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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살아남는다는 것은 투쟁입니다, 기적입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 2. 14:32

살아남는다는 것은 투쟁입니다, 기적입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4.01.02 02:51

업데이트 2024.01.02 03:29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올 한 해를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일단 생존하는 데 성공해야 한다. 지난 연말에도 가자지구에는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 나갔다. 이 시각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간신히 모면한 생존자들이다. 국내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출생, 노인 빈곤, 자살에 있어 최악의 선두를 다투는 나라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살아남고 있었다. 근원 모를 전염병으로부터, 느닷없는 재해로부터, 예고 없는 불운으로부터, 돌발적인 사고로부터 살아남고 있었다. 다들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각종 사고로부터 생존한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갈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그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건강이 유지되어야 한다. 철학자 헤겔에 따르면, 죽음으로 인해 신체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 바로 삶이다. 몸을 홀대하면, 결국 내장과 사지의 기능이 저하되고, 삐걱거리고, 잘 돌아가지 않게 된다. 실제로 팔다리가 몸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던가. 팔다리를 몸에 잘 붙이고 있으려면, 방심하지 않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혈기 넘치는 사람들은 이 안간힘을 잘 모르겠지. 그러나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 그들에게도 신체의 위기가 올 것이다. 실로 삶이란, 신체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다.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삶이란 죽음의 가능성에 대한 투쟁

생각의 공화국

이것이 어디 신체만의 문제이겠는가. 정신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 삶이기도 하다. 정신이 분열되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도 안간힘을 써야 한다. 자칫 감정에 압도되어 이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이성에 집착한 나머지 감정을 무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갇혀 마음의 탄력을 잃어가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균형 감각을 헌신짝처럼 갖다버려 왔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코올과 타성에 젖어 총기를 잃어가는가. 뇌 잃고 두개골 고치려 들면 이미 늦는 법. 저렇게 되지는 말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기억력인들 멀쩡하랴. 자칫 실제의 기억은 사라지고, 가공의 일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로 삶이란, 정신의 통일성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다.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사고와 재해와 전쟁으로부터 살아남고, 일상을 버틸 건강을 유지해냈는가. 축하한다. 그러나 이제 자본과 과로가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다. 스스로 밥을 벌어먹어야 한다. 누군가 인생을 대신 살아주어도 문제다. 그러면 심신의 기능이 퇴화하기 시작할 테니까.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노동은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진행된다. 어쨌거나 현재 이곳은 자본주의 사회니까. 칼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 통제하거나 끝내 길들이는 데 실패하고 남은 것이 삶이다. 일터에 나가 스스로를 시스템에 길들이고 돌아왔을 때 남아있는 게 삶이다. 그 작고 여리고 몰캉몰캉한, 그러나 과로에 너덜너덜해진 삶을 보호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한다. 고생스럽지만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고 여가를 확보해야 한다.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신체와 정신 와해 가능성 맞서
방심하지 않고 안간힘을 써야
잘 살아내려면 일단 생존해야
사고와 재해에서 무탈하기를
몸과 마음의 안녕 유지하면서
자신만의 상상의 축제 열기를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권력인들 당신을 가만히 두겠는가. 이 세상은 기운이 뻗치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지배하는 법. 이 세상의 주인은 대개 외향적인 사람, 나대는 사람, 적극적인 사람, 사교적인 사람, 성취 지향형의 사람들이다. 그들 덕분에 이 세상이 돌아간다. 고맙다. 그러나 그중 과욕의 권력자들은 무의미한 행사에 당신을 동원하려 들 것이다. 쉬지 않고 새로운 의제를 제시할 것이다.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꼬드길 것이다. 설문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하라고 요청할 것이다. 권력이 이루어낸 유무형의 성취를 인정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열성적으로 박수치라고 요구할 것이다. 까다롭게 굴지 말고 따라오라고 요구할 것이다. 부당한 요구에는 저항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나 저항하는 와중에도 당신의 시간은 소진된다. 때로는 싸울 가치도 없는 상대에 저항하느라 낭비하는 게 삶이다.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면 만사형통일까.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는 보통 인간의 삶에 무관심한 승려가 등장한다. 그는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고, 세계대전에 끌려가지도 않았으며, 건강한 신체를 갖고 있으며, 금각사(金閣寺)라는 절에 소속되어 있기에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삶을 충만하게 살아내지 못한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관심이 결여되어 있으니까. 학교 성적도,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가난도, 이성의 유혹도, 조국의 패전도 그의 마음을 자극하지 못한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아름다움에 있다. 들꽃의 아름다움이나 저녁놀의 아름다움이나 미인의 아름다움이나 수공예의 아름다움이나 일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초월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다. 공감이니 평등이니 공정이니 동정심이니 우애니 하는 세간의 덕목으로부터 영향조차 받지 않는 궁극의 아름다움, 그러기에 무익한 아름다움, 무익해서 더 찬란한 아름다움. 거기에 관심이 있다.

금각사를 불 태운 뒤 삶이 열렸다

 

초월적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한, 그는 일상을 제대로 살아낼 수 없다. 그가 꿈꾸는 아름다움은 어느 순간 돌연히 나타나는 것이지, 먹고 싸고 입고 엎어져 자는 일상에서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삶이란, 결국 나아가고 쌓아 올리고 생산하고 욕심내고 획득하고 소비하고 부패하다가 결국 덧없어지는 모래성 같은 것이다. 그가 열망하는 아름다움은 그러한 잡다한 일상을 넘어서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다. 그것이 바로 그가 상상하는 ‘금각사’다. 그러한 금각사 혹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구구절절한 일상의 삶을 정지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금각사를 불태우고 나서야 주인공은 결심한다. 이제 살아야겠다고.

누구나 한때 찬란한 아름다움에 눈부셔 본 적이 있지 않을까. 다들 각자의 금각사를 불태우고 마침내 범속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찬란한 아름다움이란 과연 실재했을까. 마치 상상의 금각사처럼, 그 아름다움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두 잠든 밤에 조용히 내린 첫눈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잠들었기에 그 눈을 보지는 못하고, 다만 꿈에서 그 눈발을 본다. 그러니 그 아름다움은 실재하는 것인가. 깨어나면 눈은 이미 그쳤고,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더러워지기 시작한 눈을 쓸고 치우는 일만 남았다. 쓸고 치우는 일, 그것이 삶이다. 정작 젊었을 때 젊음을 의식하기 어렵듯이, 아름다웠던 순간에 아름다움을 의식하기는 어렵다. 결국 지나간 아름다움의 잔해를 꼼꼼히 치우는 게 생존자의 몫이다.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이제부터 눈을 치워야 한다.

삶은 ‘상상하는 개인’들의 것

 

올 한 해도 경황없이 출근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잔병치레하고, 쓰레기를 배출하면서 늙어갈 것이다. 우호적이지 않은 환경과 맞서야 하는 생명체가 인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니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어려운 것인가. 올 한해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금각사가 아니라, 오욕칠정으로 뒤범벅이 된 삶이라는 피고름이다. 따라서 삶이란, 심신이 와해할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일 뿐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죽일 가능성에 맞서는 투쟁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남은 만국의 생존자들이여, 단결하라.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될 때, 더 이상 행동하지 않아도 될 때, 마침내 오늘의 눈을 다 치웠을 때, 정신적 삶의 순간이 온다. 상상이라는 이름의 고요한 시간이 온다. 이 상상은 비(非)권력자의 것이다. 권력자들이 현실에서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성대한 행사를 개최할 때, 소소한 개인들은 마음속에서 상상의 건축물을 세우고 상상의 축제를 개최한다. 그렇게 상상된 삶이야말로 지성을 가진 생물에게 어울리는 삶이다. “사는 것은 살아지는 것에 불과하다. 무엇에 관해 말하는 것이야말로 창조하는 것이다.”(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세계는 권력자 것일지 몰라도, 삶만큼은 상상하며 읽고, 상상하며 쓰고, 상상하며 말하는 개인들의 것이다. 올 한해도 상처 입은 삶을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 볼 그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삶이 삶을 바라보는 시간, 그 시간이 삶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