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한 철판 위의 친구를 부검…그 아픔이 시로 뛰어들게 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5.27 00:03 | 종합 20면 지면보기
등단 62년 시인이면서 의사인 마종기가 7년 만에 수필집을 냈다. 지난 삶에 대한 기억, 영감을 받은 문학·미술·음악 등 예술작품에 대한 글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진 넥서스]
“담당 인턴은 부검의 전 과정을 꼭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며칠 전까지 함께 키득거리며 머리를 쓰다듬던 그 친구의 머리뼈를 전기톱으로 잘라내고 뇌를 끄집어내어 검사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중략) 피를 물로 씻어내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의사가 되려고 태연함을 가장하던 그 수많은 날들. 그 아픔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시간만 있으면 시를 찾아서 그리운 모국어의 단어 속으로 깊이 뛰어들곤 했습니다.”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 낸 마종기
인생의 끝날에 날 보여주고 싶어
부끄러워 감췄던 얘기들 털어내
생사의 순간 접하며 인간에 연민
의사 아니었으면 시 못 썼을 것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
따뜻하고 부드러운 언어를 쓰는 마종기(82) 시인이 최근 출간한 산문집 『아름다움, 그 숨은 숨결』(앤드·사진)에서 고백한 기억이다. 시인으로서 영감을 받은 문학·미술·음악뿐 아니라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까지 털어놨다. 생명공학 전공자이자 문인·가수인 루시드 폴(조윤석, 46)과 나눈 서간집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 (2014) 이후 7년 만에 낸 산문집이다.
미국에 거주 중인 마종기는 본지와 전화 통화에서 “부끄러워 감추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버리자는 생각으로 썼다”고 말했다. “치기 만만한 것들을 감추고 빼고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서, 인생의 끝날에 나를 보여주자 하는 생각을 했다.”
마종기는 지난해 9월 12번째 시집을 낸 시인이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첫 시를 발표했다. 그때 연세대 의대 1학년 학생이었다. 가장 유명한 시는 ‘바람의 말’이다.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1980년 나온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 들어 있었고, 조용필이 영감을 얻어 노래 ‘바람이 전하는 말’(1993년)을 불렀다.
동화 작가 마해송, 무용가 박외선의 장남으로 태어난 마종기는 “고등학교까지도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동네 어른이 ‘가난한 나라에서 과학을 배워야 한다’고 해 의과대학에 갔다”고 했다. “그래도 글쓰기가 그리워 문과대학에서 도강하다가 시인이 됐다. 의사보다 먼저 시인이 됐다.”
마종기는 공군 군의관이던 1966년에 수감 생활을 했다. 한일회담 반대 서명에 재경 문인으로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미국 오하이오주로 떠났고 5년만 배우고 돌아오려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국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던 남동생이 해직된 뒤 “배추 장사라도 하겠다”며 그를 찾아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마종기는 “‘바람의 말’이 이승과 저승에 있는 연인의 대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나라와 내 집, 귀국을 포기하는 슬픈 심정에서 쓴 것”이라고 했다.
타국 병원의 수련 생활은 고됐다. 병원에서 환자들과 친구가 될 정도로 다정한 의사였지만, 그 친구들의 부검에 참여해 싸늘한 철판 위에서 각종 장기가 사정없이 도려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미국으로 찾아왔던 남동생은 총기 사고로 급작스레 사망했다.
“내가 한국에서 수감됐을 때 매일 술만 마시던 아버지는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자마자 세상을 떠나셨다.” 마종기는 “외국에서 일상의 외로움에 오금을 움츠리고 공포와 슬픔과 환희의 절정을 매일 오가면서 살았던 몇 해 동안의 내 의사 수련은 엉뚱하게도 내 문학의 확실한 물꼬였다”고 했다.
고통에서 도망치듯 찾아간 대상은 언제나 예술이었다. “시간만 있으면 모국어로 된 시를 썼고, 미술관을 찾았다.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오페라를 들었다.” 이번 책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말로 끝난다.
아픔과 고통에서 예술로 향하곤 했던 시인의 삶이 겹친다. 그는 “문학은 내게 신은 아니다. 하지만 시가 사람들의 정신에서 불꽃이 솟아 나오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믿는다”고 했다.
마종기는 “의사였기 때문에 시를 썼다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의사였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결정적인 순간을 계속 보며 살아왔다. 그게 문학의 계기가 됐다. 감정의 파고가 높았기 때문에 시의 꼭지를 잡을 수 있었다.” 따스한 시어에 대해서도 의학의 영향을 언급했다. “죽고 사는 인간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안 생길 수가 없다. 의사가 아니었으면 시를 못 썼다.”
그는 지금 한국의 의사들에게도 문학과 예술을 강력하게 권했다. 2003년 연세대에서 ‘의학과 문학’ 강좌를 개설해 몇 년간 의과대학 학생들을 지도했다. “과학자 생활만 한 의사들은 상당히 불행하게 산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강좌를 만들었지만 몇 년 후엔 ‘학생들 시간을 뺏는다’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에 강좌가 비실비실해졌다. 정밀한 과학을 추구하는 의사들이 인문학과 예술에 접속하는 시간이 늘어나야 한다. 나 또한 미국 의사 생활에서 너무 외롭고 힘들어 다시 문학을 찾게 되지 않았나.”
그는 또 “세상 모든 것은 부단히 변하지만, 예술의 지고한 정신은 변함이 없다”며 “고단한 삶을 가지는 모든 이가 그런 단단한 기둥을 하나 감아쥐고 살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싸늘한 철판 위의 친구를 부검…그 아픔이 시로 뛰어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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