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허구와 함께 살아가는 법
입력 2020.06.25 00:15
공화국을 지탱하는 정치적 허구
생각의 공화국 6/25
세상은 악업(惡業)과 고통으로 가득하고, 삶은 종종 불쾌하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이 그랬던가, 삶은 불쾌하므로, 담배를 피워야 견딜 수 있다고. 비흡연자들도 희망이라는 이름의 구름과자가 없으면, 삶을 견디기 어렵다. 흡연자들이 주기적으로 담배 연기를 삼키듯이, 비흡연자들도 간헐적으로 희망이라는 구름을 삼킨다. 스스로 삼킨 희망에 기대어 사람들은 또 하루를 살아간다. 희망이라는 허구가 없었다면 오늘도 또 하루가 갔다는 평범한 우울감을 견디지 못했을지 모른다.
연애 감정은 쉽게 휘발하고, 인간관계는 자칫하면 불쾌해진다.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철없던 시절의 여자친구가 그랬던가, 모든 관계는 불쾌하므로, 사랑을 해야 견딜 수 있다고. 철든 사람들도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구가 없으면,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흡연자들이 주기적으로 담배 연기를 삼키듯이, 사람들은 허겁지겁 “사랑해?”라고 묻고, “사랑해”라고 대답한다. 밀어(蜜語) 속에서나 간신히 존재하는 사랑에 기대어 사람들은 또 하루 더 관계를 지속시킨다. 이번 달 통계청이 발표한 ‘2019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성인 응답자(19~69세) 가운데 ‘외롭다’고 느끼는 비중은 작년에 비해 4.5%포인트 증가했다. 사랑이라는 허구가 없다면, 사람들은 외로운 나머지 그만 돌아버릴지 모른다.
며칠만 청소를 안 해도 집이나 마음이나 모두 먼지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봐도 세상에 자기만큼 억울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세상에 공정함이란 없는 것 같다. 거듭되는 불운에도 불구하고 윤리 감각을 유지하려면, 무엇인가 필요하다.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랬던가, 만약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거라고. 제도권 종교의 신자가 아닌 사람도 때로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현수막을 응시한다. 이번 달 통계청이 발표한 ‘2019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성인 응답자(19~69세) 가운데 ‘아무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비중이 5.4%포인트 증가했다. 신의 시선이라는 “허구”가 없다면, 인간은 결국 타락해버릴지 모른다.
선거가 끝나고 며칠만 지나면,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바닥을 치기 시작한다. 오늘도 권력이 결핍된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걷는다. “너, 나 무시하는 거냐!” 아무도 경청하지 않기에 모두가 확성기를 드는 거리에서, 정치적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그랬던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국민 주권(popular sovereignty)이라는 허구가 있어야 정치적 소외감을 견딜 수 있다. 주권은 흡연과도 같다.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 하고, 살아가는 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관계를 맺는 이상 정치체에 속하지 않을 수 없고, 정치체에 속하는 한, 누군가에게 다스려지지 않을 수 없다. 피치자(被治者)는 늘 다수이고, 치자(治者)는 늘 소수이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상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결국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게 되는 현상은 정말 놀랍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로 놀랍지 않은가. 다수가 소수보다 분명 강할 텐데, 그 강한 다수가 결국 소수의 지배를 받는다. 정치적 허구(political fiction)가 그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왔다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허구가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왕의 명령을 따랐었다.
왕의 목을 베고,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세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권위의 원천이 종묘사직(宗廟社稷)에서 국민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모두가 정말 정치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다. 신이 아니라 국민이 정부를 세웠다는데도, 여전히 다스리는 사람은 소수이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다수이다. 국민이 다스린다기보다는 국민이 뽑은 소수의 대표가 다스린다. 정치체의 규모가 일정 정도 이상이 되면, 이와 같은 대의정치는 불가피하다.
역사가 에드먼드 모르간(Edmund S. Morgan)이 보기에, 주권이 왕에게 있다는 말만큼이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도 허구이다. 국민 주권이라는 허구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통치받는 게 아니라 대리인을 통해 통치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마치 사랑이라는 허구로 인해서 자신의 복종이 타율적이 아니라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한용운은 자율적인 복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 적이 있다.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현대의 대의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민 주권이라는 허구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이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허구가 필요하다. 성욕을 매개로 번식을 거듭하던 존재가 기어이 사랑이라는 픽션을 만들어냈듯이, 비루함으로 가득 찬 세속에서 기어이 신성(神性)을 발명해냈듯이, 허구는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하다. “바꿀 수 없다면 사랑하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삶이 허구를 버릴 수 없다면, 허구와 더불어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허구는 사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거짓말이나 궤변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허구는 삶의 필요가 요청한 믿음의 대상이다. 허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허구를 믿어야 한다.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픽션도 그렇지 않던가. 보고 읽으며 울고 웃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의 진위를 따져 묻기를 그만두고 일단 이야기의 전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이야기의 세계를 “마치 그러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 속을 유영(遊泳)해야 그 허구를 즐길 수 있다. 허구를 믿고 즐기는 것이야말로 허구와 더불어 살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이다.
허구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구를 믿을 수 있다. 미천한 인간의 세계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역설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길을 가다가 어떤 압도적인 귀여움과 마주치면 가끔 인간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잊기도 하는데,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오늘도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국민 주권이라는 것이 결국 허구에 불과하다고 여기면서도, 국민주권설을 믿음으로써 정치 질서를 유지할 힘을 얻는다. 국민주권설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개개인 모두가 치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무질서를 막을 수 있다. 모두가 정말 치자가 되어버린 세계는 무정부 상태이다.
허구와 더불어 사는 또 하나의 방법은 허구를 사실로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국민 각자의 입지는 다르다. 국민주권설은 국민 개개인 모두를 통치자로 만들기 위한 마법이 아니라, 소수의 통치자가 국민 전체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자임하기 위한 허구이다. 에드먼드 모르간이 역설했듯이, 국민 주권이라는 픽션은 다수가 다수를 다스릴 때나, 다수가 소수를 다스릴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려 할 때 필요하다.
따라서 국민의 주권을 운운하는 사람이 곧 국민이 뜻하는 대로 행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현실 정치에서 소수의 통치자는 종종 다수를 희생해가며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고, 그에 맞서는 정치세력은 자신들의 집권을 목표로 현 통치자에게 비판을 시작한다. 자신들이야말로 더 포괄적인 국민을 더 잘 대표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 통치자가 되기를 꿈꾸는 소수라는 점에서는 기존 통치자들과 다를 바 없다.
국민을 앞세운 이러한 정치 게임이 정착된 것은 국민주권설을 헌법의 첫머리에 명시했기 때문이다. 헌법의 첫 부분이야말로 그 사회가 픽션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합의한 것들의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이다. 헌법을 고민한다는 것은 단순히 권력 구조를 고민하는 일일 뿐 아니라, 정치적 픽션을 고민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픽션은 무엇인가. 그 픽션은 어떤 정치적 픽션을 대체한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이 사회의 정치적 픽션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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