다. 정치권은 또 어떤가.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이들의 분노는 누구라도 접근만 하면 무조건 찔러대는 고슴도치나 조그만 외부 자극에도 극렬하게 울부짖는 연골 없는 무릎 환자의 본능적 행태와 다를 게 없다.

더 큰 문제는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질환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바쁘고 그 과정에서 또 버럭 화내며 분노하기 일쑤다. 심리상담 전문가들이 가장 치료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도 이처럼 자신의 허물을 한사코 부인하는 자들이다. 더욱이 이런 자들일수록 타인의 일상적 행동조차 적의가 있는 걸로 받아들이는 ‘적대적 귀인 편향’에 사로잡혀 있기 십상이다.

분노는 마른 벌판의 들불과도 같아 순식간에 퍼지고 전염된다는 점에서 그 어느 정신질환보다 폐해가 크다. 사회 건강과 안전 측면에서 시한폭탄 같은 이런 사람이 내가 속한 조직과 가정의 리더이자 의사 결정권을 가진 자라고 상상해 보라. 숨이 턱 막히지 않는가. 근묵자흑(近墨者黑)에 물이유취(物以類聚)라고 이런 자들은 멀리하는 게 상책이련만 마냥 회피하며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오호통재일 따름이다.

그렇잖아도 올여름 역대급 폭염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불쾌지수에 분노지수가 겹쳐 폭발하지 않도록 모두가 조심, 또 조심해야 할 때다. ‘욱하는 감정이 나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분노가 내게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쯤은 열어두고 살자’는 제언은 국민 정신건강이 위험수위에 다다른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다.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며 지금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분노 바이러스의 창궐에 맞서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지켜내는 길이다.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박신홍 정치사회에디터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