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 時空을 꿰뚫는 생명의 길을 묻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들어가며
『끝내 붉음에 젖다』는『어쩌자고 꽃』(2018)에 이은 은월 김혜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대체로 우리는 첫 시집을 통해서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관이나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욕구의 징후를 살펴보게 되며, 그 이후 두 번째 시집에서는 그런 징후들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일군의 시인들은 자신의 세계관이나 삶의 지침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길을 걸어가고, 또 다른 시인들은 끊임없이 새로움 – 시법이나 인식-을 추구한다. 이 두 개의 길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일관된 의식으로 그 변화에 맞서는 일도 가치 있는 일이며, 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존재의 의미를 묻는 일 또한 모든 예술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월 김혜숙 시인의『끝내 붉음에 젖다』팔십 편은 우리에게 어떤 행로를 보여주고 있을까? 그 궁금함을 풀기 전에 첫 시집『어쩌자고 꽃』의 인상을 담은 기억을 꺼내어본다.
은월 시는 선이 굵다. 그에게 포획된 시상 詩想은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묵직한 거문고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 둔중한 울림은 또한 이제 막 돋아난 여린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응시하는 새의 몸짓처럼 삶의 희망을 예감하게 한다. 섬세한 필치를 버린 시인의 직설화법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우리가 망설이며 감췄던 침묵의 뇌관을 점화하는 힘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어쩌자고 꽃』표 4
어느 때 보다도 우리는 시대의 조류潮流나 경향傾向에 민감하게 적응하지 않으면 소외되거나 도태될지 모른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상생을 외치지만 경쟁을 피할 수 없고, 자연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쓰레기를 마구 만들어낸다. 공생, 두레의 풍습이 사라짐을 아쉬워하면서도 우선적으로 나의 안위를 복면으로 감추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자화상을 어쩔 수 없다. 이 양면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노자도덕경 5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지푸라기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이 말은 총체로서의 자연은 각자 삶의 가치기준이 없는데 인간은 헛된 분별심- 인의예지와 같은 - 으로 마음을 어지럽힌다는 뜻이다. 그런데『어쩌자고 꽃』의 해설을 쓴 공광규 시인은 은월 김혜숙 시인을 자연주의자로 명명했다. 사회비판이나 삶을 둘러싼 회의懷疑나 고뇌를 저만치 떨쳐두고 산천수목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일컬었으나, 기실 이를 되짚어보면 자연에 대한 탐미는 역설적이게도 아름답지 않은 인간계人間界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과 통한다. 시인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자연계自然界의 풍광은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생명을 거두는 무위無爲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어쩌자고 꽃』으로부터『끝내 붉음에 젖다』에 이르는 시인의 사유는 어떤 길을 보여주는 것일까?
꽃과의 대화
잘 알다시피 서정시抒情詩의 요체는 시인(話者)의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에 있다. 동화同化- 세계의 자아화-와 투사投射- 자아의 세계화-는 주로 의인화擬人化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꽃은 바로 이와 같은 동일화의 주된 제재題材로서 널리 시인들에게 활용되고 있다. 개화와 낙화를 통한 삶의 여러 과정들을 감지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꽃의 모양과 빛깔은 시각적 환희를 맛보게 하기도 한다.『끝내 붉음에 젖다』1부에 실린 여러 꽃에 대한 감상은 이와 같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몇 편의 시에서는 이와 같은 통념을 벗어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노란 생각 꽃」,「방울꽃」,「애기똥풀 꽃」,「천개」들이 바로 그런 시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꽃은 나무나 풀의 생식기관이다. 여러 방식을 택하여 번식의 매커니즘만이 작동되는 것이다. 김헤숙 시인은 그 메커니즘을 “생각나는 것도 없었네 / 그저 무의미”(「노란 생각 꽃」첫 연)로 받아들인다. 이는 꽃의 생태를 쉽게 완상玩賞의 희열을 노래하는 일에 대해 각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과학의 지식으로 보아 생각하지 않는 존재들은 생식 이외의 원초적 본능이외에 생명에 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당연한 사실에 대한 각성은 생명에 대한 또 다른 층위의 국면을 살펴보게 만든다.
뒤집기 하고
기어가기 하고
일어나 앉기 하고
걸음마 하면서
봄기운에 신나
들에서 밭둑과
논둑길에서
한 번씩 귀엽다
엉덩이 두들겨주는 바람에
삐죽삐죽 앙앙앙
울음소리
아가의 노란 응가
- 「애기똥풀 꽃」전문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 들꽃인 애기똥풀 꽃이 피어나는 봄날에 시인은 간난 아기의 모습을 찾아낸다. 영아기의 여리고 작은 아기에게는 오직 엄마의 가슴에 안기고. 다른 양식이 필요하지 않은 오직 모유만이 유일한 기쁨일 것이다. 오욕에 물들지 않은 그러나 태초의 생명의 약동이 배설하는 똥마저도 어여쁜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음을 상기하게 만든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성공적으로 버무려진 시가 아닐 수 없는데 시「방울꽃」또한 이와 같은 새로움을 보여주는 시로 재미있게 읽혀진다.
젖니 하나 둘 셋
하얀 이 사이로
까르르 웃음소리
총총총 계단 밟고
내려 올 아기의
걸음마
곧
손발
오동통통
물 오르는 소리
- 「방울꽃」전문
방울꽃을 본 적이 없어도 ‘아기’의 천진무구한 해맑음과 희로애락을 배제한 무의미한 생명의 거룩함을 선연히 떠오르게 하는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생명에는 귀천이 있을 수 없고 유무용의 가치가 있을 수 없다. 김혜숙 시인이 인식하는 생명의 원형은 위 두 편의 시에 등장하는 ‘갓 태어난 아기’로서 무한증식의 만다라曼陀羅, maṇḍala인 것이다. 모남이 없이 둥근 우주의 본질이 만물에 구유되어 있음을 시 「천개」는 요약해서 표현하고 있다. 부제로 양주나리공원이 붙어 있는 시 「천개」는 ‘눈망울’, ‘바람’, ‘구름’. ‘윤슬’, ‘노래’, ‘나무’, ‘소리’와 같이 이질적인 형상이나 사물을 ‘천 개의 ~’에 병치시키면서 원융圓融의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의 ‘천개’는 ‘만萬’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수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만리가 ‘멀다’ 의미를 과장해서 말하는 것처럼 ‘많음’을 뜻하는 것이다. 많으면서 하나인 만다라는 슬그머니 천개天蓋에 닿는다. 천개天蓋는 불상 佛像의 머리 위에 씌우는 양산과 같은 것으로서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 「천개」에 나열된 ‘눈망울’, ‘바람’, ‘구름’. ‘윤슬’, ‘노래’, ‘나무’, ‘소리’ 등등은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만행卍行의 시
만행卍行은 불가佛家에서 수도승들이 산문山門에서 나와 일정 기간 세상을 주유周遊하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서 해탈이 경전이나 참선뿐만 아니라 범인凡人들과의 교섭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세속의 우리들의 일상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희로애락을 맞이한다. 그 풍경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기도 하고 염세厭世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풍광이 아름다운 곳,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 생전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가는 것 또한 우리에게는 뜻깊은 만행이 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 그 자체가 수행修行인 것이다. 이 시집에서 김혜숙 시인도 외딴 섬과 사찰 등 많은 곳을 다녀오고 그 감상의 시편들을 다수 생산해 내었다. 그런데 시인의 여행 시편 중에서 눈에 띄는 몇몇 시들은 일반적인 감상을 넘어서 삶의 이면을 뒤집어보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 눈길이 간다. 「구리시장에서」,「구리 역」,「구리 섬에 닻을 내리고」,「강변역에서」 등의 시는 시인의 생활권역에서의 만행을 담은 시들이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익명과 복면의 사람들과의 조우이며, 교통사고 등의 각종 재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나는 목적지에 전차가 도착한 순간부터 / 귀소본능에 시달리곤 한다”(「강변역에서」부분) 는 토로는 도시인들에게 잠재한 불안 의식에 닿아 있다. 또한 같은 시에서 “ 젊은 날 출근길마다 / 잘 다녀오길 염려하고 / 무사한 하루로 돌아올 것을 / 염려하셨던 어머니가 생각나” 는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두려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떠날 때는 돌아옴을 염려하고, 항상성恒常性의 일상이 사라진 탓에 “뒤편에 할아버지는 늘 / 조용회 할머니를 지키고 계신” 구리시장 노점의 풍경을 염려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섬’이라 믿는다. ‘섬’은 격절의 변방이면서 동시에 답답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하는 동경의 장소이기에 “그 섬 하나 마음 안에 / 짓고 부둣가에서 / 누구라도 기다려 볼일”(「구리 섬에 닻을 내리고」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석탄 실은 기적소리” (「구리 역」)는 들리지 않고, 돌다리는 사라졌어도 이제는 더 헤매이지 않고 이곳이 삶의 종착역이라는 “사랑이 도착했다”(「구리 역」5연)는 토로는 만행이 거두어들인 소소한 깨달음이다. 그런데 김혜숙 시인의 만행은 이와 같이 익숙한 발길이 닿았던 곳들에서 마주친 감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진경을 보여주고 있어 이채롭다. ‘작천정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시「꽃님 보살」을 살펴본다.
요양원 가는 길목에
꽃 눈물 흘리는데
벚꽃 터널 앞으로
꽃님 보살 나란히 춤사위하며
하늘의 귀한 손님 내렸으니
눈 부릅뜨고 걷거라
어허
꽃님 보살 옆구리에서
벚꽃잎 뿌려가며
쿡쿡 찔러대는 꽃 터널 옆
카페 촌과 고깃집에
희락과 살생 곁에
연신 돈 보따리 꽃 보따리
꽃 보살 복채 들고 신명 나서
꽃 빗자루 털며
천귀사 꽃님 보살 영남 알프스
고개를 설설 설 넘어가네
- 「꽃님 보살」전문
작천정酌川亭은 간월산에서 흘러내린 작괘천변의 정자로서 조선조 세종 때 건립되었다고 알려진다. 계곡을 따라 울산 삼남면으로 내려오면서 벚꽃길이 이어져 있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그러나 예전의 호젓한 풍경은 사라지고 지금은 인파가 끊이지 않는 유원지가 되어버렸다. 시인은 그곳에서 인생의 파노라마를 목격한다. 그곳에는 삶의 마지막 쉼터인 요양원이 있는가 하면, 부질없는 쾌락의 카페와 살생에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식탐을 즐기는 고깃집이 즐비하다. 그런가하면 산허리 어디메쯤에 극락 極樂을 염원하는 천귀사가 있어 ‘꽃님 보살’은 지금 그리로 가고 있는 중이다. 시인(話者)은 삶의 업보를 걸머진 ‘꽃님 보살’의 신명난 모습을 통해 우리네 삶의 아이러니를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이 ‘꽃님 보살’은 때에 맞춰 피었다가 아무 일 없는 듯이 산화하는 벚꽃의 휘날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마음 가닿는다. 바람에 가루처럼 부서져 내리는 벚꽃이 휴식과 안녕을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온몸을 던지는 묵언默言, “고개를 설설 설 넘어”간다고 넌지시 타이른다.
이와 같이 시「꽃님 보살」은 섣부른 비탄이나 회오悔悟를 강요하지 않는 미덕을 보여줌으로써 생명에 대한 각자의 성찰을 요구할 뿐이다. 따지고 보면 유한한 생명을 무한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길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없으므로 그 길을 찾고자 하는 욕구를 꿈으로 회생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헤숙 시인의 시편이 공감을 일으키는 힘은 어떤 사태에 대해 판단중지를 꾀할 때 극대화된다. 시인이 체득한 가치 기준을 버릴 때 우리가 목격하는 시 속의 풍경은 전인미답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시「백령도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가 사상捨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해상 북한과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으며, 그만큼 분단의 아픔이 서린 우리에게는 먼 섬이며,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절경을 이루는 두무진이 있으며, 까나리의 생산지로서 풍부한 어장을 가진 곳이라는 이야기들은 시인의 시선에는 잡히지 않는다. 시인의 앵글은 꼭 백령도에서만 조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물오리와 괭이갈매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오리와 괭이갈매기는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 물오리도 날개가 있으나 그 날개는 “지붕에는 오르기는 하지 / 뛰어내리는 행동”외에는 쓸모가 없으며, 그와 달리 창공을 마음대로 휘젓고 나는 괭이갈매기는 “ 배설물조차 절벽이든 / 나뭇가지든” 자기 맘대로 내지르는 일에 날개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장자 莊子의 우화를 상기하듯 시인은 백령도의 풍광을 이렇게 던져놓을 뿐이다. 다시금 생명, 모든 존재에는 가치의 우열이 없음을 이렇게 표현할 뿐이다.
날 수 있는 것도
날지 못하는 것도 이 세상에 다 같은 존재
백령도의 물오리와 괭이갈매기가 그렇습니다
「백령도에서」 마지막 연
시간에 대한 예의
누구보다도 김혜숙 시인은 시간에 민감한 사람이다. 생활인으로서 그에게 시간은 톱니바퀴가 되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는 밀린 숙제와도 같(았)다. 돌이켜 보면 ‘꽃’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완상玩賞을 넘어서서 아기로 상장되는 순수의 결정체임을 자각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지나고 보면 다 꽃 피는 때”(「존재감」)임을 상기하게 만드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우리의 일생은 봄과 가을은 짧고 여름과 겨울은 긴 사계절을 반복하고 있다. 지루한 생활에 유폐되어 있다고 투덜댈 때, 어김없이 바뀐 계절은 소나기의 죽비가 되어 “저 속에 미움 한 방울 / 격정 한 덩이 씻겨내는”(「늦여름 소낙비」)각성을 선물해 주는 것이다. “유리창 밖 인기척 봄이라기에 ... 파고드는 칼바람에 온몸이 베이”(「꽃샘추위」)는 일이나 “연록이 잔잔히 걸어오고 / 우렁우렁 새 꿈이 오는”(「청명」첫 연)광경을 목격하는 기쁨도 “계절은 앞 서 가는 큰 걸음이고 / 우리는 종종치며 가”(「봄은 오는데 우리는」) 는 시간과의 화해를 건네는 일인 것이다.
밤낮으로 날아와 앉은
가지 끝에 새의 두 다리에도
역사를 쓰고 또 쓰고
이젠 그도 나도 앉았다
무심히 일어날 때마다 뚝뚝
가지 부러지는 소리
무수한 날 천둥과 번개가 잔설 가지에
수시로 잦게 왔다 가고 있는 소리
- 「고목」 전문
고목은 오래된 나무(古木)이며 장차 말라 죽어버릴(枯木)이다. 젊은 날 “바위를 겁 없이 깨며 살아왔”(「먼 길」)다 하더라도 생의 의지를 곧추세우며 부동不動의 평화를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고목이 되어가도 따스한 마음이 간직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왠지 모를 증오가 목구멍까지 차도
오히려 속은 든든히 채워지던
퇴근길 헛헛함과 가난함을
달래주는 것은 아랫목에 밥주발
그 마음의 따뜻한 온도가 있었다
- 「마음의 온도」3연
『끝내 붉음에 젖다』4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회고와 앞으로 다가오는 시간을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는 예의를 갖추고자 하는 숙고熟의 시편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숙고는 속절없이 허무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어설프게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모든 존재를 고목(古木)으로 만들고 이윽고 고목(枯木)으로 산화시키지만 그 과정 속에는 ‘숙성’이라는 놀라운 지혜가 깃들어져 있음을 김혜숙 시인은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숙성되기까지 / 각자의 시간이 있다”(「빵을 구우면서」)는 전언은 생명이 나고 죽는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빵이 되어 서로의 양식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성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빵은 사람이 되기 위해
빵이 빵에게 안부하며 서로 부둥켜
안으면 우리가 지내온 온갖 시간이
도리어 입안에 퍼지는 욕설 같은
생명이 목구멍에서 생명의 폭포수를
빵에 부여한다
빵이 사람이고 빵이 눈물이 아닌가
- 「빵을 구우면서」마지막 연의 부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김혜숙 시인은 철 따라 피는 꽃에서 생멸에 연연하지 않는 순수純粹를 배우고 자신을 둘러싼 굴레 – 사회라 통칭하는 –를 만행하면서 그 순수함이 하늘이 내린 본능에 따라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순수함과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본능이 형이상학적인 시간에 포섭될 때 “빵이 사람이고 빵이 눈물”이라는 거룩한 선물을 기꺼이 받아드는 것이다.
나가며
지금까지『끝내 붉음에 젖다』를 관통하는 시인의 사유를 대략 살펴보았다. 이 글의 앞머리에서 김혜숙 시인의 첫 시집『어쩌자고 꽃』으로부터 시작해서『끝내 붉음에 젖다』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시작법 詩作法 이나 세계관이 여전히 흔들림이 없이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탐구에 이어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로움이 찬양받는 세태속에서도 변함없는 시력視力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에 맞서기보다 능동적으로 시간을 숙성시키고 발효시킴으로서 ‘빵’으로 환유된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혜숙 시인은 생활인으로서 바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쉼없이 생활의 단상을 수 백편의 시로 옮겨 놓았으며 시집『끝내 붉음에 젖다』는 그 중의 일부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장식을 배제하는 직설적인 언어는 다시 둔중한 거문고의 선율을 얹어 무애無碍의 경지로 아로새겨지고 있다. 끝으로 시 「끝내 붉음에 젖다」를 마음에 담으면서 김혜숙 시인의 건필을 기원한다.
만산홍엽 滿山紅葉 산과 들은
훨훨 불 지피며 흥타령 부르다
끝내는 헐거운 잇몸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웃음 흘리다
홀로 멋쩍어 외로움이 된다
깎아내리는 산 아래 강물도
낙화를 받아내며 윗물 아랫물
온종일 바꾸며 훔쳐내고
오래지 않아 낡아 깁고 있던
누더기 한 벌 헐벗은 몸에
두르고 끝줄 타고 가는 날이
저기 온다
- 「끝내 붉음에 젖다」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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