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혁명 성공한 삶, 땅 욕심이 화 불렀나
중앙일보
입력 2024.09.06 00:18
서울 종로구 수진방과 정도전
김정탁 노장사상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성계를 부추겨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란 새 왕조를 세웠으니 혁명가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권문세족에 의존하는 고려의 정치와 여기에 기생하는 불교를 철저히 부정한 뒤 조선을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설계했다. 이에 따라 정치 운영방식을 귀족제에서 관료제로 바꾸고,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이것도 모자라 사농공상이란 신분제까지 도입해 느슨했던 고려사회의 분위기를 일신코자 했다.
강한 관료제 꿈꾼 조선의 설계자
유배 경험 살려 토지개혁 단행
자신은 수송동 일대에 거대 저택
장수 기약한 땅에서 수명 다해
온건 개혁주의 이색과 다른 길
성공에 매몰돼 신념 포기한 결과
권력분산 신권국가 지향
북악산에서 내려다본 경복궁과 광화문 방면 풍경. 경복궁 왼쪽 아래편이 정도전의 큰 집이 있었던 수진방이었다. [사진 김정탁]
또 군국(軍國)의 요직을 대부분 겸임해 군사·외교·행정·교육의 주요 국책을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고쳐나갔다. 이성계도 나랏일의 상당 부분을 위임해 그는 명실상부한 조선의 이인자였다. 한양 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사직의 위치를 정하고, 각 궁궐, 전각, 궁문의 이름도 짓고, 사대문과 사소문 및 성안 52방의 이름까지 제정했다. 나아가 조선을 신하들의 회의를 거쳐서 결정하는 신권의 나라로 설계해 왕을 사실상 상징적 존재로 머물게 하려고 했다. 대통령제 대신 내각책임제를 지향한 셈이다. 이런 시도는 그가 역적으로 죽었어도 조선왕조 500년 동안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신권(臣權)의 나라에선 권력분산이 이루어져서 바람직하긴 해도 조선에서 제대로 작동했는지 판단하기란 힘들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등장했다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어서다. 임진·병자의 양난을 겪은 후에도 조선은 수혈에 의존한 채 300년을 더 지속했는데 사대부들이 자기들의 강력한 신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큰 이유라고 본다. 조선이 무너지면 이런 특권이 사라지기 때문에 차라리 수혈로 유지되는 나라라도 지속이 되길 바랐다. 지금의 북한 체제가 공산당 엘리트들의 특권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수송동의 상당 지역을 차지할 만큼 정도전의 집이 넓었다. 대림빌딩(왼쪽)과 이마 빌딩(가운데)이 모두 정도전의 집터에 세워진 것이다. 오른쪽 비스듬한 흰 건물이 서울지방국세청. [사진 김정탁]
정도전이 추구했던 신권의 나라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야박해도 그의 삶이 감동적이었다면 그를 높이 평가하는 데 어떤 주저함이 없다. 그렇지만 역성혁명이 성공한 후 그가 누렸던 삶은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무엇보다 한양 수진방(壽進坊)의 그의 집이 너무 커서다. 수진방은 세로로는 세종대로와 우정국로, 가로로는 율곡로와 종로 사이의 넓은 공간이었는데 당시 수동과 송현으로 크게 구성되었다. 정도전의 집은 수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지금 이 공간에는 종로구청과 종로소방서, 대림빌딩, 이마빌딩, 서울지방국세청, 연합뉴스 건물 등이 있으니 얼마나 컸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그의 집이 이렇게 컸다는 사실을 지금 우리가 아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면서 집이 몰수돼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 뒤 지금껏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다. 본채는 국립 중등교육기관인 중학서당이 되었다가 수송초교를 거쳐 지금은 종로구청이 되었다. 안채는 왕실용 옷감 및 의복의 염색과 직조를 담당하는 제용감이 되었다가 불교관리기구인 사사관리서, 대한매일신문 사옥, 중동고, 숙명여고 등이 거쳐서 갔다. 마구간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말과 가마를 관리하는 사복시가 되었다가 해방 후 경찰기마대를 거쳐서 지금은 이마빌딩이 자리한다.
송현동 쪽에서 바라본 조선시대 수동 지역. 왼쪽 건물과 가운데 건물 사이에 그림 그리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가 있었다. 오른쪽의 트윈트리타워 건물 자리가 정도전이 살해된 곳. [사진 김정탁]
조선 초에 수동은 육조 거리 바로 뒤편에 위치해 의정부는 물론이고, 궁궐과도 가까워 요지 중의 요지였다. 이런 요지에 정도전이 집을 크게 지을 수 있었던 건 한양을 설계한 장본인이라 집터를 정하는 데 그의 권세가 작용했으리라 본다. 당시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해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무학대사가 말한 위치가 동향이어서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반박해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 위치에 들어섰다. 이 때문에 수진방은 한양 최고의 요지가 될 수 있었다.
피살 후 ‘수진방’으로 이름 바뀌어
옛 숙명여중고 위치에 세워진 표지석. 정도전 집의 안채가 있었다. [사진 김정탁]
정도전은 자신이 사는 동네를 장수하라는 뜻에서 ‘오래 살 수(壽)’를 써 수동(壽洞)이라고 했다. 그런데 수동 바로 옆인 지금 트윈트리타워 건물이 들어선 곳에서 살해되었다. 그가 어째서 집 근처에서 살해됐을까? 정도전 측근인 남은의 첩 집이 이곳에 있었는데 왕세자 이방석의 장인인 심효생 등과 함께 술잔을 나누다 불귀의 객이 돼서다. 그러니 장수하고 싶어서 자신이 살던 동네를 수동이라 지었어도 정도전은 실제 그렇게 살지를 못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정도전이 수명(壽)을 다했다는(盡) 의미로 여기를 수진방(壽盡坊)이라 바꿔 부르기도 했다.
한편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된 데는 정도전이 앞장서 이룬 토지개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토지개혁을 막상 실행에 옮기려면 정말로 힘든데 이를 과감히 밀어붙인 건 전라도 나주에 천민이 사는 한 부곡으로 유배를 가 이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해서다. 이 토지개혁에 성공함으로써 정도전은 백성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아 역성혁명도 꿈꿀 수 있었다. 그런데 역성혁명이 성공한 후 그가 산 집이 궁궐 규모로 컸으니 도저히 토지개혁에 앞장선 사람 같지가 않다. 이런 큰 집을 짓고 유지하려면 수입이 많아야 하는데 그 수입의 대부분이 토지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정도전이란 인물을 평가하는 데 그가 산 집으로 모두를 설명하는 건 분명히 무리다. 그렇지만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는데 그들이 남긴 말과 글이 객관적 사료가 되지 못할 때가 왕왕 있다. 말과 글이 그들의 처신과 달라서다. 게다가 역사적 사료조차 승자의 기록인지라 사료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 인물을 평가하는 데 정확한 사료는 일상에서 자연스레 묻어나와야 한다. 의식주가 그러한데 그중에서 주, 더구나 살았던 집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게 가장 정확한 사료가 될 수 있다.
장자는 말한다. “행복은 깃털처럼 가벼운데 누구도 간직할 줄 모르고, 재앙은 땅처럼 무거운데 누구도 떠날 줄 모른다.” 정도전은 땅처럼 무거운 ‘거대담론’을 좋아해서인지 그의 처신도 거창했다. 그래서 역성혁명도 꿈꿀 수 있었다. 그의 이런 처신은 고려사회 개혁에는 찬성하나 고려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온건한 개혁주의자 이색과 정몽주와 비교가 된다. 누구의 방식이 옳았는지 여기서 판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후 성공한 삶에 매몰돼서인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게 사실이다.
80년대 운동권도 반성해야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학 자리에 세워진 표지석. 역시 정도전의 옛 집터 안에 있다. [사진 김정탁]
오늘날 사회과학은 혁명·이념·민족·애국과 같은 거대담론에서 ‘생활세계’라는 소박한 담론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혁명을 꿈꾼 사람들이 일상에서 전혀 혁명적이지 못하고, 이념을 앞세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부딪힐 때는 신념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조선 시대 주자 성리학의 이념을 금과옥조로 받든 사대부나 1980년대 운동권의 상당수도 혹 이러지 않았을까? 하긴 말로만 거창하게 떠드는 애국보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일상에서의 실천이 애국적 행동으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런 작은 애국적 행동들이 모이면 혁명 못지않은 결과도 만들어낸다.
정도전과 대비되는 사람을 주위에서 종종 발견하는데, 노태우 정부 때 총리를 지낸 강영훈(姜英勳)도 그중 하나라고 본다. 그는 총리에 임명된 지 1년 만에 사표를 냈는데 이유는 총리로 1년을 재직하다 보니 자신을 향해 칭송하는 소리가 그리 거북하게 들리지 않아서라고 한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는 이런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그는 평소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5·16 때는 육사 교장이었는데 5·16을 반대해 강제 예편을 당해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거기서 학생 신분으로 공부했는데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이 햄버거 가게에서 시간제로 일했다고 한다.
강영훈은 혁명을 반대했어도 일상에선 혁명가 못지않게 바르게 살았고, 이념을 내세우지 않았어도 옳은지 그른지를 명확히 판단해 생활세계에서 정의를 구현하고자 애썼다. 그래서 깃털처럼 가벼운 행복을 늘 가슴에 간직할 수 있었다. 이점이 혁명해도 그다지 혁명가답지 않게 살아간 정도전과 비교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도전은 머리로 혁명했는지 몰라도 마음으로까지는 혁명하지 못했다고 본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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