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우연찮게’라 써놓고 ‘우연히’로 읽어라?
“아유 이 사람, 얼마나 마셨는지 문을 못 여는 거 있지? 내가 아주 그냥. … 우리 아들은 지금 ○○○○ 다니잖아. 딸내미는 ○○대 경제학과랑 ○○대 경영학과 냈어.”
쉴 틈 없는 옆자리 두 승객의 대화. 온 식구 나이쯤은 저절로 알게 생겼다. 유난히 한 분 말씀이 끝도 없다. 목소리 크기도 전철 소음(騷音)에 댈 바 아니다. 이분만 좀 조용히 해주면 좋으련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들은 무덤덤해 보인다. 나 혼자만 귀 따가운 건가. 하필 그 자리에 앉은 내가 잘못이지. 어수선하던 머릿속에 전류처럼 한마디가 흐른다. "어제 시내 나갔다가 우연찮게 ○○이를 만난 거야 글쎄."
직업의식이 바로 꿈틀댄다. 말 속에 우연찮은(←우연치 않은←우연하지 않은) 단서가 없다. '우연(偶然)하게' 만났다는 얘기다. 젊은 층 말버릇인 줄 알았더니, 장년(長年)층까지…. 이러니 신문에서도 '우연하게'가 '우연찮게'로 뒤바뀌는 걸까.
'국정조사 특위에서 (중략) 우연찮게 청문회장으로 날아든 카톡 제보가 증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씨가 최순실씨를 알고 있었다는 이 제보(提報), 우연히 들어왔음은 다 알려진 일이다.
본뜻과 반대로 쓰는 말로 자문(諮問)도 더러 눈에 띈다.
'통상 정치인들은 연설문이 국민 눈높이에서 너무 딱딱하게 들리는지, 현실과 맞지 않는 내용이 있는지 주변의 자문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자문은 물을 자, 물을 문, 어떤 일에 관해 전문가나 전문 기관에 의견을 구하는(묻는) 일을 말한다. 여기서는 정치인이 묻는다는 뜻이니 '주변에 자문하는'이 바른 쓰임새다. 어려운 한자어 대신 그냥 '주변에 묻는' 해도 좋겠다. '자문을 받는' 쪽은 주변 사람이다. 그 주변 사람이 주체가 되면 '자문에 응한다' 해도 된다.
접수(接受)도 빼놓을 수 없다.
'애플이 결함 있는 일부 아이폰6s의 배터리를 무상 교체해주는 과정에서 (중략) 애프터서비스 센터에선 고객 5명 중 4명이 대기 접수만 하고 돌아갔다.' 신청이나 신고 따위를 받는 일이므로, 접수하는 쪽은 당연히 애플. 고객은 '대기 신청만 하고'나 '대기 접수만 시키고'가 알맞은 표현이다.
지하철 4호선에서 만난 그분, 오늘은 몇 호선을 접수(接收) 중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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