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불구 (不具)의 시대를 걸어가는 목발의 기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8. 12. 27. 16:11

 

 

<해설>

 

불구 (不具)의 시대를 걸어가는 목발의 기록

강만수

 

 

시인은 고통을 즐기는 자이다. 화려한 기쁨보다는 보잘 것 없는 일에 가슴이 쓰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개별자로서의 존재를 물을 때 고독해지는 자이다. 이 말은 필자의 이야기인 동시에 시인 나호열이 평소에 흘리듯 던지는 혼잣소리이기도 하다. 그의 세계인식은 비관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낙관주의자로 부르는 것은 더 어색하다. 추측하건대 시인 나호열은 이 세상을 헛것, 또는 부조리가 판치는 요지경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허상과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가 취하는 방향은 허무와 냉소이며, 따라서 그의 시 쓰기는 이러한 난국으로부터의 탈출 아니면 해방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 좀 더 세련되게 말한다면 꿈과 희망을 향해가는 몸짓이 시인이 보여주어야 할 임무이며 시인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십 년 가까운 그의 시 쓰기는 고통의 극복이 아니라 고통을 기록하는 일과 희망의 완성이 아니라 희망을 향해가는 좌절의 기쁨을 노래하는데 바쳐졌다고 나는 믿는다. 그의 시들은 과도한 실험도,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출도 없다. 오히려 탐미적이고 낭만적인 문체로 개별자로서의 인간의 슬픔을 노래하는데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와 같은 징조는 이번 신작 시편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바 이지만 이전에 발표한 「목발」 연작시를 유의해 보는 것이 나호열의 시세계를 일별하는 단초가 될 것이기에 한 편을 소개하기로 한다.

 

자유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배웠다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갈구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깨우쳤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말없이 행하는 사물들을 업신여기고 값어치를 치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의 속박과 결탁하면서

수인에게 던져주는 메마른 빵을 굶주림과 바꿨다

 

발목이 부러지고 나서

내게 온 새로운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

그런데 친구야

네가 나를 의지한다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너의 온 힘을 전해 준다는 것이지

언젠가 너에게 버려질 날이 오겠지만

그 날이 기쁜 날이지

그날까지 날 믿어야한다는 것이지

 

아, 절뚝거리는 속박과 함께

비틀거리는 목발

 

- 「목발․1」전문

 

목발은 말 그대로 발이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보장구(保障具) 이다. 무심하게, 당연하듯 두 발로 걷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목발을 짚는 순간부터 벌어지는 불편함이 없으면 느낄 수가 없다. “스스로 말없이 행하는 사물들을 업신여기고 값어치를 치루지 않았다”는 반성은 “속박과 결탁하면서/ 수인에게 던져주는 메마른 빵을 굶주림과 바꿀” 수밖에 없는 삶의 난국으로 빠져들기에, 목발로 상징되는 시대에 얹혀진 삶의 불구(不具)는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또 다른 「목발」 시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목발을 잡고 문을 당기려하자 매일 아침 자판기 커피 마시러오는 전동 휠체어가 쓰윽 문을 밀어준다 고마워라 뒤뚱거리며 걷는 등 뒤로 따스하게 들려오는 조심하세요 평생 땅 디뎌 본 적 없는 사람이 내미는 손이 꽃보다 아름다웠던 아침

 

- 「목발․5」전문

 

아마도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話者)는 불의의 사고로 목발을 짚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목발을 짚으면 비 오는 날 우산을 들 수도 없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도 힘들다. 그러나 평생 발로 땅을 디뎌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불편함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은 목발을 짚어 문을 열 수 없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고 조심하라고까지 한다. 시인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누가 더 불편하고 누가 더 행복한 것인지에 대한 정답이 없는 세상이다. 이념의 갈등과 빈부의 격차와 갑과 을이 - 사실 누가 갑이고 을인지, 갑과 을의 뜻이 ‘으뜸과 버금’이라는 공생 (共生)의 의미를 알고 떠드는 것인지 모르면서 - 으르렁거리는 이 난국에 대한 따뜻한 냉소를 이 시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면 행복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목발’로 상징되는 세상살이로부터 목발을 집어던지거나 놓게 되는 미래의 어느 시간이 존재의 소멸을 뜻하고 있음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토로하는 것이다.


오래된 꿈이

가끔 땅에 내려앉을 때

언뜻 사람이 되기도 한다

- 「목발 ․12」마지막 연

 

짧게 2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는 ‘내가 새가 된 이유’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나’라는 존재가 이미 새가 되었다는 것은 창공의 자유를 누리는 새가 아니라 속어로 ‘인간대접을 못 받는, 멍청한’의 자기 비하의 토로이다. 따라서 ‘나’라는 속박으로의 유폐를 상징하는 새의 하강이 ‘죽음’과 병치되는 동시에 ‘오래된 꿈’조차도 허상임을 깨달을 때 주체적 자아가 발현되는 순간 “언뜻 사람이 되”는 슬픔의 굴레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의 죽음을 동행할 수 없는 것이 고독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서로에게 목발이 되어야한다는 엄숙한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 그 엄숙한 명령은 의지의 발현도 아니고 고통의 극복도 아니다. 나호열의 시는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자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내면화하고 동행하자는 권유로 읽힌다. 그렇다, 나호열의 시의 키워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동행’이다. 이러한 나호열 시편의 일관성이 동행의 키워드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지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신발 속에 갇혀 냄새 스멀거리는 발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공손해지는 손

 

- 「목발 ․7」부분

 

허리도 굽고

다리 힘도 없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 꼭 잡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부끄러움도 없이

어색함도 없이

한 그루 꽃나무로 피었다

 

- 「목발 ․11」부분

 

구둔역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무엇이 된다

눈길 닿는 곳

허물어지고 낡아가는 그 무엇의 주인공이 되어

쿵쿵 가슴을 울리며 지나가던 청춘의 기차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누구의 구둔역인가

속말을 되내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 「구둔역에서」부분

 

저기 두부장수 트럭이 틀어놓은 확성기 속에서한 마리두 마리 날아오르는 뻐꾸기눈이 내린다

- 「겨울우화」부분

 

 

세심하게 읽지 않아도 나호열의 이번 신작시에 등장하는 이야기꾼은 하나가 아니라 짝을 이루어야 비로소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목발․ 7」의 손과 발, 「목발 ․11」의 나들이 가는 두 노인네, 「겨울우화」의 어미 뻐꾸기와 두부장수,「구둔역에서」의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들 모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개별자이면서 공통적인 속성을 지닌 서로에게 보합되어야만 하나가 되는 중첩된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다 보면 굳이 아직 시인이라고 불려지기를 거부하는 시인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말하자면 어느 시인이나 그러하듯이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들은 숨겨지거나 변용된 시인 자신이다. 한 예로 앞에서 인용한 「목발 ․ 11」의 앞 부분을 상기해 본다,

 


한 사람은 부끄러워서

한 사람은 어색해서

평생 손 마주잡지 못했다

 

 

손잡는 것이 그 무엇이 어려운가? 그러나 노인이 될 때까지 그리 살다가 다리 힘이 빠지고 등이 굽어서야 손을 마주잡는다는 이야기는 그 속에 세상살이에 대한 시인의 부끄러움과 어색함에 평생을 보낸 시인 자신의 안타까움이 응축되었다는 비유로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호열은 ‘시인’을 ‘완성된 자아’ , ‘성인에 버금가는 깨달은 자’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들은 현상의 격렬한 해체나 독자를 향한 교훈의 전달이 아니라 끈질기게 삶에 도사린 고통을 학습하는 모습을 드러내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쓴다는 그의 언명은 그래서 값지다. 그의 시편들은 어쩌면 일상의 지루한 복기(復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시가 값지다는 것은 현란한 수사(修辭)나 거대한 담론에의 유혹에서 벗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눈길을 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담백한 여백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치열한 정신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침묵도 또 하나의 언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그의 시는 우리 시의 전범(典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만수

 

시인. 《현대시》 (1992), 《문예중앙》 (1996)을 통해 등단. 시집 『금붕어 입술』(2018), 『컷 피스』(2017)등 10여권, 《고려문화》 편집위원. 도서출판 《문장》 대표. 한국시문학상, 바움 문학상 수상.

 

 

<미당문학 2018년 겨울호 신작시: 나호열>

 

 

겨울우화

 

동지 서릿발이 하늘을 베이는데

여기서 뻑 저기서 꾹

뻐꾸기가 운다

남의 둥지 안에 알을 뉘여놓고

어미야 어미 여기 있어

름 지나면 새끼 데리고 가야하는데

북풍 몰아치는데

여기서 뻐꾹 저기서 뻐꾹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네



저기 두부장수 트럭이 틀어놓은

확성기 속에서

한 마리

두 마리 날아오르는 뻐꾸기


눈이 내린다

 

구둔역에서

 

 

어느 사람은 떠나고

어느 사람은 돌아오고

어느 사람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어느 사람은 끝끝내 잊혀지지 않고

저 홀로 기다림의 키를 세우고

저 홀로 그리움을 아로새기는

저 느티나무와 향나무

구둔역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무엇이 된다

눈길 닿는 곳

허물어지고 낡아가는 그 무엇의 주인공이 되어

쿵쿵 가슴을 울리며 지나가던 청춘의 기차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누구의 구둔역인가

속말을 되내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목발 ․ 7

 

 

온몸을 지탱하며 수고로운 걸음으로 땅을 딛던 발을 손이 씻기고 있다

굳은 살 박히고

신발 속에 갇혀 냄새 스멀거리는 발을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공손해지는 손

말발굽을 닮은 목발을 대야에 담굴 때

함부로 잊고 있었던 이 세상의 목발들이 떠오른다

가까이 다가왔으나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고독처럼

지금껏 보지 못했던 꽃이 눈물에 환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는 봄밤

 

 

목발 ․ 11

 

- 나들이

 

 

한 사람은 부끄러워서

한 사람은 어색해서

평생 손 마주잡지 못했다

오늘은 고샅길 지나

꽃구경 간다

날마다 지게 지고

소쿠리 이고

다니던 산길에

산수유도 피고

매화도 활짝 얼굴을 폈다

허리도 굽고

다리 힘도 없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 꼭 잡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부끄러움도 없이

어색함도 없이

한 그루 꽃나무로 피었다

 

 

목발 ․ 12

-내가 새가 된 이유

 

 

이제는 오래 걸을 수 없다고 했다

직립의 슬픔으로 남은 두 손은

앞발이 되기보다

날개가 되기를 원했다

 

 

오래된 꿈이

가끔 땅에 내려앉을 때

언뜻 사람이 되기도 한다

 

 


'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발 1 /이동훈  (0) 2020.03.04
숲으로 가는 길... 나호열  (0) 2020.01.07
없는 것 속에서 있는 것들  (0) 2018.11.30
못난   (0) 2018.07.26
아무개/ 최한나  (0) 2018.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