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천명관은 잡초의 작가, ‘고래’는 개망초 노래
<185회>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잡초를 가장 실감 나게 묘사한 소설은 천명관의 장편 ‘나의 삼촌 브루스 리’였다. ‘쇠비름보다 더 악랄한 새끼!’ ‘뽑아내도 뽑아내도 질기게 다시 뿌리를 내리는 쇠비름처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쇠비름은 가지를 많이 치면서 사방으로 퍼져 방석 모양으로 땅을 덮는다. 뽑더라도 그대로 두면 다시 살아날 정도로 끈질기다. 그래서 ‘뽑아내도 뽑아내도 질기게’로는 쇠비름 당할 식물이 없다.
그런데 잡초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적절하게 배치한 그의 소설이 하나 더 있다. 그의 소설 ‘고래’에서는 주인공 춘희가 움직일 때마다 쇠비름보다 흔한 잡초인 개망초가 등장하고 있다. 개망초가 이 작품을 지배하는 이미지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소설 초반 춘희가 출옥해 벽돌공장에 도착하는 장면부터 개망초가 나오고 있다.
<개망초는 성곽을 포위한 병사들처럼 늘 공장 둘레를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다가,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슬그머니 안으로 침입해들어와 어느샌가 공장 전체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중략) 부서져내린 벽돌가마 틈이나 살림집 마루판자, 검은 이끼가 낀 물결무늬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도 개망초는 어김없이 피어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었다.>
개망초는 춘희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닌다. 벽돌공장은 물론 그녀가 오랜 시간을 보낸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었다. 개망초는 춘희가 방화 혐의로 조사를 받을 때 서명란에 그려넣은 꽃이기도 하다. ‘그녀가 기차를 타고 평대에 처음 도착할 때부터 단숨에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후, 개망초는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던 터라 그녀가 조서에 개망초를 그려넣었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개망초가 잡초처럼 사는 춘희와 황폐한 주변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여기에다 천명관이 주로 밑바닥 인생을 다루는 측면까지 감안하면 이 작가를 ‘잡초의 작가’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고래’는 영국 최고 권위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라 있다. 최종 수상작 발표는 23일이다. ‘고래’는 2004년 발표한 작품이다. 평대라는 가상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국밥집 노파의 저주로 시작해 산골 소녀 금복이 거침없이 사랑하고 사업에도 성공한 다음 ‘비눗방울처럼’ 몰락하기까지 과정, 금복의 딸인 춘희가 벽돌을 만들고 이 벽돌이 나중에 국가적인 대극장을 짓는데 쓰이는 과정을 그렸다. 여기에 애꾸눈, 생선장수, 걱정, 칼자국, 쌍둥이자매, 약장수, 수련, 문, 철가면 등 주인공들과 인연을 맺은 다양한 군상들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인 ‘고래’가 금복의 꿈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개망초는 춘희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소설의 줄거리, 내용에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다. 판타지 소설적인 면도 있다고 할 정도다. 예를 들면 금복의 남자 중 한명인 ‘걱정’은 많이 먹고 움직이지 않아 몸무게가 일 톤이 넘는다(인간 몸무게 기네스북 기록이 590㎏이다). 그런데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놓기 어려울 정도로 흡입력이 강하다.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이 이야기들이 치밀하게 연결돼 있고 등장인물들의 욕망에도 ‘그럴 수 있다’고 수긍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은희경은 이 소설이 받은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심사평에서 “소설이란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면서도 “자신과는 소설관이 다른 심사위원의 동의까지 받아냈다는 사실이 작가로서는 힘있는 출발”이라고 축하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기자들이 흔히 듣는 말이 팩트로 꽉 찬 글을 쓰라는 것이다. ‘고래’는 이야기로 꽉 찬 소설이다. 흔히 성석제를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하는데, 성석제는 현실 내에서 과장하고 상상한다면, 천명관은 현실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과장하고 상상하는 것 같다. 입담이 성석제 이상인 것이다.
이 소설을 어떻게 번역했을지도 궁금하다. 읽다보면 판소리 또는 변사가 말하는 식으로, 한 문장이 한 페이지 이상 이어지는 문장도 있다. 이를 온전히 영어로 번역할 수 있을지 또 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비속어, 은어들을 어떻게 처리했을지 궁금하다.
개망초가 이 소설 주요 장면마다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망초·개망초는 사람들이 훼손한 곳, 버려진 곳에 무더기로 자라는 잡초의 대명사라는 점에서 이 소설에 나오는 잡초 같은 인생과 끈질긴 생명력에 잘 어울리는 식물이다.
망초와 개망초 구분은 야생화 공부의 시작이다. 야생화 모임에 가면 “내가 망초와 개망초도 구분하지 못했을 때…”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개망초는 버려진 곳에 피는 잡초지만 꽃의 모양을 제대로 갖춘, 그런대로 예쁜 꽃이다. 하얀 꽃 속에 은은한 향기도 신선하다. 흰 혀꽃에 가운데 대롱꽃 다발이 노란 것이 계란후라이 같아 아이들이 ‘계란꽃’ 또는 ‘계란후라이꽃’이라 부른다.
반면 망초는 꽃이 볼품 없이 피는듯 마는듯 지는 식물이다. 망초라는 이름은 개화기 나라가 망할때 전국에 퍼진 풀이라 붙여진 것이다. 보통 ‘개’자가 들어가면 더 볼품 없다는 뜻인데, 개망초꽃은 망초꽃보다 더 예쁘다. 마침 개망초가 막 피기 시작하는 계절이다(개망초보다 좀 이른 시기에 피는 봄망초도 있다. 봄망초는 혀꽃이 개망초보다 더 많고 가늘어 좀 산만해 보이고 줄기 속이 비어 있어서 살짝만 눌러도 들어가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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