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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17년 만에 한국 언론과 단독 인터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1. 2. 13:16

하루키 “어떤 시대에도 읽는 이들은 있어…종이책 죽음? 난 그들을 믿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17년 만에 한국 언론과 단독 인터뷰

입력 2023.11.01. 03:13업데이트 2023.11.01. 11:19
 
 
 
 
무라카미 하루키는 신작에서 다림질을 하고, 육수를 만들며, 복근 운동을 하는 반복적 일과를 꾸준히 수행하는 독신남을 그려낸다. 주인공을 금욕적인 인물로 설정한 이유를 묻자 하루키는 “그런 삶이 특별히 금욕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이 사람으로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했다. /ⓒK.Kurigami

 

“저는 이제 70대 중반이라 예전처럼 열심히 뛰진 않습니다. 그저 매일 즐겁게 달리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계속 달리는 것은 제게 변함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머리와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도와가며 기능한다는 것이 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74)는 “한국 사회의 달리기 열풍에 큰 기여를 했는데 요즘도 여전히 달리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글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평소 철학이 묻어나는 대답이다.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문학동네) 출간을 계기로 최근 하루키와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2006년 도쿄에서 본지와 인터뷰한 이래 한국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는 17년 만이다.

 

◇“작품 히트 비결? 44년에 걸쳐 쌓아온 ‘신뢰’ 덕분”

 

출간 전부터 일본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한국에서도 예약 판매만으로도 종합 1위에 올랐다. ‘1Q84′(2009),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 출간 때도 비슷한 신드롬이 있었다. 쓰는 작품마다 화제가 되는 비결을 묻자 하루키는 말했다. “비결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44년에 걸쳐 열심히 소설을 써왔고, 그사이 독자들의 신뢰를 얻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작품마다 조금씩 신뢰를 축적해 온 것이죠. 물론 두말할 것 없이, 오랜 세월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10대 때 첫사랑을 잊지 못한 중년 남성이 그리움을 좇아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 있는 도시를 넘나드는 내용. 1980년 잡지 ‘문학계’에 발표한 중편을 개작했다. 40년간 이 주제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 하루키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작품을 보다 완전한 형태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라면서 “보다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이번 작품을 고쳐 쓰면서 스스로가 과거에 비해 변했다고 느꼈느냐는 질문에는 “나이와 경험을 쌓으면서 기술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는 작가로서 당연한 일이다”라며 다음처럼 덧붙였다. “그리고 소설가로서 책임감 같은 것을 보다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책임감이기도 하고, 동시에 사회적인(도의적인) 책임감이기도 합니다.”

◇“작가의 책무이기보다 한 시민으로서 역사 인식 가져야”

 

수년째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로 꼽히고 있다. 일본에서 1000만부, 국내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100만부 넘게 판매된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1987)의 그림자가 워낙 짙어 청춘의 고뇌 같은 사적인 세계만 천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꾸준히 발언해 온 작가다. 2015년 4월 교도통신 인터뷰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해 피해자가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 사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2019년 ‘문예춘추’ 6월호에 기고한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에서는 중일전쟁 때 징병돼 중국인 포로를 처형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던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루키는 “’역사의식’을 가지거나 일깨우는 것이 작가의 책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인간으로서, 한 시민으로서 역사적 인식을 갖는 것은, 그리고 그것에 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그 인식이 내 작품의 디테일에 반영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2009년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는 “높고 단단한 벽에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알의 편에 서겠다”고 말해 직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비판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이번 신작에서도 도시를 둘러싼 ‘벽’은 중요한 테마이지만 하루키는 ‘벽’의 의미를 묻자 “그건 작가가 아니라 독자 개개인이 느끼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저는 그저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뿐입니다. 이 이야기가 그리는 것은, 높은 벽 안쪽에 사는 사람들과 벽 바깥쪽에 사는 사람들의 대비와 그 사이를 오가는 모습입니다. 거기서 각각의 독자가 어떤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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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발표한 글, 웬만하면 다시 읽지 않는다”

 

작품을 넘어 ‘스타일’이 된 지 오래다. 달리기, 맥주, 재즈를 즐기면서 유럽 등지로 훌쩍 떠나 자유롭게 글을 쓰는 가뿐한 태도로 많은 문청(文靑)들의 선망을 받았다. ‘하루키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 ‘쿨한’ 삶의 양태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인간의 어떤 기질과 연관돼 있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답했다. “기질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결과적으로 이런 곳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혹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은 불가사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작품뿐 아니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 등에서도 건실하나 무미건조한 현실 세계와 아스라한 환상 세계를 오가는 인물들을 그려 왔다. 실제의 당신은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가,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견고하지만 꽤 즐거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훌륭한 책도 있고, 아름다운 음악도 있고, 맛있는 블루베리 머핀도 있습니다. 다만 소설을 쓸 때, 조금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날 뿐입니다.”

 

준비 중인 차기작이 있는지 전 세계 팬들의 관심사일 테지만 “차기작에 대해서는 아무 발언도 하지 않는 것이 일관된 규칙이다. 징크스라고 해야 할까…”라며 말을 아꼈다. 지금까지 쓴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을 묻는 질문에도 “특별히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쓴 글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 읽지 않는 편이라서요”라며 얼버무렸다. 일종의 ‘신비주의자’인 셈. 종이책의 죽음이 곧 올 것이라는 출판시장의 어두운 전망에 대해선 부인했다. “어떤 시대에도 일정 수의 사람들은 계속 책을 읽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부동(不動)의 ‘일정 수의 사람들’을 믿고 싶습니다.”

지난 9월 28일 도쿄 와세다대학 오쿠마 기념강당에서 열린 '우게츠 이야기' 낭독회에서 무대에 선 무라카미 하루키. /와세다 대학 국제문학관

 

◇“왜 쓰냐고? 쓰지 않을 수 없으니까!”

 

출퇴근하듯 시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작업하는 ‘회사원형 작가’다. 2004년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소설을 쓸 때는 네 시에 일어나서 대여섯 시간 일합니다. 오후에는 10㎞를 달리거나 1.5㎞ 수영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책을 조금 읽고, 음악을 듣습니다.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지요. 이런 식의 일과를 변함없이 매일매일 지킵니다. (…) 이런 점에서 긴 소설을 쓰는 것은 서바이벌 훈련과 비슷해요. 신체적인 강인함이 예술적인 감수성만큼이나 중요하거든요.”

‘첫사랑의 상실’이라는 모티프는 이번 작품뿐 아니라 전작들에서도 꾸준히 다뤄온 것. 이러한 주제를 특히 아끼는 이유를 묻자 하루키는 “그런 주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노르웨이의 숲’ 발표 당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애(性愛) 장면이 화제가 됐다. 이번 신작에서는 성관계에 공포를 느껴 갑옷 같은 속옷을 입고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당신 소설에서 성(性)이란 무슨 의미인가, 묻자 하루키는 말했다. “섹스가 특별한 총체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개인적인 일이고, 그 의미는 각각 개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고 싶었던 건 그 ‘개별성’ 같은 것입니다.”

 

70대 중반에도 여전히 ‘현역’. 첫사랑만큼이나 빛바래지 않은 ‘소년의 감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이 소설가는 “사람은 의식의 깊은 곳에 인생의 모든 양상을 내포하고 있다. 노인은 그 깊은 곳에 소년다움과 소녀다움을, 소년과 소녀는 그 깊은 곳에 노인다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심층의 수준’까지 내려가는 것이 작가의 중요한 일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쓰는가? 답변은 간결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