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물 많은 장마철이면 떠오르는 왕버들 종류의 특별한 나무
★ 1,240번째 《나무편지》 ★
비 내리는 지금 그곳에는 어떤 나무가 눈에 들어오시는가요. 사람마다 마을마다 지금 눈에 들어오는 좋은 나무는 제가끔 다르겠지요. 장마 들어도 어김없이 여름이면 화려한 꽃을 피우는 수국 무궁화 배롱나무를 먼저 바라보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맑고 시원한 그늘의 느티나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마을도 있을 겁니다. 물 많은 장마철이면 제게도 먼저 떠오르는 나무가 있습니다. 물푸레나무, 시무나무, 그리고 오늘 《나무편지》에 보여드리는 왕버들이 그런 나무입니다.
졸졸 흐르는 개울 물 소리에 어울리는 나무들입니다. 모두 물을 좋아해서 물가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들입니다. 그 가운데 물과 가장 친한 나무는 아무래도 왕버들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겁니다. 오늘 《나무편지》의 나무는 198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청도 덕촌리 털왕버들〉입니다. 그냥 왕버들이 아니라 털왕버들인데요. 이 종류 가운데에는 유일한 천연기념물입니다. 버드나무과 왕버들의 한 종류인 털왕버들 Salix chaenomeloides Kimura var. pilosa (Nakai) Kimura 은 왕버들과 마찬가지로 개울가에서 잘 자라는 나무로,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 지역에서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얼핏 보아서는 왕버들과 다를 바 없지만 나뭇가지와 잎자루에 털이 돋아난다 해서 왕버들 앞에 굳이 ‘털’자를 붙여 ‘털왕버들’이라고 부르는 나무입니다. 하지만 잎자루와 나뭇가지의 털이 맨눈으로 금세 확인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나무 동정에 아직 노련하지 못한 나로서는 털왕버들과 그냥 왕버들을 구별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마침 늘 가지고 다니는 루뻬라고 부르는 식물관찰용 확대경이 웬일인지 나무 앞에서 찾으니 찾을 수 없어 그냥 맨눈으로 잎자루와 나뭇가지를 가만가만 살펴봤습니다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왕버들이든 털왕버들이든 동정은 어렵지만, 이 계절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무는 왕버들 종류들입니다. 아마도 물이 많은 계절이어서 그럴 겁니다. 왕버들 종류는 대개 한적한 시골 마을의 개울가에서 볼 수 있거든요. 우선 왕버들 종류 중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청송 관리 왕버들〉 〈김제 종덕리 왕버들〉 〈광주 충효동 왕버들 군〉이 모두 그렇습니다. 천연기념물이 아니라 해도 그 동안의 답사 과정에서 만난 근사한 왕버들은 거의 물가에 서 있는 나무들이었습니다. 물 많고 물이 그리워지는 이 계절에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나무인 거죠.
〈청도 덕촌리 털왕버들〉은 청도 각북면 보건소 앞 도로에서 ‘청도 남강서원’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개울가에 서 있습니다. 보건소 앞으로 난 지방도로 902호선에서 개울 위로 난 다리를 건너는 자리입니다. 개울 건너편에서도 이 나무의 근사한 모습은 넉넉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서기보다는 오히려 개울 건너편에서 개울 풍경과 함께 나무를 바라보는 느낌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역시 왕버들 종류의 나무는 개울을 품은 풍경을 바라보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리 오래된 나무는 아닙니다. 〈청도 덕촌리 털왕버들〉을 천연기념물에 지정한 건 오래되었거나 인문학적 가치가 높은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털왕버들이 왕버들 종류 가운데에는 조금 특별한 나무라는 생물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청도 덕촌리 털왕버들〉은 나무나이를 200년 정도로 짐작하는 나무이니, 천연기념물 급의 나무 가운데에는 어린 편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규모도 그리 큰 건 아닙니다. 나무높이는 15미터이고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4.9미터에 불과합니다. 연륜이 짧아 그리 큰 나무는 아닙니다만, 나뭇가지펼침 폭은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넓은 편입니다. 동서로 21미터, 남북으로 20미터 정도나 펼쳤으니까요. 그래서 개울가에 어울린 평화로운 풍광만큼은 천연기념물 급입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 나무를 바라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합니다. 봄에 처음 잎이 돋아날 때 모든 가지에서 한꺼번에 잎이 돋으면 그해에는 풍년이 들고, 가지마다 따로따로 잎이 성글게 돋아나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이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무리 큰 나무라 해도 잎이 각각의 가지마다 눈에 뜨일 정도로 따로따로 피어나는 경우가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차이야 있을 수 있지만, 그게 눈에 뜨일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어요.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봄에 이 나무의 잎 돋는 모습을 보며 언제나 풍년이 들 것임을 믿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던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나무는 그렇게 언제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마음지킴이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지킴으로써 마침내 마을의 평화를 이뤄온 거죠. 짧게 머물렀던 〈청도 덕촌리 털왕버들〉 곁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 이 옛 이야기에 대한 생각을 여쭙지는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이 한 그루의 나무는 여전히 마을 살림살이의 평안을 상징하는 나무인 게 분명해 보입니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며 이뤄가는 사람살이의 평화를 짚어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남부 지방은 이미 장맛비의 피해가 곳곳에서 적지 않은 듯합니다. 이제 중부지방도 장맛비가 이어질 모양입니다. 일기예보가 오락가락합니다만, 앞으로 열흘 정도를 내다보는 중기예보에는 거의 매일 비 소식이 들어있네요. 비 내리는 개울가 왕버들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평안한 마음으로 건강히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7월 8일 아침에 1,240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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