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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은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비극悲劇의 명랑성과 비극非劇의 알레고리Allegory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8. 25. 13:45

비극悲劇의 명랑성과 비극非劇의 알레고리Allegory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오래 전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悲劇을 통하여 삶의 애환을 정화淨化하였다고 한다. 연극(비극)을 통하여 관중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고 있는 사건을 동일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억눌린 감정을 배설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어째든 비극悲劇은 개연성을 지닌 허구의 세계이다. 그러나 비극悲劇은 허구의 세계임과 동시에 우리의 삶이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非劇(현실)을 각성하게 한다. 모든 존재가 언젠가는 소멸한다는 점과 그 누구도 소멸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극悲劇은 단순히 비극非劇이 아니라는, 즉 누구나 한번은 묻게 되는 존재의 의미에 정답을 내놓아야 하는 엄정한 현실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와 같은 생물학적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죽음과 같은 소멸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거나 더 나아가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슬픔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문학의 기능이 훈화訓話와 억눌린 감정의 배설排泄에 있다고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세계의 자아화나 자아의 세계화를 어느 특정 장르의 특징으로 가름하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는 않지만 시의 특성이 주관적 감성의 발화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공포와 불안한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조하은의 첫 시집얼마간은 불량하게는 이러한 불편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자아의 기록이다. 연극이면서 연극이 아닌 생 ,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고통과 연민의 세계를 응시하는 고백인 것이다.

 

2.

 

시집얼마간은 불량하게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조심스럽게 시인 자신이라 짐작되는 라는 화자話者가 끌고 가는 이야기와, 등장하는 인물들이 화자話者의 객관적 묘사에 의해 일반화되는 경우로서 이 두 축을 가로지르는 시간에 대한 시인의 일관된 관점이 펼쳐져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햇살을 받아도 노래할 수 없다는 것’(폐장),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할 때’(타이밍), ‘불안은 죽음을 아는 이들의 몫이다’(네모난 불안)와 같은 단호한 언명은 시간을 경유하며 체험된 시인의 정언명령 定言命令이라 생각된다. 미래에 대한 달콤한 희망이나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와 같은 이미 상식화된 인식은 시인에게는 보류되어야 마땅한, 더 나아가 유토피아는 항상 흘러가버린 과거에 있거나 아예 없음을 체득한 확고한 신념으로서 얼마간은 불량하게에 농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뾰족한 시간을 넘었다 생각했는데

시간은 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무처럼 몸에 새기는 것이었는지도

 

- 시간의 경계 속에서1

 

위에 예시된 바와 같이 시인이 소환한 시간은 흘러가서 사리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새겨져 있고 , 그리하여 시인의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나 사건은 시시때때로 슬픔이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부조리한 삶의 양식으로 나타난다.첫눈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육성회비 봉투를 비어 있는 채로 들고 간 날

등을 떠민 담임선생님은

빈 봉투 대신 들고 온 날고구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빈 봉투와 생고구마가 날아오르던 교실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의자를 들고 벌을 섰다

 

미열이 온몸으로 흘러들어와 마구 돌아다녔다

헛것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 사시나무도 시름시름 앓았다

달아오르는 날이었다

 

창밖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 눈첫 눈이 가져오는 순결한 이미지나 낭만은 없다. 이 시에서는 유쾌하지 않은 과거가 불청객으로 칮아 온 정황을 보여준다. 가치가 전복顚覆되는 혼란한 풍경으로 되새김질 된다. 오늘날에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풍경을 떠올려보자. 한없이 학생들에게 자애롭고, 매사에 모범인 선생님은 없고 육성회비를 고구마로 대신 가지고 온 어린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벌을 세우는 풍경. 그러나 이 선생님은 어린 학생에게는 갑이면서, 교무실에서는 육성회비 납부율이 저조하여 윗 사람에게 지적당하는 소심한 을이기도 하다. 그렇게 배웠다에서 그 선생님은 숙자 엄마가 싸다준 거한 저녁 식사에 배부르고 점수를 조작하는 비열함도 있으나 또 하나의 을인 화자話者는 중간고사에 일등함으로서 그 비열함을 이긴다. 첫눈이나,그렇게 배웠다에 등장하는 선생의 비루함이 보여주는 세속적 욕망과 그에 대응하는 복수란 단어의 뜻을 그렇게 배웠다는 고백은 삶의 질곡에 순응하는 운명론적 관점이 아닌 비극 그 자체로서의 삶을 희롱하는 힘을 키운 내력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두 눈 감을 때 품고 갈 마지막 이름과

지우고 싶은 시간 속에 있는 사람 사이의 전쟁

 

- 시간의 경계 속에서4

 

시인에게 시간은 자신의 자아를 확장시키는 교과서이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의식의 내면에 옹이로 들어와 박히는 되새김질되는 시간은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 우리는 오늘도 어딘가를 지나(시간의 다큐) 길이고,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이 / 돋아나(비문증), ‘문 닫는 눈물 공장이기도 하다. 비극 그 자체로서의 삶을 희롱하는 힘은 다른 말로 바꾸면 사랑과 증오가 교차하는 시간을 도색잡지를 몰래 훔쳐보듯이 얼마간은 불량하게사는 것이다. 부조리하고 슬픈 세상을 잊어버리려 하거나 애써 극복하려하기 보다는 부조리와 슬픔 자체를 즐기는 것은 어떠하겠는가. 되돌아 갈 수도, 삭제할 수도 없눈 생의 비루함과 낭패감은 누구나 감추고 싶지만 드러난 비밀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술회한다.

 

 

내가 아는 나의 죄와

당신이 아는 나의 죄와

내가 모르는 나의 죄와

당신이 모르는 나의 죄마저

낱낱이 꺼내 놓는 밤

벡스페이스키와 삭제 키가 없는 자판 위

어딘가를 지나고 있다

 

버그다

- 자화상전문

 

하찮은 벌레 (bug)이거나 뜻대로 제어되지 않은 삶의 오류를 또 어찌하겠느냐마는 이 자조自嘲를 자신과 무관하거나 아주 가까운 이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즐거운 고행을 거듭하는 시들을 만나게 된다.

 

3.

 

그리하여얼마간은 불량하게의 얼개를 이루는 또 하나의 축 서사敍事를 통해 삶의 보편적 양식樣式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이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화자話者에 의해 객관적 묘사되면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연극 같은 삶(悲劇)과 연극이 아닌 초현실적인 비극(非劇)을 일반화하는 주인공이 된다. 연극 같고, 연극보다 더 극적인 주인공의 삶은 한결 같이 일그러지고 소외되며, 이 세상의 변방으로 밀려가는, 한 마디로 패자敗者들이다. 서울을 헤매다가 구례 삼동마을까지 내려 간 봉성피자집 봉성씨(산수유피자), 장사가 잘되면 임대료가 오를까 아래층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는 소심한 책방 주인(문래동 골목), 땅 열 마지기 사는데 십 년이 걸린 아버지(지게). 회사를 도둑맞고 알거지 신세가 된 그(짝 찾기),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내놓고 정말 죄송하다고 죽은 송파 세 모녀 (정말 죄송합니다), 억소리 나던 기계 팔고 삼십만 원 짜리 중고 재봉틀을 들여놓은 면목동 언니(면목동 언니), , 시인의 눈에 비친 이웃들은 스스로 알지 못한 생의 정점頂點에서 가차 없이 추락한 사람들이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열심히 살고 남을 해친 적도 없었는데도 가난과 고통의 나락에 떨어진 그들의 삶은 정말 가치 없는 무의미한 삶이었을까? 우리의 삶이 버그bug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삶을 능멸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버지는 아침과 저녁에 논두렁을 한 바퀴씩 돌았다

 

아버지의 사계절은 바다에서 막 증발된 육각형의 소금꽃이 피고

소금꽃은 논밭에 박혀 어석거렸다

 

땅문서를 꼭 쥐고

숨이 차도록 뛰어오던 날

초가지붕도 덩달아 들썩거렸다

 

빠진 어금니에 드나들던 바람이 먼 길을 떠나고

주인 없는 못자리

끝내 영글지 못한 낟알들은

물색없이 헛발질만 해댔다

 

아버지의 생이 고스란히 담긴 누런 종이 몇 장

남의 손에 넘겨주고 돌아서는데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힌다는 뉴스가 무심하게 흘러나온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아버지가 즐겨 듣던 옛 노래를 틀어놓고

그 물살에 어딘가로 한없이 흘러가고 있다

 

- 폭설전문

 

폭설지게와 짝을 이루는 시이다 삼십 리 길 나뭇짐 져 날라 / 부잣집 땔감 다 대던 아버지 / 땅 열 마지기 사는데 / 십 년이 걸린’(지게첫 연)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이제는 농부가 될 수 없어 쓸모가 없어진 그 땅을 팔고 돌아가는 자식의 하루를 그리고 있다. 힘들게 가족의 부양을 위해 일생을 땅과 함께 했던 아버지의 노고는 과연 부질없는 것 이었을까? 또 아버지의 일생의 땀이 가득한 논을 팔아야 하는 자식의 결정은 잘못된 일일까? 우리가 이 시에서 읽어야 할 것은 단순환 회고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양가적兩價的 층위를 지닌 것임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 일 것이다. 삶은 비루하고, 시간은 상처를 주며 영영 지나가는 듯 하지만 어느새 그 시간은 옹이로 박혀 있다. 그러나얼마간은 불량하게를 관통하는 이와 같은 부질없는 슬픔은 우리 모두의 마땅한 삶의 양식糧食 이다. 부질없어 슬픈 삶을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우리 모두가 마땅히 삶의 양식糧食 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태도로 전환될 때 비극은 명랑성 明朗性을 획득하게 된다. 한 마디로 행복/ 불행, 기쁨/ 슬픔, 등과 같은 이분법적 사유는 행복의 질량은 불행의 질량보다 적고, 기쁨의 순간보다 슬픔의 시간은 길다.’는 삶의 요의를 깨달을 때 비로소 비극적 삶은 능동적인 명랑성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으나 절망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쉽게 잊어버리는 말이기도 하다. 새로운 전망이 없는 삶은 지루하지만 우리의 삶이 하염없이 신기루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라 받아들이자고 얼마간은 불량하게의 많은 시편들은 우리를 불량하게 이끈다.

 

4.

 

그렇다고 해서 조하은의 시편을 숙명론의 관점으로 치우쳐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이미 예정되어 있는 운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숙명론과는 달리 조하은의 인생관은 내면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서정적 자아를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글의 앞에서 언급한 패자敗者들을 다시 상기해보자. 그들은 남을 해치면서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열심히 자신들의 삶을 꽃밭으로 일구조자 하는 소박한 꿈을 가꾸던 사람들이었다. 수아의 몇 구절을 읽어보자.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창밖을 바라보거나

복도로 나가는 출입문의 열쇠구멍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잠을 자는 듯 깨어 있는 듯

자장가 한 구절을 웅얼거리고 있다

 

...중략...

 

기다림을 넘어 계절은 지나가고

입원차트가 두꺼워지는 속도로 환자복은 점점 헐렁해지고 있다

 

...하략 ...

 

- 수아부분

 

수아와 연관된 시 수아꽃을 통해 추측하건대, 수아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 있고 수아와 수아의 외국인 어머니는 어디론가 잠적해 버린 상태이다. 언제부터인가 번지르르한 다문화 가정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더니 농어촌의 남자들은 짝을 먼 이국의 여성들을 찾아야 하는 난경에 처하게 되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짝으로 맺기엔 나이차가 나는 사람들이 가족의 인연을 맺기가 그리 쉬운가. 아마도 수아네 집도 그런 가족 중의 하나로 원치 않은 이별로 병을 얻은 한 남자의 애달픔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지만 이 풍경 속에는 아직도 경제적 풍요를 맞이하지 못하는 농어촌의 현실과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날아온 여인들이 겪는 외로움과 소외를 다문화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해버리는 터무니없는 생각들을 부끄러워해야하는 고발의 시로 읽는다. 이와 같이 나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해 버리는 부조리한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침묵의 카르텔이나 침묵의 카르텔 부록은 요즘 한창 인구에 회자되는 성폭력의 문제를 우화寓話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침묵하고 필요에 따라 분기탱천憤氣撑天하는 모습들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이제 동행이란 말을 사전에서 지운다’(동행)는 시인의 절규는 골목의 사내로 명명된 다수의 폭력에의해 아비가 누구였는지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침묵의 카르텔마지막 행)는 비겁한 다수에 대한 응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하은의 시들은 가해 加害와 피해 被害의 거리를 두지 않는다.

 

좁은 철창 안

비슷한 처지들 웅크린 채 다닥다닥 붙어 있다

구석에는 찌그러진 물그릇과 빈 밥그릇

 

...중략...

 

발치에 던져둔 흥분이

불안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불안은 죽음을 아는 이들의 몫이다

 

- 네모난 불안

 

위의 시는 도살을 기다리는 개들의 이야기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개들을 사람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세상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말 뜻 대로 이전투구 泥田鬪狗하는 우리의 삶을 오버랩 시키는 것. 발치에 던져 든 흥분이라는 욕망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불안에 힘들어 하는 것인가. 죽음을 아는 불안한 존재인 인간은 가해자이던 피해자이던 모두 측은의 대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얼마간은 불량하게은 한 편의 알레고리Allegory로 완성된다.얼마간은 불량하게에 제시된 서사 敍事들을 우화로 읽을 때 비로소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면 시인은 그때 넌지시 한 편의 시를 우리에게 선물로 내어준다.

 

 

이왕이면 고운 말들만 골라서 알려줄게

꽃이라든지

별이라든지

꿈이라든지

날개라든지

 

이왕이면 고운 소리들만 골라서 들려줄게

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소리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싣고 달리는 기차소리

 

스스로 찾아낸 언어의 조각들이 가슴에 스며드는 순간

새를, 푸른 하늘을, 싱싱한 바람을

너의 가슴에 빠뜨려보렴

 

따뜻한 햇살을 한 올 한 올 풀어

빛의 문장을 만들어보렴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 너에게

가슴에 담아놓은 둥근 보름달을 꺼내줄게

 

사월 들판에 나들이 나온 아지랑이 같은 너

 

 

- 아이에게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