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최경선 시집 『그 섬을 떠나왔다』:거문도와 농섬 사이의 삶을 노래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7. 6. 17:49

거문도와 농섬 사이의 삶을 노래하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섬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다. 이항대립적二項對立的인 느낌이 동전의 양면처럼 혼재하고 있는 곳. 말하자면 고립무원孤立無援, 해방, 유폐, 자유, 도피, 이상향理想鄕 등등의 상징이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따라 달리 인식되는 곳이 섬인 것이다. 어느 사람은 뭍이 지닌 복잡함에 지쳐 바다를 건너 은거隱居를 꿈꾸고, 오로지 바다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은 섬이 지닌 생활의 불편함과 가난에 지쳐 섬을 떠나고 싶어한다. 이렇게 은거의 낭만과 간난艱難의 세파世波가 교차하는 섬은 어쩌면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익명의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어야 하는 강박과 서로 관계 맺으며 공존해야 하는 두레 그 사이에 떠 있는 섬. 그래서 최경선 시인의그 섬을 떠나왔다 는 우리 삶의 격절과 공존에 대한 팽팽한 긴장을 술회한 시집으로 읽힌다. 현존하는 섬에서 떠나 온 삶은 도시라는 또 다른 섬에 당도한 까닭에, 나와 너는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섬인 까닭에 그 섬을 떠나왔다라는 언명은 시인이 걸어온 삶에 대한 궁금증을 시를 통해 풀어낼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경선 시인은 거문도巨文島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육지와 제주도 중간쯤, 고흥에서 40킬로미터, 여수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이 외딴 섬은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터전으로 가난한 듯 가난하지 않게, 모자란 듯 모자라지 않은 삶이 꾸려지는 곳이다.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인 듯 보이는 작은 섬이지만 풍부한 어장이 있고, 뭍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주 오래 전부터 문물의 융성이 부족하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당구撞球가 들어온 곳이 거문도라고 말하면 놀라는 이가 적지 않다. 19세기 말, 열강의 위세에 눌려 국운이 풍전등화의 누란累卵에 놓였을 때,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은 거문도에 해군을 주둔시키고 거문도를 제멋대로 해밀턴 항이라 불렀다. 이른 바 거문도 사건(1885).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국군의 주둔은 서양 문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거문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세 침탈의 현장으로서 아픈 역사를 품은 섬이다. 그러나 거문도가 지닌 역사적 아픔은 몇 세대를 거쳐 온 까닭에 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의 거문도는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고립된 공간이면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일상이 함께 하는 장소로서 깊이 각인되어 있음은 틀림이 없다. 시인은 섬을 떠나왔지만, ‘바다가 선사해 준 무언의 심상心象을 결코 잊거나 훼손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거문도에서의 삶은 타지他地와의 비교에서 오는 편리함/ 불편함, 부유/ 빈곤과 같은 상대적 박탈감 보다는 마땅히 그러한 삶, 보편적으로 누구나 그러한 삶으로 인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섬을 떠나 왔다의 적지 않은 시편에 등장하는 섬, 거문도는 시인에게는 거칠고 힘든 역경의 땅이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동심과 가족애家族愛가 오롯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추억의 창고이다.

 

2.

 

시집 그 섬을 떠나왔다는 크게 보아 세 개의 얼개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이 살았던 거문도의 풍경을 회고하는 시, 그 이후의 자신의 자아를 탐색하는 고백의 시, 그리고 뜻밖에 조우한 역사적 사실에 내재한 역경과 그 역경을 이겨내야 하는 삶의 신고辛苦를 그린 시편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주제의 무거움에 대하여에서 시인은 한 작품에서 화자話者를 통해서 존재를 드러낼 때 주제의 선명성과 작품의 농밀성이 깊어진다고 말했다. 시인이 시에 직접 개입하여 자신의 감정을 드러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시인의 이야기에 동감同感하도록 강요(?)하는 실패에 빠지는 사례를 종종 보게 되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의 발화자로서 개입하는 일이 반드시 불필요하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시인이 마주 한 체험이나 사건이 희소성과 특수성을 지니고 있을 때의 현장감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험이나 사건이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은 일반화된 체험일 때에는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 할 것이다.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은 언어의 불투명성과 싸우고 이 언어의 확장성에 기대를 걸면서 분투를 거듭하고 있다.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로서만 언어를 인식하는 사람은 결코 문학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문학은 감정을 드러내는 일 보다 더 그 감정을 분석하고 통제하면서 사유에 새로운 빛깔을 입히는 일에 골몰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주제의 무거움에 대하여부분

 

그 섬을 떠나왔다는 분명히 시인의 체험의 기록이고, 대다수의 시에서 화자로 등장한 까닭에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거리 조정이나 감정의 과잉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자아의 세계화세계의 자아화니 하는 서정 抒情의 요체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 사유思惟의 새로운 빛깔을 입히는 시업이 될 터인데. 최경선 시인의 시편에는 감정의 과잉도 사유에 새로운 빛깔을 입히고자 하는 과도한 열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그 섬을 떠나 왔다가 보여주는 삼라만상의 희로애락이 돌멩이처럼 마음의 깊은 곳에 떨어질 때의 고요한 파문波紋을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놓친다면 참으로 안타까울 것이다.

 

어째든 시집그 섬을 떠나왔다의 가장 큰 배경은 거문도이다. 거문도를 회상하는 시편이 어림잡아 이 시집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이미 그 섬을 떠나왔으므로 이미 한 생애의 뒷모습을 돌아보는 내성內省의 기록이라 할 수도 있다. 먼저 거문도를 조망하는 시 한 편을 읽어보기로 한다.

 

곱발 디디면 바다가 보이는 고만고만한 돌담 집이거나

 

얼기설기 묶인 지붕 너머 바다의 정수리가 훤히 보이거나

 

몇 발짝 골목을 나서면 시푸른 바다로 통하는 곳이다

 

혀 둥글게 말고 턱 빠지게 하품하며 느릿느릿 걷는 고양이 폼이 적나라하게 고요를 느끼게 하는 곳

 

저 혼자 불 밝히는 등대가 있고

 

전설처럼 신지께*가 어부를 지켜주는 섬

 

손끝 유달리 까매도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온몸으로 바람을 막고 온몸으로 바람을 받아들이는 곳

 

하늘과 바다가 허락해야 닿을 수 있는 그 섬

 

어야디야 어기야 디야

어쩌다 들려오는 사무친 뱃노래에

 

~야 디야 어~기 여차 어야디야 어기 여차

이어 되뇌다 먹먹해지는 그 섬을

 

나는 떠나왔다

 

*거문도 사람들이 인어를 신지께라 부름

 

- 그 섬 거문도 전문

그동안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고향인 섬, 자유를 갈구하며 당도한 섬을 노래했다. 그 섬 거문도는 그 많은 섬의 시 중에서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시라고 감히 말하고 싶은 시이다. ‘손끝 유달리 까매도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들하늘과 바다가 허락해야 닿을 수 있는 그 섬에 살면서 뱃노래를 부르며 거친 바다로 나가며 신지께로 불리는 인어에게 자신들의 생명을 기원하는 풍경에 잠기고 저 혼자 불 밝히는 등대는 얼마만큼의 적막한 평화를 우리에게 나누어주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시인은 그 섬을 떠났다.첫꽃,동백꽃 졌다고 슬프다니요,이끼미에서 놀던 그 때처럼등등의 시편에서 드러나는 유년 幼年의 삶은 풍요롭다고는 볼 수 없으나 가난을 체득한 것도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뭍사람들에게 동백의 낙화는 슬프지만 시인에게 떨어진 동백은 곰보빵, 손가락빵, 구름빵 탐스럽게 부푸는 공갈빵 이고, 열매도 씨앗도 아닌 동백빵’(동백꽃 졌다고 슬프다니요부분)처럼 관상觀賞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 그 자체인 물상 物象이다. ‘종일 돌아다니다가/집 가며 먹던 꽃 송아리// 누가 볼세라 /슬며시 손 뻗어 한주먹 움켜쥐고 죽죽 따먹는’(그 꽃 고웁듯 향기롭습니다부분), ‘산국 한 아름 꺾어들고 / 홍조 띤 얼굴로 들어선 교무실 / 초라한 행색 들킨 것처럼/ 주뼛거리며 찾아낸 / 사이다병 // 부끄럼 피어나는데’(산국1, 2)에 드러나는 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소중한 정감의 도구로 작동한다. 이렇게 시인에게 있어서 섬에서의 생활 의식은 충만과 부족함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마땅히 그러함을 누리는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섬을 떠났다. 순응은 섬에서 떠나기를 열망하지만 섬을 떠나지 못하고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시이다. 말하자면 진학進學이나 기타의 이유로 섬을 떠나기 전의 마음을 그린 시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섬을 떠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섬 밖의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 알고 난 뒤부터였고,‘저 넓은 곳을 향해 날아보고 싶은성장기의 호기심 가득한 자아의 충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결국 시인은 섬을 떠났다. 말하자면 이소離騷와 다름없는 것인데, 부모와 자신의 고향을 떠나 시인이 꿈꾸었던 다른 세상, 저 넓은 곳에서의 삶이 어떻게 꾸려졌는가 하는 상황은그 섬을 떠나 왔다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인에게 있어서 거문도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근거지로 작동하고 있다.

 

3.

 

비록 섬을 떠나왔지만 거문도에는 끊을 수 없는 혈육이 현존하고 있다. 가끔씩 뭍으로 나와 자식들과 만나는 어머니를 그린 시들은 단순히 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시로 읽기엔 부족하다. 간단히 말해서 어머니는 시인의 오래된 미래이다. 그렇다! 오래된 미래! 환경운동가 헤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인도 북부의 라다크를 탐사하면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욕망이 어떻게 환경을 파괴하고 공동체적 삶을 경쟁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가는 지를 Ancient Futures : Learning from Ladakh(1992)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밥 짓는 일, 물 긷는 일이 놀이에서 노동으로 힘겨워지는 물욕의 증대로 말미암아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현대의 삶에서 거문도의 어머니는 자연이 주는 선물을 감사히 여기면서 늙어가는, 시인의 자아를 비추고 반성하게 하는 오래된 미래인 것이다.

 

쭈글쭈글해진 엄마 가슴에도 둥근 돌기가 돋아있습니다

 

고백처럼 꽃을 품었던 흔적이라 했습니다

 

꽃이 꽃다울 수 있는 건

 

곡진하게 품어주는 별이 어딘가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 꽃다운 이유마지막 부분

 

이 글의 앞에서도 시인에게 다가온 꽃은 단지 완상玩賞의 대상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 사시사철 피어있는 정신임을 이야기 한 바 있지만 세월 따라 쇠락해가는 어머니의 가슴의 둥근 돌기를 고백처럼 꽃을 품었던 흔적으로, 그리하여 꽃이 꽃다울 수 있음이 곡진하게 품어주는 별이 어딘가에 있다는 빛나는 예지로 빚어질 때 시인이 꿈꾸는 생명의 영원성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묵혀둔 말, 봄꿈,흔적,어머니의 낙, 거문도와 연계되면서 등장하는 어머니 시편은 시인의 일생에 있어서 마음속에 간직된,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교과서임에 틀림이 없다. 섬이 주는 자연의 안온함과 바다의 광대함 앞에서 시인은 절로 겸손을 배우고 작은 것에 귀 기울이고 그 작은 것에 기뻐하는 덕목을 배웠던 것은 아닐까?. 병이 깊었던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기억을 술회한 물수국,붉은 저녁의 슬픈 정조 情調는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뼈대가 아님을 생각해 볼 때, 시인이 일구어 온 자아는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지금까지그 섬을 떠나왔다를 살펴보면서 시인에게 있어서의 섬은 자연과 경쟁이 없는 두레의 공간이었으며, 섬을 떠난다는 것은 자연과 공동체 삶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집의 두 번째 얼개인 자아의 탐색에는 보다 넓고 큰 세상에서의 세세한 부딪힘이라든가 새로운 인간관계, 즉 결혼으로 비롯되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 여성성에 대한 의식의 확장이나 발화 같은 일상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시인이 넌지시 이야기 하고 싶은, 자신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조용히 읊조리는 시가 있으니 다소 긴 느낌은 있으나 어떤 선물 전문을 읽어 보기로 한다.

1

 

사는 일이 서툴러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못하는 이가 있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한 채

슬쩍 묻어가기만 하는 여자

 

생의 선물 같은 밤을 맞았네

 

말하자면

난생처음 맞이한 듯

새소리 풍경소리에도 귀를 열고

비밀스런 속말이라도 들은 듯

고요를 들뜨게 하는 깊은 밤이었네

 

눈 내렸으면 좋겠다며 시 읊듯이 말하자

봄날 다시 닿자 노래하듯 대답했네

 

살아가는 일도

한편의 시처럼 살고 싶다는 여자

꿈같은 밤을 보냈네

 

2

 

선물처럼 눈 나린다며

새벽공기 훅 몰고 오는 이도 있네

 

고요를 더듬으며

꿈결인 듯 홀린 듯 뛰어 들었네

 

구체어로

홑옷만 걸친 채

석등 앞에 서며

두 팔 흔들어 적요를 깨우는데

마법처럼 비행운이 펼쳐지는 것이었네

 

두 볼 빨개지도록

점점이 나린 꽃눈개비 환하도록 맞고도

추운 줄 몰랐다네

 

시처럼 살아가는 그녀

한편의 시를 쓰는 날이었네

 

3

 

이보다 눈부신 날을 누린 적 없다던 이도 있네

 

인생 최고의 봄날 같다며

처음 맞이한 아침인 듯 합장을 했네

 

오층석탑 돌며 어깨 둥글게 하고

징검다리 건너며 공손하게 허리 굽히고

길을 그리며 오른 산신각에 서서 한결 같이 합장을 했네

 

뿌옇게 서린 안경 뒤로

붉어진 눈 감추고 환하게 웃음 짓는

당신만의 화법이라 지나봐야 알 수 있네

 

살아가는 일도 시처럼

시도 살아가는 일과 같은 이

 

당신 통점을 들여다보는 일처럼 고요가 밟히는 날이었네

 

 

이 시집에는 몇 편의 여행시가 있다. 하루의 여행을 다룬 시들은 이 시집의 1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글의 마지막에 다룰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마곡사 도량에 누워,마곡사 범종 소리,,적막에 스미다등의 시편은 적어도 하루 이상 체류하며 얻어낸, 시인의 내밀한 심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들로서 그 중에서도 어떤 선물은 섬을 떠나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세상살이를 축약한 시로 주목할 수 있겠다. 독립된 세 편의 시를 하나로 묶은 어떤 선물은 일상에서 탈출(?)한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사는 일이 서툴러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 싫은 1, 주어진 현실에 교감하며 구체어로 / 홑옷만 걸친 채 / 석등 앞에 서며 / 두 팔 흔들어 적요를 깨우는감응 感應 충만의 2, 꿈이 현실로 다가올 때 감사와 감격을 누릴 줄 아는 3, 이 세 명이 마곡사의 적요한 시공간에서의 반응을 관찰한 내용이다. 짐작하건데,‘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한 채 / 슬쩍 묻어가기만 하는 여자인 시인은 23의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며 범사 凡事에 뜨겁게 몰입하고 감사하며 그 범사를 생의 선물로 받아낼 줄 알아야 한다는 자각을 얻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꿈꾸는 삶은 굴곡 없고 평탄한 삶일 것인데, 그 상식적인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의미와 개인의 정체성을 잃게 만드는 권태에 빠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그 누구의 무엇이 아닌 오로지 나인 나더 나아가서 그 누구에게도 당당한 개방된 자아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각은 시인뿐 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4.

 

그 누구에게도 당당한 개방된 자아 Open-self’는 다른 말로 한다면 서정抒情, 즉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다루는 자아 自我이다. 개인의 서사 敍事는 아무리 미세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나비가 일으키는 폭풍처럼 역사를 끌고 가는 무언의 힘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 섬을 떠나왔다1 부는 우연인 듯 마주친 역사의 현장에서 개인의 서사가 공동체의 아픔으로 확장되어가는 의식의 전환을 세밀한 서정으로 묘파한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해 봄날 시인은 매향리에 도착했다. 정확히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매향리 앞 바다 농섬을 향하여 슬그머니 미국의 전투기들이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개펄과 바다에서 삶을 꾸려가던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는 기총소사와 폭탄의 굉음에 가슴앓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급기야 1968년에는 매향리 논과 밭이 강제수용 되고 삼십 년이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다시 주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수십 년 동안 수목이 우거졌던 농섬은 몸의 반을 잃어버린 만신창이로 힘없는 나라의 슬픔을 보여주고 만 것이다. 시인은 이 먹먹한 현장의 충격을 매향리의 봄으로 술회하고 있다.

 

 

꽃걸음 걷고 싶은 날 매향리 간다

 

녹슨 세월 진술처럼 쟁여둔 곳

오랜 시름 아랑곳 않고

수굿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풀꽃들

지천으로 피었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

 

굶주린 새떼처럼 맹목으로 날아오던 포탄 아래

잊지 말라고, 잊지 말자고

즐비하게 꽃차례 올리는 꽃마리

 

부대낌의 흔적 무더기무더기 쌓여있어도

민들레 결연히 꽃대궁 올리고

예사롭지 않은 뽀리뱅이 꽃물 밀어 올리느라 한창이다

 

운동장에선 아이들 뛰노는 소리 종달새처럼 날아오르고

꽃마리 민들레 지고 나면 찔레꽃 피고

잇따라 갯메꽃 해당화 피겠다

 

엄밀히 말해서 매향리와 농섬이 지니고 있는 리얼리티를 구현한 시로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는 말이거나매향리 꽃말을 쓰다를 추천해야 마땅하다. 보기에 따라서 이 세 편의 시는 하나의 연작시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도 그 때가 좋았다는 말이 미군 사격장으로 징발되면서 무너져버린 농어민의 피폐한 삶을 고발했다면 매향리 꽃말을 쓰다이 세상 마지막 날인 것처럼 포탄 쏟아져도 / 꽃들은 피어나는 생명의 복원력을 노래했다. 그에 비해 매향리의 봄은 힘없는 자의 아픔과 슬픔도 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복원력과 꽃마리 민들레 지고 나면 찔레꽃 피고 / 잇따라 갯메꽃 해당화 피겠다는 끈질긴 희망의 메시지를 체화하는 가편 佳篇으로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거문도와 농섬은 다 같이 외세에 의해 침탈당한 역사적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거문도가 시인에게는 아름다운 심성을 일깨워주고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섬이라면 농섬은 개인의 삶이 외세의 위력 앞에 어떻게 유린되어 버리는지, 무력할 수밖에 없는 한 개인이 맞서고 일으켜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각성하게 한다.그 섬을 떠나왔다는 이렇게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하여 공동체의 역사 歷史에 당도한 여정의 기록이다. 시로 표명된 시인이 걸어온 생애의 장면 장면은 극적이지도 않고 정갈한 수채화처럼 되비친다. 그러나 최경선 시에는 생명의 존엄에 대한 믿음과 그 생명의 존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희망이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새로운 시의 길을 열 것이라는 예감을 주는 시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콩꼬투리 튀는 소리

풀벌레 낙엽 밟는 소리

꽃 송아리 벙그는 소리

 

사운거리는 떨림

곳곳에서 들려오는데

 

아침 햇살 요요하게 펼쳐지자

 

토도독 톡톡

 

비로소 보이는 반짝거리는 물빛

 

참새 날아들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둥근 모서리

아니

세상의 가장자리에

오롯이 맺힌 저 통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다

 

참새 포로롱 날아가는 사이

흔들린다

 

생의 완성을 향해 날기를 꿈꾸었을까

 

전력을 다해

세상 중심으로 날아드는 소리

 

- 토도독 톡 톡전문

 

다시 언어의 불투명성과 싸우고 이 언어의 확장성에 기대를 걸면서 분투를 거듭해야 하는시인의 책무를 상기想起해 본다. 시인은 언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를 뒤집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존재이다.그 섬을 떠나 왔다에도 투명한 이미지를 구현한 좋은 작품이 많다. 그 중에서도 최경선 시인이 앞으로 새로운 시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시토도독 톡 톡은 의미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생명의 환희라고나 할까, 이와 같이 만물동근 萬物同根의 원융 圓融을 리드미컬하게, 속도감 있게 그려낼 수 있다면 그 섬을 떠나왔다이후의 시인의 행보는 더욱 유장할 것임이 확실하다.

 

거듭 최경선 시인의 그 섬을 떠나왔다상재를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