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등단’ 않고… 내가 만든 플랫폼서 ‘데뷔’ 합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3-07-25 09:02
- 업데이트 2023-07-25 11:43
■ 출판 새 길 개척하는 작가들
종이책 벗어나 넓은 디지털로
소설가 박상우, 후배작가 위해
웹북 플랫폼 직접 구상해 개설
“지면 한정돼 발표할 기회 적어
좋은글 소개할 곳 만들어냈죠”
“우린 등단 안 해도 잘 쓴다”
소설가 이우와 젊은 작가들
새 동인지 ‘문학서울’ 만들어
“등단 시스템, 일종의 세례같아
예술가들이 주체 돼 이끌어야”
더 이상 ‘등단’이 문학을 시작하는 유일한 길이 아닌지 오래다. 크라우드 펀딩과 자비출판으로 시작했다가 정식출판을 거쳐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이 같은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진 시대, 60대 소설가 박상우와 30대 작가 이우가 직접 작가들을 위한 ‘데뷔 플랫폼’을 만들었다. 기업과 자본이 아니라 작가들이 주체적으로 발표 공간이 부족한 작가들을 위해 직접 ‘길’을 내겠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종이책이 익숙한 60대 박상우 작가는 종이책이 아닌 웹북 플랫폼을, 디지털이 자연스러운 30대 이우 작가는 직접 1인 출판사를 차리고 기존의 소설 동인지 방식을 택했다.
◇“종이에 설계도 그려 만든 웹북 플랫폼, 작가 위한 공간”
‘나’는 일간지 신춘문예 등단을 꿈꾸는 작가 지망생이다. S급 문예지 등단 작가인 사부에게 “아니, 형, 문장 노동자 노릇해서 등단하면 뭐해요. 독자도 없는데. 이제 빠르고 쉬운 글을 써야 해요”라고 대들고 싸우다 그와 척을 지고, 당분간 다른 사부님을 모시기로 한다. 새 스승은 월수입 7000만 원 이상의 장르 소설계 1위 작가. 그가 쓴 웹소설의 제목은 “내가 존나 센데 너희가 어디 감히 깝침? 마왕이건 드래곤이건 내 밑으로 다 집합!”이다. “전두엽이 아릴 정도”의 제목과 “미치다 못해 돌아버린” 내용이다. 새 스승의 기상천외한 가르침에 ‘나’는 ‘이게 맞나’ 싶으면서도 스승이 보여주는 통장 잔액에 이같이 외친다. “사부님! 얼른 진도 나가죠!”
허성환 작가의 단편 ‘전두엽 브레이커’의 내용이다. 작품 전체에 가득한 유머로 한국 문학계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진정한 문학의 의미를 묻는다.
이 작품은 최근 출간된 소설집 ‘전두엽 브레이커’에 실렸다. 웹북 플랫폼 ‘스토리코스모스’에서 나온 첫 번째 소설집이다. 허 작가를 비롯해 고요한, 권제훈, 김솔, 김은우, 도수영, 도재경, 박유경, 이상욱, 정무늬 작가가 쓴 단편 소설들이 담겼다.
‘스토리코스모스’는 소설·시·에세이 등 문학 작품들을 웹으로 볼 수 있는 플랫폼으로, 199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박상우 작가가 지난해 직접 만들었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종이책 중심인 한국 문학계가 답답했다는 박 작가는 “약 10년 전부터 웹북 플랫폼을 생각해오다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구상하고 설계했다”고 했다. 그는 “코딩을 못 하니 시스템 설계도를 직접 종이에 그렸다. A4 용지 40∼50장 분량이 나오더라”며 “그것을 들고 웹사이트 제작사를 찾아다녔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박 작가가 웹북 플랫폼을 만든 것은 후배 작가들을 위해서였다. 그는 “좋은 작품을 써놓고도 한정된 지면 때문에 발표 기회를 얻지 못하는 작가가 많다”며 “작품만 좋다면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작가는 “웹북 판매가격의 50%가 바로 작가에게 간다. 원천 창작자인 작가들이 경제적 보상을 많이 받길 바란다. 웹북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때도 작가가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스토리코스모스’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례’ 없어도 돼요…작가들이 주체로 이끌어가야”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된 새로운 동인지 ‘문학서울’이 최근 선을 보였다. 소설가 이우(35)가 주축으로, 류광호(42)·이수현(28)·주얼(40)·신세연(39)·임발(47)·양유진(29) 작가가 함께한다. 이들 중 이수현 작가는 2020년 충북 작가 신인상 소설 부문에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다른 멤버들은 정식 등단을 하지 않았다. 이우 작가는 “현재의 등단 시스템을 존중한다”면서도 “일종의 ‘세례’라고 생각한다. ‘세례’를 받지 않아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팬층을 쌓아오며 인정받는 분들과 뜻을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적 울림은 기업과 자본이 주체가 아니라 예술가들이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모토 아래 작가들의 연대를 강조한 동인 모임이 ‘문학서울’”이라며 “동인 작가들과 함께 이 시대의 현상과 문제점, 이를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시각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창간호 ‘문학서울 2023’은 이들이 지향하는 바를 5편의 단편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이수현 작가의 ‘미로’는 어느 택배 기사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내며 삶의 의미를 묻고, 신세연의 ‘아홉수’는 세상으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세월의 풍파를 홀로 견뎌낸 29세의 한 여성이 자신의 아홉수 생일을 기념하며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우 작가는 첫 장편 소설 ‘레지스탕스’에 이어 최근 ‘서울 이데아’를 통해 주목받고 있는 신예 작가. 한국 젊은이들의 이야기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을 풀어낸다. 첫 소설 출간을 앞두고 당시 한 출판사의 편집자가 “제목을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며 “20대 여성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사랑 이야기를 더 많이 써달라”고 한 말을 듣고 자신이 직접 1인 출판사 ‘몽상가들’을 차려 운영 중이다.
그는 “화가 등 다른 예술 단체들에 비해 작가들 간 연대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했다”며 동인 모임 결성의 배경을 설명했다. “한 분 한 분 제가 직접 연락해 모셨다”는 그는 “함께 연대해 한국 문학에 의미 있는 울림과 족적을 남기자는 포부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이 작가는 이어 ‘문학서울’을 “세상의 각 분야에서 오랜 시간 동안 쌓아 올려진 모든 권위에 내민 도전장”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아직 우리의 움직임은 미약하지만 야망을 품고 계속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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