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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머무르고 싶은 곳’ 고창에서 만난 싱그러운 개울가 큰 숲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2. 11. 16:58

[나무편지]

‘머무르고 싶은 곳’ 고창에서 만난 싱그러운 개울가 큰 숲

  ★ 1,209번째 《나무편지》 ★

  

사람 좋아하는 데에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듯이, 마을을 좋아하는 데에도 굳이 내세울 이유가 따로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올 한햇동안에도 꽤 많은 마을을 돌아다녔는데요. 그 중에 유난히 정이 드는 마을이 있어서 꺼낸 말입니다. 전라북도 고창군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딱히 고창군을 좋아하는 단 하나의 이유를 내세울 수 없다 하더라도 따지고 들자면 많은 이유를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어느 하나를 딱 짚어서 이야기하기 어려울 뿐이라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사실 전라북도 고창군은 생태적인 환경에 친근감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여름부터 겨울 초입까지 고창군을 몇 차례 다녀왔습니다. ‘고창읍성’ 바로 앞의 도서관에서 진행한 프로그램 때문이긴 했지만, 갈 때마다 긴장감보다는 편안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나와 고창군에 들어설 때에 만나게 되는 도로변의 소나무 가로수에서부터 그랬습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수식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여러 차례 다녀왔다고는 하지만, 고창군 전체를 돌아본 것도 아니고 고창에 사는 많은 분들을 만나뵈온 것도 아닙니다. 가는 곳만 되풀이해 다녀오고, 같은 분들을 되풀이해 만나기도 했지만, 푸근하고 편안했던 건 한결같았습니다.

  

고창에는 천연기념물 자연유산이 많기도 합니다. 우선 《나무편지》에서도 지난 여름에 소개했던 천년고찰 ‘고창 선운사’에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숲’ ‘고창 삼인리 송악’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이 있고, 그밖에도 여러 건의 자연유산이 즐비합니다. 인구 5만, 면적 6백평방킬로미터를 살짝 넘는 작은 지자체라는 걸 감안하면, 자연유산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의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리는 나무는 앞에 이야기한 천연기념물에 드는 자연유산이 아닌, 전라북도 지방기념물로 2002년에 지정한 〈고창 하고리 왕버들 숲〉입니다.

  

정겨운 고장 ‘고창군’에서 만난 나무는 적지 않습니다만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우선 천연기념물은 아니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청량한 숲을 먼저 소개하렵니다. 이 숲의 문화재 명칭은 〈고창 하고리 왕버들나무 숲〉입니다만, 문화재 명칭과 달리 〈고창 하고리 왕버들 숲〉이라고 쓴 건, 문화재 명칭보다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추천명을 따르려 해서입니다. 흔히 ‘왕버들나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국가표준식물목록의 표기법에 따르면 그냥 ‘왕버들 Salix chaenomeloides Kimura’로 표기해야 합니다. 문화재 명칭은 한번 정하면 고치기가 쉽지 않아서, 여전히 ‘왕버들나무 숲’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이건 올바른 명칭이 아닙니다.

  

〈고창 하고리 왕버들 숲〉은 전라남도 장성군에 맞닿은 고창군의 남쪽 성송면의 작은 마을인 하고리 개울가에 늘어선 큰 나무들이 이룬 숲을 가리킵니다. 이 숲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왕버들이 줄지어 선 사이에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벚나무 등 12종류의 나무들이 우거져 있습니다. 꽤 길게 늘어선 이 나무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무성하게 나뭇가지를 펼치며 작은 개울의 운치를 깊이있게 해 줍니다. 모두 합하면 대략 90그루가 넘는 규모의 큰 숲입니다. 흔히 숲이라고 하면 깊은 산 속을 먼저 떠올리시겠지만, 이 숲은 너른 들판 가장자리의 개울가에 이어져 있기에 청량감이 배가합니다.

 

  이 숲에서 큰 나무는 나무높이가 8m에 이를 정도로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왕버들이 그렇듯이 높이보다는 나무 줄기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풍진이 더 신비롭고 흥미롭습니다. 어떤 왕버들은 줄기를 아예 수평으로 뻗으며 개울 건너편으로 나뭇가지를 펼쳐냈고, 어떤 왕버들은 꿈틀거리는 줄기를 수직으로 곧추 세우며 하늘 위로 솟아오르기도 했습니다. 촘촘히 이어지는 왕버들 사이에 자리잡은 팽나무는 미끈한 줄기를 유난스레 돋보이도록 드러냈습니다. 왕버들과 함께여서인지, 줄기 위쪽의 나뭇가지는 왕버들을 닮은 듯 비틀거리고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넓게 펼쳤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개울가에 왕버들을 많이 심어 키웠습니다. 왕버들이 물을 좋아해서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개울 가장자리를 잘 지키며 큰 비가 내렸을 때에 개울의 둑을 지키게 할 뿐 아니라, 홍수를 막아 주는 역할까지도 맡긴 겁니다. 게다가 이 마을에는 개울가에 왕버들을 심은 남다른 이야기도 전합니다. 마을 앞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한 척의 배 모양으로 보인다는 건데요. 그 배를 단단히 매어 두지 않으면 큰 비가 내렸을 때에 마을이 떠내려갈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배 모양의 마을을 단단히 묶어둘 말뚝을 상징하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마을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마을 말뚝’ 구실을 한 나무들이라는 뜻에서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베어내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친다고 믿어왔다고 합니다. 〈고창 하고리 왕버들 숲〉의 나무들은 대략 200년에서 300년 쯤 된 나무들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대책을 세우고 지켜온 것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90여 그루의 큰 나무들은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저절로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게 됐습니다. 이 숲은 지난 2014년에 생명의숲, 유한킴벌리와 산림청이 주최하는 ‘제15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한 아름다운 숲입니다.

 

 몇 차례의 고창 행보에서 여러 나무를 만났습니다. 하나같이 우리 《나무편지》에 소개하고 싶은 나무들입니다만, 오늘은 먼저 전라북도 지방기념물인 〈고창 하고리 왕버들 숲〉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다음 《나무편지》에서도 고창군을 대표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큰 나무를 이어서 소개하겠습니다.

  이곳저곳 떠돌다보면 자연스레 ‘좋아하는 곳’이 생기게 마련이겠지요. 그 중에는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이 있는가 하면, ‘그냥 머물러 살고 싶은 곳’도 있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도시, 부천시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머무르고 싶은 곳’이라는 생각에 변함없습니다만, 고창군을 ‘좋아하는 고장’ 목록에 첨부할 수 있어 행복한 겨울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2023년 12월 11일 월요일 아침에 1,209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