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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2. 28. 15:33

연기경력 합산 220년...신구·박근형·박정자·김학철의 '고도를 기다리며'

중앙일보

입력 2023.12.27 14:12

업데이트 2023.12.27 14:2

 "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고고 역의 배우 신구(왼쪽)와 디디 역의 박근형은 이번 연극 무대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사진 파크컴퍼니

실체 없는 인물 '고도'(Godot)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방랑자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 이처럼 맥락을 알 수 없는 둘의 대화가 극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별다른 줄거리 없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메시지만 반복한다. 앙상한 가지의 나무 한 그루와 바위 하나만 있는 황량한 어느 시골 길을 배경으로 두 방랑자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극은 시작된다.

이들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의미 없는 행동을 계속하며 고도를 기다린다. 배고프다며 "당근을 달라"는 고고에게 디디는 순무를 건네고, 심심하니 "서로 욕지거리나 하자"며 싸우다가도 금방 화해한다. 바지 끈으로 나무에 목매달아 죽어야겠다고 실컷 얘기하고는 바지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사진 파크컴퍼니

기다림이 계속돼도 고도는 해가 저물 때까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한 소년이 관객석을 가로질러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고도씨는 오늘은 못 오시고 내일 꼭 오신대요." 절망에 빠진 그들이 소년에게 손을 뻗지만, 소년은 홀연히 사라진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끝없는 기다림 속에 드러나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을 담은 이야기다. 관객은 고고와 디디의 만담 같은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삶의 허무함을 털어놓을 땐 이내 숙연해진다. "웃고 있는데 슬퍼진다" "기다림과 갈망 끝에 오는 좌절이 쓸쓸하다" 등의 관객 평이 쏟아지는 이유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사진 파크컴퍼니

대체 고도는 무엇일까. 그들은 왜 이토록 애타게 고도를 기다릴까. 1953년 프랑스 파리 초연 이후 '자유' '희망' '구원' '죽음' 등 전 세계에서 다양한 해석으로 공연되고 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찾지 못했다. 원작자 베케트도 "나조차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으니 말이다. 국내에서는 1969년 극단 산울림에서 임영웅 연출이 초연한 뒤 50년 동안 1500회 이상 무대에 올랐다. 누적 관객 수만 22만 명에 달한다.

이번 연극의 연출을 맡은 오경택 연출가는 "두 사람은 끊임없이 얘기와 행위를 지속하다가 가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침묵한다"며 "침묵은 인식이 이뤄지는 순간이며, 인식이 이뤄지는 순간 그들은 고통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도는 어제도 오지 않았고 오늘도 오지 않고 내일도 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그들은 침묵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맥락 없고 의미 없는 말과 행위를 다시 하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배우 박정자(가운데)는 8분 간의 독백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파크컴퍼니

이 난해하고 실험적인 부조리극에 몰입하게 하는 힘은 원로 배우들의 연기에서 나온다. 62년 차 배우 신구(87), 61년 차 배우 박근형(83)이 각각 고고와 디디 역을 맡으며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최고령인 신구는 지난해 급성 심부전증 진단을 받아 심장박동기를 착용한 상태지만 무대에서 큰 소리로 빠른 호흡의 대사를 쏟아내며 '맨발 투혼'까지 펼친다.

박근형은 8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150분 공연 내내 지친 기색 없이 공연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엄청난 에너지를 보여준다. 특히 2막에서 그의 우스꽝스러운 춤사위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기존의 중후한 신사 이미지를 벗고 몸을 사리지 않는 코믹 연기를 선보인다.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신구와 박근형의 연기 궁합은 둘이 연극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 게 이번이 처음이란 사실을 무색케 한다.

짐꾼 럭키 역의 박정자(81)와 럭키의 주인 포조 역의 김학철(64)도 잠깐 등장하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국내 무대에서 여성 배우로는 처음 럭키로 캐스팅된 박정자는 아무 말 없이 표정과 움직임 만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그러다 "생각하라"는 포조의 지시에 따라 8분 동안 독백을 쏟아내는 장면에선 객석을 압도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고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년 역은 신인 배우 김리안(26)이 맡았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포조 역을 맡은 배우 김학철. 사진 파크컴퍼니

연기 경력 합산 220여 년에 달하는 원로 배우들의 열연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연기 내공이 느껴진다" "긴밀하게 짜인 조화가 극에 집중하게 만든다" 등의 호평이 이어졌다. 배우들은 2개월 동안 캐스팅 변경 없이 모든 회차에 출연한다. 공연은 내년 2월 18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