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56] 그를 따라 초록 숲으로
무인도에 가게 되면 뭘 가져가고 싶은지 묻는 게임이 있었다. 고등학교 수련회에서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해서 쉽게 대답할 수 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섬의 생태 환경을 상상하고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꼽아보고 우선순위를 정하려 했으니 머릿속이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가상의 스토리이지만 생존 게임에 과몰입한 나머지 어떻게든 조난을 피해야겠다는 엉뚱한 다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로 비슷한 게임을 몇 번 해보고 나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로빈슨 크루소 같은 사람 한 명이요.”
김옥선(1967~ ) 작가는 섬에 산다. 서울 태생이고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그의 집은 제주도에 있다. 그의 사진에는 섬에 사는 사람과 식물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한다. ‘하멜의 보트(2006~2008)’ 연작은 제주에 이방인으로 정주하게 된 사람들의 일상을 담았다.
그곳에 살고 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제주를 떠날 수도 있는 사람들. 마치 17세기에 상선을 타고 제주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처럼 그들은 거기에 그리고 여기에 머물고 있다.
자신이 속한 곳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습은 김옥선의 사진 속에서 그들이 속한 환경과 찰떡처럼 어우러진다. 휴머니스트인 주인공 케빈은 딱 동네 산책하는 차림으로 숲길 앞에 비스듬히 서있다. 얼굴 생김새도 눈빛도 알 수 없으니 마음대로 상상하기 나름이다.
목적지가 분명하지 않아 보이는 발, 손등을 덮은 긴 소매, 슬쩍 엿보이는 길어진 수염은 낯설지만 친근하다. 얼마나 깊은 숲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초록의 길 앞에 그는 서있다. 단호하게 돌린 고개, 소실점을 향한 시선이 왠지 그를 따라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아니 어쩌면 그는 저 길을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머무는 것에도 떠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라 해도 후회가 없을 순 없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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