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경우’는 어떤 경우에 쓸까?
몇 해 지난 올 수능(修能)시험. 어느 수험생 도시락에서 울린 휴대전화가 또 사람을 울린다. 딸이나 엄마나, 얼마나 속상했을까. 날벼락을 맞고도 그 재수생은 같은 시험장 수험생들한테 죄송하다는 글을 올렸다. 보기 드물게 경위(涇渭) 바르다. 무경위한 어른이 쌔고 쌘 판에.
한데 이 경위 비슷한 뜻으로 '경우(境遇)'를 올린 사전도 있다. 수상한 것은 '무경위하다' 대신 '무경우하다'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면 경위에서 단모음화(單母音化·여기선 ㅟ→ㅜ)가 일어났는데 다른 한자 境遇에 갖다 붙인 것은 아닐지.
이렇게 아리송한 경우(사리나 도리) 말고, 없으면 좋을 경우(상황이나 형편)가 너무 흔하다.
'고속철 선로 역시 경부선은 최고 시속 305㎞, 호남선의 경우 시속 350㎞까지 달릴 수 있도록 건설돼 있다.'
영어의 'in case of'를 그대로 옮긴 '~의 경우'. 대부분 토씨 '은/는'으로 대신하면 그만이다(→'호남선은'). '호황의 경우 기업 현금 흐름이'는 '호황일 때'로, '3억원 주택이 있는 65세의 경우'는 '65세라면', '서울의 경우 전매 제한 기간을'은 '서울에서는'으로, '강남권 아파트의 경우 계약자는'은 아예 토씨 없이 '아파트 계약자는'으로 문맥 따라 바꿔 보자. 자연스러우면서도 말뜻이 훨씬 또렷이 드러난다.
'졸피뎀은 자주 복용할 경우 중독성이 있는'처럼 '~할(한) 경우'는 '~하면(했다면)'이나 '~할(한) 때'로 대신할 수 있다.
아무러면 죄다 불필요하거나 바꿔 써야 할 경우일까. '수사 중 자살이 어느 유형인지는 사건마다 따져봐야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중략) 책임질 일이 있으면 감당하는 것이 원칙이고….' 딱 들어맞는 경우다. 뭉뚱그리자면, 필요한 경우도 더러 있지만 고쳐 써야 할 경우가 훨씬 많다.
다행히 내년 응시 자격을 잃지 않은 그 재수생. 경우(?)가 밝디밝으니 이미 장원급제(壯元及第)감 아닌가. 죄송한 쪽은 이런 건곤일척(乾坤一擲) 세상 만든 어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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