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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11. 30. 15:00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언어는 존재하는 것들을 대신하는 기호이거나 있어야 할 것을 불러내는 주술의 수단이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사람들 간에 의사소통을 하고 욕망을 대신하거나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면서도 또 이 두 가지가 아닌 경우가 있다. 바로 시적 언어이다. 많은 경우 시의 언어는 없거나 없어지는 것들을 기록하고 환기하는 헛되고 불필요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 허망한 노력이 사람들 간의 상투적 소통을 막아 욕망에 복무하는 유용성의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하여 언어가 가진 물질적 순수성을 회복한다. 다시 말해 언어는 없는 것들을 말할 때 그 언어 그 자체의 본성을 되찾는다고 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존재이고 시는 이것을 끝없이 일깨우는 언어적 실험이다.

여기 실린 나호열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 없는 것들에 대한 애잔한 조사이다. 자본주의 시대 없는 것은 쓸모없는 것과 동격이다. 그것은 존재해도 가격이 없고 가격이 없기에 교환가치가 없고 교환가치가 없기에 누구도 소유할 필요가 없는 그래서 있어도 없는 것이 된다.

 

 

너는 감자꽃이야

옆구리를 휘익 스치며 지나간

그 말

오십 년 뒤에 뜻을 알아듣는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은밀히 땅속을 더듬던 손이

바람난 머리채 쥐어뜯듯이

내던져 버린 감자꽃

나도 감자꽃처럼 살았다는 걸

뿔 대신

흰 머리칼 수그려 오르는 나이에

꽃말을 배운다

- 「감자꽃」 전문

 


감자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이다. 감자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번식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상용으로도 번식용으로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쓸모없는 존재 뿔과는 다르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줄기 끝에 피어 오른 감자꽃은 싸움과 거부의 상징인 뿔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의 표현이다. 시인은 바로 그 경지를 머리에 하얗게 감자꽃이 핀 나이가 되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없어도 되는 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이제 알아볼 눈이 생긴 것이다.

다음 시는 바로 이 늙음과 낡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다.

 

 

볼록한 배불때기 등 뒤로 감춘

티브이가 눈을 감았네

전기충격을 심장에 꽂아 넣어도

쿨룩거리는 신음만 흘러나오네

그의 이름은 골드 스타

다른 말로 하면 고 올드 스타

올드는 늙음 아니면 낡음

늙거나 낡아야 별이 된다고

쓰레기도

재활용 용품도 아닌

별이 된다고

밤하늘엔 그리운 사람

그리도 보이지 않네

- 「골드 스타」 전문

 

아주 오래된 국산 금성 텔레비전을 보고 쓴 작품이다. 이미 그 이름의 상표마저 사라진 제품은 낡은 것의 상징이 되었다. 그렇다고 명품의 반열에 낄 정도의 제품이 아니므로 늙고 병들어 사라지고 잊혀 져야 할 존재들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인은 바로 그 제품에 쓰여 있는 상표명의 어설픈 영어 직역인 골드스타를 보고 사라져야 할 낡은 것의 운명을 감지하면서 그것을 “고 올드 스타”로 번역해서 읽고 있다. 시인의 눈과 언어 감각이 빛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게 읽고 보니 재활용할 수도 없는 필요 없는 존재들이 결국은 별이 된다는 아름다운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마저 사라지는 그 소멸의 순간을 생각하며 시인은 슬퍼하고 있다. 이 절대적인 소멸의 순간을 보며 느끼는 슬픔은 단순한 욕망의 좌절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라 허무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찾은 보석 같은 슬픔이라 할 수 있겠다.

다음 시는 간결하지만 기막힌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멍멍

멍멍멍



한 단어로

희로애락을 드러내는

이 기막힌 은유를

그냥 개소리로  듣는다면

얼마나슬픈 일이냐

아무리 울어대도 울림을 주지 못하는

개소리



- 「개소리」 전문

 

이 시에서 개 짖는 소리 “멍”은 의성어이기도 하고 의태어이기도 하면서 인간들의 언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멍’이라는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은 이렇게 해서 풍부한 의미의 복합체가 되고 이 짧은 시구는 삶의 깊은 허무의 의미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게송이 된다. 희로애락이라는 욕망의 표현으로서의 모든 언어는 개가 자신의 욕구를 위해 짖는 멍멍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짖는 개나 사람에게도 모두 슬픈 일이다. 결국 그것은 욕망의 좌절을 표현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것을 의태어 멍으로 바꾸는 마술을 보여준다. 그 순간 세계는 고요 속에 들어가고 욕망은 잠재워지고 우리는 무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나호열 시인의 시는 바로 이 상태를 지향하여 언어의 순수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없어지는 것의 가장 확실하고 극적인 방식인 죽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 죽음을 통해 없는 것과 사라지는 것들의 세계를 돌아본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갑니다

어느 사람은 서쪽으로 흘러가는 강이냐 묻고

어느 사람은 죽어서 날아가는 먼 서쪽하늘을 그리워합디다만

서천은 애둘러 굽이굽이 마음 적시고

꿈을 입힌 비단강이

어머니의 품속 같은 바다로 잦아드는 곳

느리게 닿던 역은 멀리 사라지고

역 앞 허름한 여인숙 어린 종씨는

어디서 늙고 있는지

누구에게 닿아도 내력을 묻지 않는 바람이 되어

혼자 울다가 옵니다

- 「바람과 놀다」 전문

 

시인이 고향에 가는 이유는 아직 남아있는 그리운 것들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죽은 사람들”도 그렇고 사라지고 없는 “느리게 닿던 역”도 그렇고 “허름한 여인숙”도 그렇다. 사라졌다는 것은 지금의 나의 삶과 관련을 끊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 이미 쓸모는 상실되고 나의 욕망의 대상이 아닌 것이 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지금의 내 삶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순수함의 세계를 일깨운다. 이 시의 시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없는 것들을 떠올릴 때 시인은 스스로 바람이 된다. 바람은 실체가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지만 바로 그래서 어디도 걸릴 데가 없는 자유로운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없는 것을 만나고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있어야 할 것, 없어서 안 될 것을 추구하면서 항상 욕망을 키우고 그것의 좌절로 고통과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언어는 이 욕망의 대리물이 되어 고통을 대신하거나 그것을 잠시 잊으려는 위안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언어는 상투화되고 왜곡되고 오염된다. 시는 그것으로부터 원래의 언어의 생생한 힘을 되찾는 일이다. 나호열 시인의 최근 작품들은 바로 없는 것들을 언어를 통해 되살림으로써 이 욕망으로 찌든 언어를 구하고 있다.

 

 

계간 『시에』2018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