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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하다, 화엄사 홍매화…사랑한다, 아미타사 목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3. 29. 16:28

 

처연하다, 화엄사 홍매화…사랑한다, 아미타사 목련

[중앙선데이] 입력 2021.03.27 00:02 수정 2021.03.27 00:31

 

김홍준 기자

 

보미다. 그녀의 이름은. 부모님이 봄을 좋아해 자신의 이름을 '보미'라 지어 그 계절처럼 자식을 사랑하고 싶다고. ‘보미’란 이름은 두 글자지만 딸을 부를 땐 한 글자 ‘봄’이라고 한다고, 김보미(42·서울 도봉구)씨가 말했다.

산사의 봄

전남 구례 화엄사 경내에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 절정을 이루고 있다. 화엄사 홍매화는 색이 검붉어 '흑매'라고도 한다.

김경빈 기자

계절에 순서야 당연히 있지만, 순위가 있다는 건 그 계절에 미안하다. 숨 가쁜 경쟁 차트를 한 계절의 들머리에 들이밀어 본다. 봄은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철이다. 42%대 40%로, 아슬아슬하게 가을을 앞선다. 한 여론조사업체가 봄의 절정인 5월에 벌인 결과니, ‘홈그라운드’의 유리함을 상쇄해야 할까.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런데도 홑겹 가벼운 옷차림에 봄 유랑 떠나는 물결이 인다.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 중 하나가 산사(山寺)다. 사찰생태 연구가 김재일이 말한다. “산사의 숲은 사람의 손을 거쳐 태어났지만, 세월이 흘러 자연에 동화됐다.” 산사는 자연이다.

전남 구례 구층암 천불보전 앞 수선화. 김홍준 기자

겨울꽃도 있건만, 봄의 다른 말은 꽃이다. 꽃과 같은 말은 봄이다. 산사의 꽃으로 안내한다. 산사의 봄이다.



# 사성암에서는 섬진강 벚꽃이 한눈에

남쪽에서 소식이 들렸다. 제주 관음사에 복수초가, 법화사에 수선화가, 선돌선원에 동백꽃이 피더니만, 전남 여수 흥국사에 진달래 그늘이 생겼다. 구례의 지리산 화엄사에는 홍매화가 터졌다.

지난 24일, 대전에서 왔다는 이충열(74)씨는 진득하게 홍매화를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다음 주 마지막 힘을 낼 것 같군요.” 그와의 선문답 일부다. 단청이 퇴색해 백골 드러낸 각황전 옆, 홍매화는 그 대비에 더욱 눈부시다.

김경숙(63·대구)씨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기자에게 귀띔했다. “홍매화 휴대폰 사진 콘테스트가 있대요.” 화엄사에서 올해 만든 이벤트다. 27일까지다. 장길선 화엄사 신도회장은 “오셔서 구례에서 한 끼만 들고 가시더라도 감사하다는 취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무너진 지역 상권을 살리자는 의미다.

전남 구례 오산(531m)의 사성암 약사유리광전(藥師琉璃光殿) 앞 산수유. 김홍준 기자.

전남 구례 오산의 사성암 산왕전 꽃창살. 김홍준 기자

화엄사에서 저만치 아래 섬진강변의 사성암. 암자는 깎아지른 산 위 531m에 자리 잡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10m 기둥 걸쳐진 유리광전(琉璃光殿)에서 섬진강변에 하늘거리는 벚꽃을 굽어볼 수 있다.


경남 고성의 옥천사에서는 겸손하게 아래를 살펴보며 말사인 백연암까지 약간의 발품을 팔아야 한다. 단청을 생략한 수수한 수행처소 앞, 수줍게 핀 얼레지를 만날 수 있다. 백연암까지 이 얼레지가 군무를 춘다. 그러다가 어느새 제 실핏줄까지 보여줄 정도로 청아한 현호색이 이곳 연화산을 차지한다. 어느 부부가 오던 발길을 조심스레 멈춘다. “엎드려 사진 찍으시는데, 방해 드릴 것 같아서요.” 절에서는 부처가 된다. 마음 부자가 부처 아닌가.

지난 3월 24일 경남 고성 연화산의 옥천사에는 얼레지가 피어있다. 김홍준 기자.

경남 고성 옥천사의 말사인 백연암뒤 연화산 등산로에 핀 현호색. 김홍준 기자

다시 순위를 들이대야 한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꽃 1위가 장미요, 그다음이 벚꽃이다. 산사의 봄, 벚꽃은 쉬이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톱10에 드는, 재배종인 프리지어를 만날 줄은 몰랐다. 전북 고창 도솔암에서다. 선운산 도솔암 내원궁은 선운사에서도 2㎞ 넘게 걷고, 거기에 더해 가파른 계단 올라야 만날 수 있다.

지난 3월 24일 전북 고창 도솔암 내원궁에 공양한 프루지어. 김홍준 기자.

서울에서 온 이수정(62)씨는 “지장보살님 드리려 봄꽃인 프리지어 한가득 가져왔다”고 말했다. 곧이어 내원궁에서 염불이 흘러나왔고 지성이 보태졌다. 내원궁을 받치고 있는 절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이 동백꽃 옆에서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운사 담 너머 목련이, 약사전 앞 수선화가 바람에 춤췄다.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 사방천지의 녹색 꽃무릇 잎은 가을에 다홍색 꽃잎을 틔우며 변신할 터이다.

전북 고창 선운사 한쪽 켠에는 목련이 풍성하다. 선운사 말사인 도솔암에는 개불알꽃이 햇볕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고, 도솔암 향하는 길 푸른 꽃무릇 풀은 여름이 지나면 저 여성의 옷처럼 다홍색 꽃으로 변할 것이다. 김홍준 기자

지난 3월 24일 전북 고창 선운사의 말사인 도솔암 마애여래좌상 옆에는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김홍준 기자.

# 강원도 홍천 물걸리사지에 제비꽃

“시방 뭐하는 거여. 그게 뭔 겨?” 지난 25일 충남 서산 부석사. 꿩의바람꽃을 찍자 “요 아랫동네에서 왔다”는 할머니 셋이 물어봤다. 부석사는 해발 358m 도비산에 있다.

태안에서 캠핑 중 왔다는 나명배(39)씨는 “서울에는 벚꽃이 피었던데…”라며 더 남쪽인 부석사에는 아직 벚꽃이 피지 않았음을 궁금해했다. 서울 벚꽃은 지난 24일 공식적으로 개화했다. 이곳의 찻집을 관리하는 다원보살 노미숙(56)씨는 “산이 낮다 해도 산중이라 개화가 늦은 편인데, 2주 뒤에는 벚꽃이 펑펑 터질 것”이라며 “지금은 야생화를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는 지금 꿩의바람꽃(왼쪽 위)·자주광대나물(오른쪽 위)·노루귀 등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야생화는 절을 받치고 있는 이 푸른 언덕(아래) 곳곳에 피어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3월 25일 충남 서산 도비산에 있는 부석사에 피어 있는 매화. 이 매화나무는 스님들의 빨래걸이 터와 자리를 함께 한다. 김홍준 기자

꿩의바람꽃 외에도 자주광대나물·개불알풀·현호색 등이 깔려있다. 요사채 뒤 매화가 피었다. 바로 앞 스님들 빨래를 걸 집게가 줄 위에 있다. 매화와 빨래의 공존. 꽃은 삶의 테두리 안에 있다.


경기도 남쪽의 안양 삼성산. 금강사에는 옥잠화 잎이 흙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경기도 북쪽인 고양 북한산 아미타사 가는 길에 목련이 흐드러진다. 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목련나무가 이렇게나 컸나 싶을 정도로, 10m인 아미타사 미륵대불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을까.

경기도 고양 북한산의 아미타사로 향하는 길, 흐드러진 목련이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3월 26일 짙은 정장을 입은 한 남성이 절로 향하고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3월 26일 경기도 고양 북한산의 아미타사로 향하는 길에 흐드러진 목련이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앞의 전각은 아미타사 맞은 편의 무량사 범종루다. 김홍준 기자

아미타사 해선 주지 스님은 "목련을 지날 때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속삭인다"고 했다. 그 목련 밑을, 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짙은 정장 차림의 사내가 지나갔다. 최근 가족을 잃고 제를 지내러 절로 향하는 그는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라며. 할미꽃·매발톱·금낭화가 해선 스님의 독경 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도 고양 북한산의 아미타사에는 할미꽃·금낭화·매발톱(왼쪽부터 시계 방향)이 있다. 해선 주지 스님은 ″내가 가진 것 전부″라고 했고, 기자는 ″스님 마음이 부자″라고 답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설악산 오세암. 조만간 행자들은 산벚꽃 꽃비에 흠뻑 젖을 것이다. 홍천 물걸리사지에는 제비꽃, 민들레가 일광욕을 하고 있다. 서울 인왕산 인왕사에는 개나리가 검푸른 밤하늘에 점점이 떠 있다. 진관사 홍매화는 그 앞 보살 셋의 두런두런 이야기꽃이 궁금해 이제 '톡' 터질 지경이다.


다시 구례 화엄사. 이곳 홍매화는 인기 절정의 수퍼스타다. 그러나 해 뜰 녘의 화려함이, 해 질 녘에는 달리 보인다.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모두 떠난 뒤, 무대 빛이 사라진 스타의 다른 모습일까.

지난 3월 26일 서울 은평구 북한산의 진관사에 핀 홍매화. 김홍준 기자

꽃은 이른 봄 우리에게 낯선 반가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봄에 익숙해질 무렵, 꽃에 심드렁해질 수 있다. 법구경 일부를 빌려 다시 써본다. ‘꽃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하니, 마음은 바람을 거슬러 세상에 전해진다.’ 봄은 꽃이고, 꽃은 마음이다. 산사의 봄이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