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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애란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 시간의 경계를 응시하는 잠시 멈춤의 기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9. 19. 16:45

 

시간의 경계를 응시하는 잠시 멈춤의 기록

나호열(시인·문화평론가)

 

 

1.

강애란 시인의 첫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는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집이다. 어느 시를 읽으면 아스라이 멀어져 가버린 꿈이 돋아 오르고 또 다른 시를 읽으면 늙어감에 대한 넉넉한 사유가 저녁노을처럼 은은해지기도 한다. 이 시집에 응축되어 있는 ’, ‘골든 에이지(Golden Age)’, ‘노인삼반(老人三反)’의 생각을 더듬으며 이 시집을 음미하는 즐거움에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하기도 한다. 등단 이후 이십여 년이 흐른 후에 첫 시집이라니 늦어도 너무 늦은 감이 들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긴 시간을 녹여내고 다독이며 이루어낸 시편이 보여주는 풍경은 자못 삶의 먼 순례의 길을 연상하게 만든다. 아마도 강애란 시인도 인생의 가을의 초입에 다다른 까닭도 있겠다. 어쨌든 예전과 달리 고령화 사회에 들어선 현실을 비추어본다면 인생의 가을은 길고 노인삼반을 이야기하기엔 이른 감이 없지도 않다. 노인삼반이란 무엇인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런 글귀가 떠오른다.

 

이기(李墍·1522~1600)간옹우묵(艮翁疣墨)’에서 말했다. “세속에서 하는 말이 있다.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인 것이 대개 세 가지다. 밤에 잠을 안 자며 낮잠을 좋아하고, 가까운 것은 못 보면서 먼 것은 보며, 손주는 몹시 아끼나 자식과는 소원한 것, 이것이 노인의 세 가지 상반된 점이다(世俗有言, 老人與年少之人相反者, 大概有三. 夜不肯寐而喜晝眠, 不能近視, 而能遠視. 篤愛兒孫, 而疎其親子, 此老人之三反也).”

 

명나라 때 왕납간(王納諫)회심언(會心言)’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 적엔 똑똑해도 늙으면 잘 잊고, 아이 때는 다 즐거우나 늙으면 모든 것이 슬프다. 이 또한 한 몸 가운데 조화가 옮겨 흘러감이다(兒多慧, 老多忘; 兒多樂, 老多悲. 此亦一身中造化遷流).”

 

엊그제 일은 까맣게 생각이 안 나도 몇십 년 전 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팔랑팔랑하던 젊은 시절은 늘 기쁘고 좋았는데 나이가 들자 스쳐가는 바람에도 공연히 눈물이 난다. 나는 그대로건만 세월이 다르다. 밤에는 뒤척이다 낮잠이 많아진다. 아들은 점점 보기 싫고 손주만 예뻐 죽겠다. 모두 늙었다는 증거다.

정민, 세설신어」 《조선일보2014. 03. 26에서 인용.

 

요즘 세태에 노인삼반이 꼭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또 나오는 말이 골든 에이지, 인생의 황금기가 고희(古稀)를 넘어서부터라는 이야기이다. 물론 장수시대가 대세라 하지만 지금도 팔십을 넘어 살 수 있는 확률은 30%, 90세를 넘어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은 5%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래 살기를 희망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겠다는 삶의 질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숨 가쁘게 보낸 격동의 시대로 볼 수 있다. 해방 이후의 전쟁과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자신을 되돌아볼 틈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강애란 시인도 단절하지 못한 유교적 전통사회의 여러 덕목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었을 것이고,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자아의 성숙, 다른 말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의 여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는 장년기를 넘어선 시인이 젊음과 늙음의 경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시인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사유를 웃음이라는 긍정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기록으로 충분해 보인다.

 

 

2.

한때 우리는 꿈은 이루어진다(Dreams come true)’라는 캐치프레이즈에 열광했던 때가 있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 현실화되었을 때, 2002년 한일월드컵이 그러하였다. 꿈은 상상(想像)이나 망상(妄想)과는 다르다. 설정된 목표나 그렇게 설정된 목표를 향하여 가는 세밀한 계획과 그 계획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도전의 용기가 없다면 꿈은 말 그대로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적 본능이나 세속적 욕망과 다른 값어치 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 시인은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예전의 삶과 현재의 삶을 가르는 경계에 서서 앞으로의 골든 에이지를 향한 다짐을 조심스럽게 마음에 담을 뿐이다. “짜지도 달지도 않고/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경계의 맛”(소금의 향)을 느끼면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성찰한다. “육십 문턱에 서서 완숙을 기다리며/반숙쯤으로 익어가고 있는 지 그 경계에 서서”(쉬운 일인가) 달걀을 완숙으로 부치기는 쉬어도 반숙으로 만들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완숙이 삶을 숙명으로 내려놓거나, 아니면 좀 더 고양된 의식의 고취 즉, 성숙으로 받아들여짐을 의미한다면 반숙은 미완성, 또는 굳이 가치를 확정할 필요가 없는 중도(中道)의 경지를 지향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음식으로서의 달걀은 취향에 따라 날것, 반숙, 완숙으로도 얼마든지 가용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가치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가치관에 맹목적으로 얽매여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다가올 것도 같고 돌아누울 것도 같은

옆으로 흐를 것도 같고

가운데로 모일 것도 같은 너를

무엇이 완성되기 전

무엇을 숨기고 있을 것 같은 너를

―「쉬운 일인가부분

 

다시 말하면 흑과 백같은 모순 개념에 지나치게 경도된 삶을 살아왔음을 인지하고 흑과 백 사이에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수많은 색()이 존재하는 반대 개념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경계의 의미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양비(兩比)도 양시(兩是)도 아닌 그 어디쯤의 경계는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의 얼개를 이루는 중요한 배경이 아닐 수 없다. 낮달은 바로 그러한 이 세계의 경계 없음을 고이 보여주는 시로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어제도 지나온 길

그제도 지나온 길

 

오늘은 활짝 핀

산수유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네

 

지나가다 빈 가지 끝에

꽃처럼 피어나고

 

지나가다 빈 가지 꼭대기에

하얀 외등처럼 걸렸네

 

당신,

지금은 외롭지 않겠구나

―「낮달전문

 

객관적으로 은 천체의 일부이지만 때에 따라서 은 우리의 주관에는 빈 가지에 피어나는 꽃이기도 하고 외등이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는 허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찾아 헤매는 행복이나 사랑 따위도 따지고 보면 실체가 없는 관념 덩어리에 불과하다.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설법도 이러한 관념의 사슬에서 벗어나기를 권유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분홍 귀털 탈랑거리며

주인 얼굴 살피는 인형 같은 털 강아지

 

엄마가 해탈을 찾고

아빠가 해탈을 찾고

바위도 해탈을 찾고

벌레도 해탈을 찾고

 

현관에 앉아 무심히

운동화 뒤축만 씹고 있는 해탈이

 

가자,

깊은 산사엔 가지 말고

동네 할인매장에 운동화나 사러 가자

네 이름 부르며 해탈을 찾는 사람들 속으로

―「해탈(解脫)전문

 

해탈(解脫)은 정신과 몸이 구유하고 있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을 이른다. 더 나아가서 윤회를 끊고 영원히 죽는 것을 뜻하는 열반(涅槃)과도 맥이 닿는다. 살아서 열반을 이루되 과거의 업을 소멸하지 못한 유여열반(有餘涅槃)도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이 세상에는 죽어본 사람도 없고 그러한 득도의 광경을 목격한 사람도 없다. 그렇게 보자면 해탈 또한 하나의 허상, 하나의 꿈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이 시에서 해탈이는 개다. 불가에서의 개는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동물이라 하는데 현실의 개 해탈이는 운동화 뒤축을 물어뜯는 우매한 미물일 뿐이다. 화자는 가자, 네 이름 부르며 해탈을 찾는 사람들 속으로가자고 권유한다. 해탈이는 애완동물이면서 생의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관념의 해탈인 동시에 현현(顯現)하는, 살아있는 해탈이다. 적어도 죽음을 사유하거나 예견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현관에 앉아 무심히/운동화 뒤축만 씹고 있는무용(無用)한 행위야말로 개인 해탈이를 무아(無我)의 실체로 보는 것이며 사람 말할 때/불쑥 끼어들어 말허리 싹둑 자르지 마라”(칼질하기)는 어머니의 당부처럼 말로 마음을 뒤엎고 상처를 주는 인간사를 넘어서는 것이다.

 

해탈(解脫)조금 쉬어가며 웃어요에서 드물게 해학의 흥취를 보여주는 시인 동시에 허언으로 가득 찬 거짓 달관이 아닌 진솔한 삶의 실천으로부터 길어 올린 휴지(休止)의 여유를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생각 깨우기 1, 운명과 같은 시들은 결코 추리나 연상으로 만들어낸 상식화된 삶의 깨달음이 아니다. 해탈에 대한 해학적 깨달음이 없다면 소낙비 맞았으면 우선 피하라든가 멀리 가지 말아라와 같은 잠언에 가까운 삶의 지혜를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애달픈 이별이나 마주하고 싶지 않은 죽음은 예습할 수가 없다. 단지 추체험(追體驗)을 통해서 그 감정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뿐이다. 강애란의 시편은 이런 추체험을 자기화하는 오랜 숙련을 보여준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는 노인들의 대화들을 소재로 삼은 시운명은 우리의 삶이 어디서 하차할지 모르면서도 거기가 어디쯤이냐 묻고/누가 먼저 내리느냐 묻고/서로 모른다고/허허 웃는 노인들처럼 생의 승차권을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비릿한 염원이 마음에 가득함을 증언한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문득 의식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통해 미래의 어느 날을 이렇게 감지하기도 한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

못 들은 듯해서 다시 올라간다

 

창문과 가스 불 다시 확인하고

등 뒤에서 쿵!

문 닫히는 소리

 

관 뚜껑 닫히는 소리도 비슷하려나

저 세상 가는 날 관 속에 누워

이승의 문 잘 닫으라고

마지막 눈짓하며 눈 감을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하 1층 누르고 내려가다 혼자 웃는다

 

지하 1층 아래

더 깊은 지하층을 생각하며

―「문 닫히는 소리전문

 

이렇듯 문 닫는 소리를 관 뚜껑 닫히는 소리로 유추하는,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해찰하고 그 풍경이 담고 있는 삶의 의미를 추출해내는 시법(詩法)은 무의식적으로 문여기인(文如其人), 글에 묻어나오는 시인의 품성을 엿볼 수 있게 만든다.

 

 

3.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는 강애란 시인이 잠시 멈추어 서서 바라본 이 세상의 바깥을, 삶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의식의 내면으로 들어앉혀 놓은 시집이다. 특히 이 시집의 2부는 우리와 가까이 있는 미물(微物)들을 관찰하고 그 미물들이 전해주는 삶의 이러저러한 교훈을 남기고자 하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거미, 까치, 철새, 안내견, 개미, 고양이 등등의 미물들은 거미, 얼룩말의 고백처럼 우화(寓話)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관찰의 대상이 되기도 하면서 우리의 삶에서 놓치기 쉬운 진실을 전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중에서도 얼룩말의 고백이나 개미는 파업하지 않는다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백가쟁명의 정치·사회적 난제들을 바라보는 풍자의 시로 눈여겨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 글의 서두에서 강애란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경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는 갑과 을의 갈등과 노동의 소외, 권위주의 타파와 페미니즘에 입각한 양성 평등의 논란의 이면에는 법으로 해결될 수 없는 개인의 심리적 편견을 배제할 수 없다는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과연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이라고 판명할 확고부동한 잣대가 있기는 한 것인가? 얼룩말의 고백은 이와 같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처음부터 얼룩진 무늬로 태어났다

 

하얗게 살고 싶어도 검은 무늬가

검게 살고 싶어도 하얀 무늬가

어둠 속에서 감추고 싶을 때

언뜻 스치는 하얀 무늬 검은 무늬

 

달리는 시간 속에서 돌아보던 저녁 무렵

산다는 것은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고

깔끔한 무늬는 어디에도 없고

얼룩진 속마음 소리 없이 앓고 있었지

 

당신이 검은 얼룩 보고 멀리 돌아간다 해도

당신이 하얀 얼룩 보고 내 안에 들어온다 해도

 

나는 선명한 무늬의 얼룩말이다

어둠이 내릴 때까지 품에 안고 걸어가야 할

 

슬픈가,

그대 맑은 얼룩진 무늬가

                      ―「얼룩말의 고백전문

 

아프리카 초원의 지브라(Zebra)는 얼룩말이다. 이 시를 읽기 전까지는 이 얼룩말이 흰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새겨진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 생각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다시 묻는다. 검은 바탕에 흰 무늬인지, 흰 바탕에 검은 무늬인지를 물으면서 얼룩의 근원에 대해서 사유의 전환을 촉발시킨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얼룩말인지 모른다. 각기 다른 얼룩을 문신으로 새기고 있는 원천적 슬픔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다시 묻는다. “슬픈가,/그대 맑은 얼룩진 무늬가라고 물으면서 맑음을 이야기한다. 마치 성선설의 신봉자처럼 어두운 사회의 불신을 훌쩍 넘어버린다. 그런가 하면 개미는 파업하지 않는다는 자본주의의 욕망과 노동의 현장을 일개미들을 통해서 면밀히 보여준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파업 투쟁과 하루에도 사업 현장에서 수십 명씩 아까운 목숨이 버려지는 무관심 속에서 개미는 주어진 본능에 따라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이 개미들은 각 개체의 이기적 욕망이 아닌 개미 사회의 일원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일개미를 통해 노동의 미덕을 따져보기보다는 우리 삶에 드리워져 있는 도덕과 윤리와 법의 그물에 갇힌 계급의 층위와 그 효용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눈여겨볼 뿐이다.

 

11월 아침이다 앵두나무 언저리 풀밭에

작은 흙덩이들이 눈에 보인다

땅속에 먹이창고를 짓는지

식구가 늘어 공사 중인지

부지런히 일개미들이 들고난다

 

이상한 일이다 흙 알갱이를 물고 나와

땅 위에 슬쩍 올려놓고 가는 개미

머리만 내밀고 뱉어놓는 개미, 그러다 흙더미가

안으로 굴러떨어진다

어떤 개미는 기어코 땅 위까지 기어 나와

두리번거리며 구멍에서 먼 곳에다

흙 알갱이를 부리고 간다

 

성실한 개미, 생각하는 개미

옆집 앞집 뒷집 다투지는 않는지

5일 근무제를 주장하며 파업도 하는지

개성시대라고 어린 것들이 더듬이에다

온갖 물감을 들이고 떼 지어 다니진 않는지

 

낯선 강릉 관사의 눈부신 아침 햇살

집 짓는 일개미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개미는 파업하지 않는다전문

 

충남 서천의 국립생태원에 가면 이 시에 드러난 일개미들이 일사분란하게 먹이를 나르고 자신의 맡은 일을 로봇처럼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왕개미, 보모개미, 운송개미, 건축 개미, 병정개미들이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분업사회는 인류가 꿈꾸는 이상사회의 전범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진의는 자기 직분에 순응하는 삶이나 노동의 미덕을 기리는 데 있지 않다. 이 시 또한 얼룩말의 고백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대한 회의(懷疑)를 표명한다.

과연 만여 종이 넘는 개미의 성공적인 진화(進化)와 그와 맞물리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일치하는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되묻는 것이다.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게 되면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천천히 걷게 되면 느림이 주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는 현란한 비유나 현상을 넘어서는 저 너머 상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전위(前衛)를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각각의 시편에 숨어 있는 시간의 보폭을 줄이면서 자아를 반추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경계를, 더 나아가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혼융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4.

강애란 시인의 시집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상재를 축하하면서 이십여 년 전 열정 하나로 무모하게 개설한 학교의 시창작 사이버 강좌에서 시인을 처음 비대면으로 만났던 기억을 되살린다. 그 후 등단의 여로에도 함께할 수 있었음도 큰 기쁨이었다. 무엇보다도 쉬지 않고, 시를 놓지 않고 먼 길을 걸어온 그 인내에 경의를 보낸다. 부디 표제시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의 마지막 구절에서의 토로가 더 높고 더 넓은 시세계를 열어가는 열정으로 빛나기를 바란다.

 

죽을 것처럼 웃었다

죽을 것 같아 눈물이 났다

(),

너를 만나면서부터

―「조금 쉬어가며 웃어요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