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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주년] [1] 마르틴 루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15. 23:52

 

중세 철옹성 무너뜨린 '멧돼지'… 서구 근대의 문을 열다

  • 비텐베르크(독일)=박경수 장로회신학대 교수·종교개혁사 전공

입력 : 2017.01.09 03:04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주년] [1] 마르틴 루터

독일은 지금 루터 재조명 물결… 기념 조각·학술회의·서적 잇따라
"구원, 善行 아닌 믿음으로 가능"
'오직 은총·믿음·성경' 강조하며 면죄부 반대… 95개조 반박문

비텐베르크(독일)=박경수 장로회신학대 교수·종교개혁사 전공
비텐베르크(독일)=박경수 장로회신학대 교수·종교개혁사 전공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일 때 원한 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라 신학 토론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도전은 유럽을 뒤흔들고, 북미 대륙을 삼키고 태평양 건너 아시아에까지 몰아닥친 거대한 물결의 시작이었다. 전통과 권위에 눌려 있던 중세를 무너뜨리고 서구 근대세계를 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주요 인물을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를 짚어본다.

독일 북동부 작은 도시 아이스레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태어난 곳이자 숨을 거둔 곳이다. 이 도시 광장 곳곳엔 'Luther, 2017, 500 JAHRE, REFORMATION'(루터, 2017, 종교개혁 500주년)이란 배너가 휘날리고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든 비텐베르크 시광장에는 지구 모양의 구형(球形) 조형물이 설치됐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세계에 미친 영향을 지구본 위에 표현한 것. 루터가 학창 시절을 보낸 아이제나흐, 제국의회에 불려갔던 보름스, 츠빙글리파와 논쟁을 벌인 마르부르크 등 루터의 발길이 닿은 곳곳엔 '루터'란 이름과 '500'이란 숫자로 덮였다. 서점엔 루터 종교개혁과 관련된 특별 부스를 마련해 올해 새롭게 개정한 루터성서를 비롯해 루터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하는 책들이 깔렸다. 심포지엄과 강연도 줄 이어 예정되어 있다. 500년 전 루터는 어떤 일을 했는가.

"멧돼지 한 마리가 주님의 포도밭(교회)을 짓밟고 있다."

1520년 로마가톨릭 레오 10세 교황은 '주여 일어나소서!'라는 제목의 교서를 통해 마르틴 루터를 멧돼지에 비유하며 파문을 예고했다. 루터는 그 교서를 불태워버렸다. 로마가톨릭으로 귀환할 마지막 다리를 스스로 불살라 버린 것이다. 루터는 이듬해 1월 파문됐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독일 비텐베르크의 시청 광장에 설치된 기념 조형물. 종교개혁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쪽은 기념행사를 알리는 팸플릿 표지. 루터 생전 절친한 화가였던 크라나흐는 여러 점의 루터 초상화를 남겼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독일 비텐베르크의 시청 광장에 설치된 기념 조형물. 종교개혁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쪽은 기념행사를 알리는 팸플릿 표지. 루터 생전 절친한 화가였던 크라나흐는 여러 점의 루터 초상화를 남겼다. /박경수 교수

 

루터는 원래 착실한 로마가톨릭 사제이자 수도자, 신학 교수였다. 아버지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다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입회했고,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그러나 성서를 연구할수록 가톨릭의 가르침에 의문이 생겼고, 결국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城) 교회당 문에 게시하게 된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었다.

루터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인간이 선한 행위나 로마가톨릭교회가 파는 '면죄부'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믿음을 통한 은총에 의한 칭의(稱義)'야말로 루터 사상의 핵심이다. 이것은 구원이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없고, 우리 밖에서 즉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코페르니쿠스적(的)인 방향 전환이었다.

이후 루터는 로마가톨릭 교회와 몇 차례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루터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1520년 종교개혁 사상을 담은 '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 3권의 팸플릿을 잇달아 출판하자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이 점차 커져갔다. 로마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파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를 압박했다. 루터를 정죄(定罪)하라는 것이었다. 1521년 4월 루터는 제국의회가 열리는 보름스로 소환돼 황제 앞에 섰다. 루터는 스스로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황제의 권력 앞에서도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이라고 고백했다. 루터는 교회뿐 아니라 제국으로부터도, 즉 성속(聖俗) 양쪽에서 버림받았다. 신 앞에 선 단독자 개인, 그리고 서구 근대 문명의 주체인 개인의 탄생을 알린 것이다.

아이스레벤, 비텐베르크 지도

다행히 루터를 지지하던 작센의 영주 프리드리히 덕분에 루터는 청소년기를 보냈던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이곳에 10개월 정도 머물면서 라틴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1522년 3월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에라스무스와 자유 의지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고, 농민혁명 지도자들과 개혁 방법을 둘러싸고 논박을 벌였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방식을 두고 다투기도 했다. 그러면서 루터교회의 전통과 신학을 형성하여 나갔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정문에는 95개조 반박문이 동판에 새겨져 있고, 첨탑에는 루터가 직접 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가 되신다'는 찬송가 가사가 새겨져 있다. 루터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오직 성서'의 정신을 호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