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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3. 23. 11:09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가 문득 떠오른 것은 ‘거리 두기’라는 이 즈음의 우리 모두에게 들린 화두 때문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명의 기본 원리를 다시 생각하게 된 거죠.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는 그러나 그런 생명의 기본 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독특한 나무이지요. 남다른 특징을 갖추게 된 건 무엇보다 사람의 개입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는 지금처럼 수려한 모습으로 살아남기 어려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지난 해 12월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특별한 탱자나무 ○

  일단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는 한눈에 보아도 무척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흔히 생울타리로 심어 키우는 탱자나무와 달리 이 나무는 문경의 명문가인 장수황씨 가문의 종택 마당 한가운데에 의젓한 정원수로 자랐습니다. 특별한 경우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나무는 지난 12월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나무입니다. 지난 2018년 가을에 우리 《솔숲닷컴》에서 예천으로 떠난 ‘가을 나무 답사’ 때에 바로 이 나무 근처를 지나면서, 버스 안에서 제가 이 나무의 내력과 위용을 말씀드리기도 했던 나무입니다. 시간이 넉넉지 않아 나무를 직접 찾아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요.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난 해 말에 《나무편지》에서 상세히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새로 낸 책 《나무를 심은 사람들》을 소개할 때 한 문장으로 천연기념물에 지정됐다는 말씀만 전해드렸습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는 바로 위의 사진에서 확인하실 수 있듯,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두 그루입니다. 두 그루가 바투 붙어서 자라면서 마치 한 그루의 매우 커다랗고 아름다운 나무의 형상으로 자랐습니다. 식물의 세계에서는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 사람의 보살핌으로 바투 붙어서 오히려 융융하게 자라나 ○

  나무의 속내를 알 수야 없지만, 필경 두 그루의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는 지난 4백 여 년 동안 가까이 붙어서 자라는 게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나무는 서로의 삶을 훼방하지 않으며 잘 자랐습니다. 동쪽의 나무는 상대 나무가 서 있는 서쪽으로 가지를 펼치지 않았고, 반대쪽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가운데에 서로 맞닿는 부분에서는 옆으로 펼칠 나뭇가지를 위로 높이 솟구쳐 올렸습니다. 사방으로 가지를 펼치는 여느 탱자나무에 비해 키가 훌쩍 커질 수밖에요. 뿐만 아니라, 반대편의 가지 역시 매우 멀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두 그루의 탱자나무는 그렇게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탱자나무가 되었고, 마침내 천연기념물의 지위에 오르게 됐습니다.

  사람의 개입, 보살핌에 따라 자라난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무들 사이에는 모두 일정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나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는 거리가 필요합니다. 지난 25만 년 사이에 14억 명이라는 폭발적인 개체 수의 증가를 보인 호모사피엔스에게는 그러나 이 거리가 잘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이른 아침 만원버스와 지하철의 출근길이 그렇고, 다닥다닥 붙어서 생활하는 회사 생활이 그러하며, 퇴근하여 찾는 문화 공간이나 생활 공간 역시 그러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앞에 놓인 ‘거리 두기’가 모두에게 불편한 게 사실이지만, 우리의 생활 환경을 한번 돌아보고, 지금 이 시기를 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

  지난 주의 신문 칼럼은 그런 내용으로 채웠습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탱자나무〉를 생각하며 지금 이 불편함을 더 평안하고 건강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으로 삼자는 이야기이지요. 칼럼을 마무리하면서는 지난 주 《나무편지》에서 소개했던 책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의 결론 부분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바로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화두였습니다.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에 이어 데이비드 쾀먼의 다른 책 《진화의 열쇠》도 참 흥미롭게 읽어가는 중입니다. 역시 6백 쪽 가까이 되는 묵직한 책이지만, 흥미진진합니다. 어서 이 책을 마저 읽고……. 그리고나서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나무 찾아서 길 위에 나서겠습니다. 대학도 이제 비대면수업을 마치고 함께 만나야 할 시간이 곧 다가오니까요.

  오늘 《나무편지》의 사진은 2018년 10월, 〈문경 장수황씨종택 탱자나무〉의 사진입니다. 맨 아래 한 장의 사진은 장수황씨종택 바로 건너편 길가에 서 있는 느티나무(보호수)입니다.

  고맙습니다.

- 더불어 사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며 3월 23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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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