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跋文>
농경農耕의 가계家系와 소외의 극복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한 권의 시집 詩集은 단순히 여러 편의 시를 묶은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 편의 시는 시인이 의도하는 주제와 그 주제를 이끌어내는 필법에 더 많은 눈길이 간다면, 시집은 각각의 시편詩篇이 구축한 - 그것이 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 삶의 뼈가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 뼈는 시인의 본질적 삶의 태도이면서 삶을 지탱하는 시인 나름의 예지叡智이고 구도求道 의 길이기도 하다. 또한 그 뼈는 감출 수도 없고, 장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의 삶은 생로병사 生老病死와 희로애락 喜怒哀樂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굴레가 주는 고통과 안타까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그 극복과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시의 위의 威儀일 것이다. 그러나 시의 위의를 너무 높이 세우려 하다보면 삶을 지탱하는 뼈(정신)가 사라진 채 생경하고 난해한 말놀이에 치우치는 경우를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최양순 시인의 첫 시집인『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는 어떠한가? 무언가 새롭고 왠지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야 될 것 같다고 시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마음을 거두어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집『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의 시편들은 현란한 말놀이도, 그 누구도 가닿지 못한 예지의 경지도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꾸로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평범한 일상사가 펼쳐진 이 시집을 더듬어 가다보면 그 평범 속에 깃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슬픔과 희로애락 喜怒哀樂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애이불상哀而不傷의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대교약졸 大巧若拙의 올곧은 삶의 뼈를 보여주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교약졸은 대체 무엇인가? 대교약졸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제 45장에 나오는 구절로서, 진실로 재주가 많은 사람은 으스댐이 없어 오히려 보잘 것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말에 절실함이 없이 부리는 허울은 졸렬함만 못하다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말과 짝을 이루는 구절이 대변약눌大辯若訥인데 이 또한 진실한 말은 과다한 수식이 없어 그 뜻이 어눌해 보인다는 것이다. 최양순 시인은 이렇게 대교약졸과 대변약눌의 정조情調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소소한 일상 풍경 속에 숨어 있는 삶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수 없는 존재의 필수조건임을 음각 陰刻하는 시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양순 시인이 바라보는 삶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시인이 음각한 시간은 또 어디서 숨 쉬고 있을까?
2.
시집『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다. 최양순 시인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가족애家族愛는 자연스럽게 농경農耕 사회가 지니고 있는 공동체 의식이 몸에 배인 한 몸 그 자체이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옛적 농경은 온 가족이 자신이 맡은, 할 일을 해야만 근근이 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 아무리 어려도 아침 학교에 가기 전에 꼴을 베는 일이 마땅했었고 모내기나 추수를 할 때에는 의례적으로 온 마을 두레가 행해지는 일상이었다. 세상을 떠난 마을 어른은 꽃상여를 따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뒷 동산에 다시 살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는 둥글고 둥근 마음이 적어도 5060 세대의 기억 속에는 또렷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에 등장하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 등등의 혈연들은 산업화 이전 시대의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중 한 편을 살펴보자.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남기신
마음 한 자락
어느 날엔가
지붕 키를 훌쩍 넘는
나무를 어루만지며
이다음에
이놈이 효자 노릇 할겨
당신 쌈짓돈은 챙겨 줄 거요
내 먼저 갈 테니
당신은 좋은 세상 더 많이 보고 오소
하고 가신 지 십 수 년
가을날 뒤란에 노란 잎이
지천으로 깔리면
등 굽은 어머니
홀로 은행을 줍는다
영감님이 주고 가신
쌈짓돈을 챙긴다
- 「흔적」 전문
농경農耕 문화의 특징은 노동집약적 협동과 자연에 대한 순응, 그리고 기다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이 계절을 가리지 않는 속성재배 기술이 없던 시절에는 때에 맞춰 씨 뿌리고 열매를 맺기까지 비 내리고,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 부는 하루하루의 날씨가 수확을 거둘 때까지의 경건한 기다림이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위의 시는 부부의 애틋한 정을 회고하는 시로 읽는 것이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가 함의하고 있는 속 깊은 기다림의 정서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선물은 없지만 먼 훗날을 기약하며 무심한 듯 내뱉는 ‘당신 쌈짓돈은 챙겨 줄 거요’, ‘내 먼저 갈 테니 / 당신은 좋은 세상 더 많이 보고 오소’가 주는 울림은 앞 서 말한 대변약눌大辯若訥 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눈앞에 놓여진 이익에 연연해하는 세태에 빗대어 먼 훗날에 다가올 기쁨의 충만을 별 것 아닌 것 같은 정황으로 툭툭 던져놓는 최양순 시인의 어법은 시집 곳곳에서 우리가 곱씹어보아야 할 느림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편의 시를 더 읽어보자.
미동도 하지 않는 괘종시계가
거실 벽을 차지하고 보물 노릇을 하고 있다
구순을 바라보는 아버지 네 살 적에
쌀 두 가마니 값으로 집에 들어온 귀한 물건이란다
태엽을 감아주면 지금도 충실하게
재깍 재깍 폼나게 움직이지만
시간마다 치는 종소리에 소스라쳐
침묵을 종용하고 말았다
바늘은 언제나 한곳에 머물러 있지만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해하시니
가보임에 분명하다
무용지물 가보는 시도 때도 없이
6시를 가리킨다
조금 이른 아침인 듯
조금 이른 저녁인 듯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마음이
그 자리를 가리키고 서 있다
- 「 무용지물 가보론」전문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시계는 값나가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드문드문 손목에 시계를 찬 사람에게 지금 몇 시냐고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고 역 광장쯤에 가야만 높은 탑처럼 솟은 시계탑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던 것이다. 코리안 타임이라는, ‘한국 사람들은 시간 약속을 잘 안 지킨다’는 비아냥거림도 그런 상황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그 옛날 괘종시계를 집에 들여 놓는 일은 경사 慶事에 다름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괘종시계는 백 년이 지나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화자 話者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들여놓은 그 괘종시계가 쓸모가 없어졌음에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추억은 길 없는 길을 지나 현재의 나를 각성 覺醒하게 하는 힘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
여기에 덧붙여 주목할 것은 ‘무용지물 가보는 시도 때도 없이 / 6시를 가리킨다 / 조금 이른 아침인 듯 / 조금 이른 저녁인 듯’에 드러난 6시라는 시각 時刻이다. 하루의 일이 시작되고 하루의 일이 끝나는 시각이 6시라면 ‘조금 이른’ 이라는 언명은 일(노동)에 대한 인간 일반의 보편적 의식을 살펴보게 한다. 모든 생명체는 일출과 일몰의 매커니즘에 맞춰져 있다. 해가 뜨는 시각에 일어나서 해가 지는 시각에 일을 마치는 일상에서 조금 이른 아침은 노동에 지친 몸을 일으켜야 하는 안타까움, 조금 이른 저녁은 일을 서둘러 마치고 싶은 아쉬움이 드러나는 때이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잠자고 싶을 때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우리의 삶은 그 시간에 얽매이고 그 시간에 쫓겨 간다. 변화와 때에 맞춰 일을 하는 것을 시중 時中이라 하는데, 유한한 우리의 삶은 늘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다.
최양순 시인은 농촌에서 태어나 절기에 맞춰 행해지는 농삿일에서 ‘수박 엉덩이에 의자 하나쯤은 밀어넣어주는 / 농사꾼 인심’(「시를 읽다」), 배롱나무꽃이 필 때 ‘머지않아 햅쌀밥을 먹겠구나’(「백일동안 붉다」)하는 아버지의 말씀에서 시중의 의미를 저절로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될 때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열매를 기다릴 줄 아는 이러한 심성은 꼭 최양순 시인에서만 발현되는 미덕은 아니다. 수 천 년 동안 농자천하지대본 農者天下之大本 사회의 유전인자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다른 면에서 살펴보자면 마을이라는 혈족 중심의 공간에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온 농경족 農耕族 의 공동체 의식은 어머니로 상징되는 인내와 희생의 덕목으로 오래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시인들이 어머니에 대한 흠모의 시를 쓰고 있으며 『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에도 어머니를 회고하는 시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가난 속에 자식을 위해 끼니를 거르는 눈물겨움을 그린 시(「별미」참조), 뜯어온 나물을 다듬느라 검게 물든 손톱을 보며‘양말 몇 쪽 주무르면 금세 없어진다’(「다시, 봄」)고 에둘러 말하거나, ‘줄 게 있으면 그게 복이라 말씀 ’(「어머니의 비상금」)하는 나눔의 미덕을 터득한 어머니를 향한 추모를 거두지 않는다.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너른 마음은 우리의 삶에 영원한 자양분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농경사회의 기반이 되는 공동체 의식과 보상을 바라지 않는 스테르고(헌신)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의 외연을 이타적 利他的세계를 향하여 넓혀가는 중요한 기제가 될 것이다.
고향의 의미는 어머니로 완성되는 문장입니다.
- 「고향, 그 의미」마지막 부분
3.
‘고향이 곧 어머니로 완성되는 문장’이라는 시인의 언명은 불길한 현 시대를 향한 경고이며 간곡한 권유라고 할 수 있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농경사회에서 후기산업화 사회로, 급기야 디지털 과학이 일구어 낸 익명匿名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소외의 그늘에 덮혀버린 형국에 놓이게 되었다. 일찍이 농경사회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무한경쟁과 물신物神에 사로잡힌 풍요에의 욕망은 고향을 잃어버리거나 아예 고향을 갖지 못하는 이른바 소외疎外의 문제를 던져주었다. 막스 K.Marx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인류의 역사는 자연이 주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은 소외, 소위 갑과 을로 통칭되는 인간 간의 소외, 마지막으로 인간이 만든 -이를테면 고가의 자동차 등과 같은 명품-물건을 소유하지 못하는데서 야기되는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농경사회로부터 벗어난 오늘의 삶도 이 모든 소외의 그늘 속에 갇혀 있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없으며, 가족, 또는 그 이상의 공동체로부터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소도 蘇塗도 사라진 익명에 놓인 유목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단내나도록 술을 마시면
안주 삼아 부르던 아버지의 노래가
왜,
언제나
이 풍진 세상으로 시작되는 희망가였는지를
- 「비로소」 4연
시인은 직장으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고 돌아오는 날, 이 세상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풍진 세상임을 새삼 깨닫는다. 오래 살아온 옆지기와도 ‘담벼락처럼 / 돌아누운 등이 서늘하다 / 밀어내는 극과 극 사이 / 바위보다 무거운 침묵이 흥건’(「태산을 허물다」)한 상황을 맞기도 하고, 미쳐서 교회 담벼락에 며칠씩 기대 앉아 있다가 쫓겨가는 광녀狂女를 보며 ‘일요일이 지나고 난 / 그 자리엔 화분이 빼곡하다/ ...중략 .../ 오늘도 교회 앞에선 /돌아갈 집이 있는 이웃들에게 / 살가운 인사로 전도’중인 (「실종」) 웃지 못할 아이러니를 목도하기도 한다. 부분의 현상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오류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시인이 바라보는 그 현장이 엄연한 사실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른 척 지나쳐버리는 아픔 없는 슬픔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급기야 전봇대에 붙은 ‘사람을 찾습니다’와 강아지를 찾습니다‘ 전단 사이에서 길을 잃고 만다. 즉 가족 간의 불통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소외에까지 시선이 닿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가족의 해체로 일컬어지는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소외의 극점을 향해 달려가는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시「찾습니다」는「실종」과는 또 다른 지경의 소외를 제시한다. 한 때는 아내였고 지어미였을, 치매 노파를 찾는 전단 한 장과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는 석 장의 사진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산사처마 밑,
속 비우고 이름만 부풀린 목어처럼
죄다 덜어내고 헐거워진 칠팔십 년의
세월마저 놓아버린
가억의 숨바꼭질
저렇게 종이 한 장의 여백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동안
강아지는 누군가의 온기에 젖어서 졸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치매 노파의 서성거림은
어느 인연으로 멈추게 될지
- 「찾습니다」2연
이 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의 와해와 이기적 개인주의의 팽배, 삶의 질이 사상된 허울에 불과한 고령화는 우리 모두를 외로움의 존재로, 스스로 소외 속에 유폐시키는 슬픔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또 다른 ‘나’를 찾고 있으면서 병들어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는 이유로 애완동물을 방기하고 가족들로부터 부양이나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눈을 감은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고 있음을 아프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4.
『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는 이와 같이 공동체 삶과 익명사회의 풍경을 겹쳐 보여주면서 끝내 버릴 수 없는 것이 휴머니티humanity 라는 건강한 해답을 풀어놓고 있다. 이는 최양순 시인이 품수하고 있는 천성과 농촌이라는 공동체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나눔의 아름다움을 믿고 실천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가기에 덧붙여 몇몇의 시에서 언뜻 보이는 바와 같이 최양순이라는 개인의 삶에 닥친 순탄하지 않은 굴곡을 견디고 극복해낸 의지의 결과라고 보는 것도 타당하리라고 본다. 앞에서 최양순 시의 서정이 애이불상 哀而不傷에 놓여있다고 평한 바 있음을 기억하자. 표제시인 「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도 그러한 시인이 겪은 신고辛苦를 드러내는 ‘당신’에게 보내는 고백이지만, 어떠한 원망이나 슬픔도 과도하지 않은 살얼음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렇듯 기쁨과 슬픔을 한 자리에 가지런히 앉혀놓고 기뻐도 기쁘지 않은 듯, 슬퍼도 슬프지 않은 듯 이야기 할 수 있는 근력이 드러난 가편으로「그 남자의 혼잣말」을 들 수가 있다. 어느 날 길가에서 마주 친 남자가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 거짓인지 아닌 지 알 수는 없지만 – 이 천 원을 달라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의 운세에
오늘 횡재수가 있다면 맞게 해주자
가슴 찌르르한 한 병의 소주가 되든
집으로 가는 차비가 되든
쓰임새는 상관 말자
두 장의 지폐를 건네받은
그의 작은 속삭임
“다행이다”
늦여름 매미의 울음처럼 귀를 잡는다
...중략 ...
그가 흘린 독백이
아리고 뜨거운 화석이 된다
다행이라는 그 말
- 「그 남자의 혼잣말」부분
이 시의 화자(시인)가 이 천 원을 건네 준 일이 선행 善行임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에게 이런저런 판단을 하지 않고 날 것의 마음을 내어주고, 그 돈을 받은 이가 내뱉은 “다행이다”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곤고하고 사나운 날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것인가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어서 자신의 생일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어머니로 새로 태어난 날이기에 미역국을 함께 드셔야 한다는 생각(「생일」), 그래서 시인은 결코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지 않는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리하여「개다리소반」은 누구에게나 자애로운 모성을 지닌 시인의 인생관을 집약한 시로서『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의 마지막 시편으로 읽기를 권한다. 최양순 시인의 시들은 음절 단위로 가만가만 읊조리며 읽어나갈 때 그 맛이 살아나는 것인데 우리가 잊어버렸던, 잃어버렸던 가족의 따스함을 일깨워주는 어머니의 마음을 서로 서로 선물로 나누어주는 것은 또 얼마나 기쁜 일인가!
타원형 식탁을 사이에 두고
식구 수 대로 의자가 마주보고 있다
함께 자리를 채운 적 없이
각자의 시간에 맞춰 앉고 일어나는 것이
때맞춰 오고 가는 이가 잠깐 몸 부려 놓는
터미널의 휴게실 의자처럼
머무름이 짧다
엉덩이만 들이밀면 한자리가 만들어지던 밥상이
식탁에게 밀려나면서
밥상머리교육도 읽지 않는 경전이 되었다
물살 따라 흐르듯
바쁜 세상에
손사래 한번 쳐보지 못하고 휘말린 탓이다
마냥, 게으름으로 사치 부리는
해 다 간 휴일
개다리소반을 놓고
때 없는 떡국을 차린다
다섯 개의 숟가락, 다섯 쌍의 젓가락
다섯 개의 떡국 대접을 놓고
어깨를 부딪치며 저녁을 먹는다
모처럼, 우리 식구라는 말이 제 구실을 한다
그득하다
- 「개다리소반」 전문
5.
이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몇 편의 시가 있다.「기다림이라 말하지 않는다」,「 문에 걸린 풍경소리」,「붉은 노을」 등의 시들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흐르는 강물도 담이 든다』이후의 최양순 시인이 걸어가야 서정시의 영역에 첫 걸음을 내딛는 시편이다. 초현실적이고 전위적인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다시 서정抒情을 이야기하는 것이 고루해 보일지 몰라도 시는 서정을 포기할 수 없다, 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은 영상매체가 이루어낸 재현 再現의 효율을 따라갈 수 없겠지만, 결국 시는 서정 抒情의 세계로 돌아가서 이 세계가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지를 증명하는데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양순 시인이 지니고 있는 섬세한 휴머니티를 바탕으로 서정시는 우리 시단에 새로운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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