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구곡’ 아홉 굽이, 청평사 폭포마다 다산의 이야기 흘러넘치네
[아무튼, 주말]
남양주시와 함께 하는
‘다산 발자취 기행’ ②산수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23년 4월 15일에 다산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버킷리스트’를 실행에 옮긴다. ‘물 위를 떠다니며 살림하는 배’란 뜻의 ‘부가범택(浮家汎宅)’을 타고 당시 ‘산수(汕水)’라 부르던 북한강을 거슬러 강원도 춘천 여행길에 나선 것. 계기는 ‘장손인 대림이 장가들려고 가는 길에 작은 배를 마련하여 협곡으로 들어가려 하기에 따라나선 것’이라 했지만, 다산은 20여 년 전 정조 승하 후 귀향한 무렵부터 ‘물 위를 떠다니며 살림하는 배로 수종사와 소내 사이를 왕래하면서 연못에서 고기를 잡고, 석호에서 낚시질하고, 문암의 여울에서 고기를 잡으며 물 위에서 잠을 자고, 마치 물결에 떠다니는 오리들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때때로 짧은 시를 지어 기구한 정회를 읊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힌 바 있다.
다산은 말하자면 버킷리스트를 위해 커다란 배를 집처럼 꾸미고 직접 ‘산수록재(山水綠齋)’란 편액을 써 걸고, 아들 학연의 배 기둥엔 ‘부가범택’ ‘수숙풍찬(水宿風餐·물 위에서 자고 바람을 먹는다)’이라 쓴다. 그리고 드디어 산수를 따라 춘천 여행길에 오른다.
다산의 고향 마을을 휘감아 도는 한강 ‘열수(洌水)’는 다산의 희로애락이 흐르는 물길이었다면, 북한강인 산수는 다산이 소망하던 버킷리스트를 실행한 물길이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본향 남양주시와 함께하는 ‘다산 발자취 기행’ 두 번째 이야기는 ‘산수(汕水) 따라간 춘천, 그리고 화천 여행’이다.
◇다산의 ‘산행일기’를 들춰보다
차에 캠핑 장비를 싣고 숙식하는 ‘차박(車泊)’의 수상 버전. 이 정도면 ‘선박(船泊)’ ‘배박’쯤 되시겠다. 4월 15일 춘천을 향해 떠나는 다산의 배에는 천막과 침구, 밥솥, 약탕관과 차를 우리는 다관을 비롯해 필기구, 서적 등이 실렸다. 여행 전 차량 점검은 필수. 다산 역시 떠나기 전 가장 먼저 고향 마을인 남양주 마재마을(능내리) 부근 남자주(족자도)에서 노와 닻줄을 점검한 다음 노를 저어 강을 거스르기 시작한다.
첫째 날은 호후판, 지금의 가평군 설악면 청평호 인근인 호명산 부근에서 1박을 한다. 당시 춘천 여행기를 일기 형식으로 적은 ‘산행일기(汕行日記)’엔 “주인집 노파가 낮에 화전에 불을 놓다 발을 다쳐 밤새 앓았는데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적었다. 여행 이틀째엔 “아들 학연이 몸이 좋지 않아 늦게 길을 나서는” 변수가 생긴다. 그래도 그날 밤 “(자라섬 경강교 부근인) 안반촌에서 묵었는데 집이 몹시 깨끗하고 정갈했다”는 후기를 남긴다. 춘천 소양나루에 닿은 건 남자주에서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날. 다산은 무사히 도착한 소회를 시 ‘소양 나루에서 두보의 수회도 시에 화답하다’로 대신한다. “도읍에 가까워지니 풍경이 점차 넓게 트여 험난한 곳이 없구나. 강 둘레에 누각 성대하고, 산이 머니 평평한 들 넓어라.”
◇‘소양정’에 오르다
남양주 마재마을에서 시작해 춘천에 이르는 ‘다산길’을 도보 답사 후 2017년 ‘정약용, 길을 떠나다 1’을 펴낸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은 “소양강은 다산 발자취 기행에서 춘천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소양강부터 청평사, 곡운구곡 등을 둘러보길 추천했다.
‘산행일기’ 속 춘천에 도착한 다산은 소양정(昭陽亭) 부근 소양 나루에 배를 댄다. 그곳에 올라 옛사람들이 춘천을 노래한 시들을 다시 읊기도 하고 소양정 아래에 배를 띄우고 맑은 물 위를 떠다니기도 했다.
소양정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말 문인 운곡 원천석의 시에 등장하기에 그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추정한다. 1647년 춘천 부사 엄황이 정자를 수리하며 ‘소양정’이라 했다. 원래 소양강 변 가까이 있었으나 홍수로 유실돼 다시 지었다가 6·25 때 소실됐다. 현재 소양강변길 ‘소양1교’ 부근 봉의산 자락에 자리한 소양정은 1966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 형태로 새로 지은 것이다.
‘소양로 비석군’ 뒤쪽으로 난 언덕을 계단 따라 160m쯤 걸어 올라가면 숨이 찰 무렵 소양정이 눈에 들어온다. 오르는 길엔 춘천의 절기(節妓) ‘전계심 묘비’와 전망대가 볼거리다. 소양강의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하기도 좋다. 봉의산을 병풍처럼 두른 정자에 오르면 가까운 듯 먼발치에 ‘소양강 스카이워크’가 눈에 들어온다. 김시습의 ‘소양정에 올라’, 다산의 ‘소양정회고’를 비롯해 숱한 시인 묵객이 소양강과 소양정을 찾아 남긴 글들이 정자를 두르고 있다. 강윤미 남양주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정자는 풍류의 산실처럼 여겨지지만, 다산이 첫 춘천 여행 때 소양정을 두고 쓴 소양정회고는 춘천의 피폐함에 안타까워하면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시로 풀어써 풍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했다. 시의 씁쓸한 정서가 무색하게 해가 지면 춘천대교 경관 조명과 소양2교의 미디어아트가 소양강을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인다. 20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춘천의 야경 명소로 더 유명한 곳이 됐다.
◇‘곡운구곡’과 만나다
이제 내려와 ‘곡운구곡(谷雲九曲)’을 만날 차례. 다산은 여행 8일째인 4월 22일에 노새 등을 이용해 춘천과 가까운 화천을 답사한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 김수증의 호를 딴 ‘곡운서원’을 둘러보고 김시습·송시열 등의 초상화와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첩’(1682)도 접한다. 내친김에 화천 골짜기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은둔 선비로 산 김수증의 자취를 찾아 ‘곡운구곡’까지 간다.
소양정에서 차로 40여 분 거리, 춘천의 북쪽인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와 삼일리에 걸쳐 7㎞ 남짓 펼쳐지는 곡운구곡은 북한강의 지류 하천이자 감입곡류 하천인 지촌천의 구간이다. 김수증이 은거하며 물줄기의 절경 9곳을 찾아내 곡운구곡이라 이름을 붙인 데서 시작됐다. 구곡은 말 그대로 산속 계곡의 아홉 굽이 노래. 중국의 주자가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해 학문을 닦으면서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노래한 것을 본떠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도 구곡 문화가 유행했다. 당시 우리나라 구곡 6개소 중에서 현재 실경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과 화천의 곡운구곡 정도다. 곡운구곡은 오랫동안 군사 지역에 속해 화양구곡에 비해 유명세는 덜하나 다산의 발자취를 논할 때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꽃이 만발한 계절을 뜻하는 1곡 ‘방화계’부터 물이 옥색 같다고 이름 붙인 2곡 ‘청옥협’, 신녀(神女)의 협곡으로 명명된 3곡 ‘신녀협’, 흰 구름 같은 못이라는 4곡 ‘백운담’,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지닌 5곡 ‘명옥뢰’, 층층이 쌓인 바위 9곡 ‘첩석대’ 등 9개의 명소를 품고 있다. 다산은 물길을 따라 답사하며 ‘설벽와’ ‘망단기’ ‘벽의만’ ‘신녀회’ 등 자신만의 시각으로 명소를 발굴해 구곡을 새로 정하고 시를 짓는다.
그중 다산이 ‘신녀회’라 명명한 곡운의 3곡 ‘신녀협’이 볼 만하다. 군사 지역에 포함돼 일부 구간만 개방해 놓은 곡운구곡 중 출렁다리와 용담산 등산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책로가 있어 많은 탐방객이 찾는 곳이다. 2006년에 지은 누대 ‘청은대’ 아래 길을 따라 계곡 진입이 가능하다. 다산의 ‘산행일기’ 속 표현을 빌리자면 “상·하 두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중략) 우레 소리가 나고 눈처럼 흰 물결이 용솟음치며 돌 색깔 또한 빛나 반들반들하다. 과연 절묘한 구경거리”다. 협곡을 빠져나가는 옥빛 물소리에 귀가 얼얼해질 정도다. 국가지질공원의 일부로 ‘포트홀’도 관찰할 수 있다. 김광남(69) 관리사무소장은 “비 온 뒤 수량이 풍부할 때는 그야말로 장관”이라며 “물살이 세 물놀이는 할 수 없지만, 물이 적당할 땐 얕은 곳에 발을 담그고 쉬어갈 수 있다”고 했다. 9곡과 가까워지면 급류가 흐르는 계곡보다는 수심이 완만한 하천 형태를 이룬다. 주변으로 펜션이나 캠핑장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곡운구곡을 만나는 여행을 이어가려면 춘천 시내 ‘국립춘천박물관’으로 갈 일이다. 전시실에선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첩’ 원본을, 박물관 중앙 홀 열린 공간인 ‘실감 영상 카페’에선 곡운구곡과 총석정 등을 실감 콘텐츠로 만나볼 수 있는 ‘지금 여기, 休: 한국인의 이상향’ 전시가 기다린다. 영상이 나오면 계단까지 영상이 펼쳐져 곡운구곡의 폭포수가 쏟아지고, 발아래로 구곡의 사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청평사 속 이자현 발자취를 찾다
다산은 앞서 1820년 조카 혼례를 위해 춘천에 다녀가면서 청평사에 들른 것을 ‘천우기행권’에 기록했다. 권혁진 소장은 “다산이 청평사 오르는 길에 만나 시로 풀어낸 ‘경운대 폭포’ ‘구송정 폭포’ ‘와룡담 폭포’ 등을 추측하며 찾아보는 것도 여행의 재미”라고 했다. 여러 문헌을 근거로 “청평사 매표소 위부터 휴게소 아래를 아우른 곳이 다산이 노래한 경운대 폭포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경운대 폭포를 지나면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가 우뚝 솟아나 있다. 다시 쉴 새 없이 흐르는 계곡을 곁에 두고 따라 올라가면 너럭바위가 나오는데 아홉 그루 소나무(九松)가 있다고 해 ‘구송 폭포’라 불리는 폭포 앞에 서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주차장에서 20여 분 경사진 길을 오르는 내내 시원한 물소리에 고단함을 잊는다.
다산이 청평사를 찾은 궁극의 이유는 ‘청평거사’로 불리며 청평산과 청평사를 알린 고려 때 문신 이자현의 발자취를 찾기 위함이었다. 청평사 일대엔 ‘진락공 이자현 승탑’ 등 이자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용봉을 비추는 잔잔한 이자현의 연못 ‘영지’는 김시습 등 후대 문인들의 글 속 배경이 되기도 했다.
다산의 춘천 여행은 단순히 조카나 장손 혼례를 겸한 유유자적 뱃놀이가 아니었다. “‘산행일기’에 따르면, 다산은 예로부터 물자 수송의 중심지였던 북한강 물줄기의 근원도 살펴보고자 했고 다산에게는 여행이 학문이기도 했다”는 게 강 학예연구사의 설명. 2016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펴낸 ‘정약용의 해배 이후 학문과 춘천 여행’에서도 “두 번의 춘천 여행은 지리·역사학의 방법을 재확인하고, 만년의 학문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한 의미 있는 답사였다”고 평하고 있다. 다산은 두 번의 춘천행 후 ‘천우기행권’ ‘산행일기’ ‘산수심원기’ 등에 자세히 기록하고 훗날 역사지리서이자 역작 중 하나로 꼽히는 ‘아방강역고’를 완성한다. 그의 여행은 그렇게 역사가 됐다.
[ 북한강 곁에 두고 46번 국도따라 ‘다산 뱃길 코스’ 달려볼까? ]
‘다산의 북한강 여행’ 깨알 팁
“다산이 북한강 여행을 떠나기 전 조선 중기 김시습도 북한강 뱃길로 관동팔경 유람을 떠났죠. 조선 후기 평해로(평해길)가 발달하기 전까지 북한강, 즉 산수(汕水)는 유람의 필수 코스이자 통행로였습니다.”
강윤미 남양주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말이다. 북한강을 거슬러 뱃길로 춘천 여행을 한 다산의 코스는 일부 구간이 ‘북한강자전거길’과 겹친다. 북한강자전거길은 운길산역, 대성리역을 지나 청평역까지는 북한강과 가까이 달리다 가평역 근처에서 다시 물길과 만나 백양리, 강촌역, 의암호에 이른다. 차를 이용한다면 고속도로로 시원하게 달릴 수도 있지만 46번 국도, 북한강 건너편 391번 지방도(양평 서종면~화천 사내면) 상당 구간이 북한강을 나란히 두고 있으니 국도 따라 천천히 드라이브하는 것도 좋다. 북한강 물줄기는 춘천에 접어들며 의암호와 만난다. 소양강 스카이워크, 춘천 삼악산 호수 케이블카(의암호 케이블카) 등 의암호에도 즐길 거리가 많다. 다산의 시를 만날 수 있는 소양정과 1km여 거리라 들러볼 만하다.
화천 곡운구곡의 3곡인 신녀협을 제외하고는 각 구역마다 표지석 정도만 세워져 있다. 차를 이용할 경우 신녀협 주차장이 거의 유일하다. 이왕 신녀협을 둘러본다면 곡운구곡 출렁다리를 건너 1km 남짓 산책로를 걸어볼 것. ‘곡운구곡도첩’ 속 신녀협 너머 소나무 숲으로 추정되는 산자락에 오솔길이 나 있다. 계곡물 소리 들으며 걸으면 온 마음의 때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군사 지역에 속해 발길이 덜 탄 덕분에 원시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으나 신녀협 입구 관리사무소를 제외하고 주변에 이렇다 할 휴게소나 편의 시설이 없다. 신녀협에서 그나마 가까운 식당이 차로 10분 거리 용담계곡 부근에 있는 ‘동강막국수’다. 은은한 잣 내음을 풍기는 막국수가 여름엔 별미다.
남양주시 팔당리 남양주시립박물관 2층 전시실과 춘천시 석사동 국립춘천박물관 2층 전시실에선 각각 ‘정약용의 북한강 여행’ ‘북한강 따라간 정약용의 춘천 여행’을 상영한다. 다산의 춘천 여행 기록물인 ‘산행일기’와 ‘천우기행권’ 내용을 바탕으로 각각 애니메이션과 이미지 영상으로 풀어내 비교해 볼 만하다. ‘곡운구곡’ 관련 실감 콘텐츠도 볼 수 있다. 상영관 규모로는 국립춘천박물관이, 몰입도로는 남양주시립박물관이 한 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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