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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폐사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15. 22:57

강원 원주의 거돈사지 석축 위에서 1000년을 자란 느티나무. 삼국시대 말엽에 지어진 거대한 절집 거돈사의 흥망을 한 자리에서 다 지켜본 나무다. 이 나무는 뿌리 쪽의 둥치가 바위를 물고 있어 ‘돌을 먹는 나무’라고 불린다.


강원 원주는 늘 ‘전쟁의 땅’이었습니다. 학창시절 ‘군사도시’로 배웠던 이곳은, 그 이전부터 남한강의 물길을 놓고 삼국이 치열한 쟁패를 벌였던 땅입니다. 전쟁이 지나간 땅에는 승자의 환성보다 패자의 아픔이 더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전쟁이 지나간 뒤에도 세상에서 물러앉은 이들이 원주 땅을 지나가거나 머물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쯤인 조선 중기. 훗날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 궤에 걸터앉아 자폭했던 선비 김상용이 당파싸움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 원주 땅으로 향하면서 시를 한 수 남겼습니다. 마침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겨울이었던 모양입니다. “빙판길을 만나지 않으면 진흙 길이라 파리한 말이 쇠약하여 거꾸러지는 걸 또 붙들었네 하루 종일 다만 삼십 리를 갔으니 인간에 어느 곳이 통달한 거리인고.” 전쟁이 치열할수록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했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원주 땅에는 유독 흩어져 자취만 남은 절집들이 많습니다. 전쟁 때는 남한강의 물길을 따라 전투의 교두보로 활용했고, 전쟁 후에는 승자의 정당성과 안녕을 비는 역할을 했던 곳이었습니다. 원주의 흥법사지와 거돈사지, 법천사지가 바로 그런 곳들입니다. 그곳에서 번성했던 한때 영화와 함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원을 바라던 백성의 간절한 기원을 봅니다. 흩어져 버린 석물과 탑, 그리고 뒹구는 부재만 남긴 채 텅 빈 절집에서 1000년의 무상한 시간을 봅니다.

원주는 이긴 자들에게는 전략의 공간이었을 테지만, 정작 백성은 ‘진 자’들을 더 따스하게 안아줬던 곳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려 공양왕이 폐위된 뒤에 물러앉았던 곳도 원주였고, 무릎 꿇고 제 손으로 나라를 바쳐야 했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항복의 순간을 앞두고 머물렀던 곳도 여기 원주 땅입니다. 원주의 미륵산 바위에는 경순왕의 얼굴을 미륵으로 새겼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의 속수무책의 항복에서 원주의 백성은 비겁한 항복이 아니라, 처참한 살육의 전쟁 속에서 고통받는 백성을 생각하던 경순왕의 마지막 고뇌를 읽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고뇌가 56억7000만 년 후에 환생해 중생을 구원해 주는 미륵으로 새겨진 것이겠지요.


늦은 오후의 거돈사지의 모습. 텅 비워진 공간의 한복판에 삼층석탑이 서 있고, 그 뒤에 사찰의 중심이 되는 금당 자리가 있다. 금당 자리에 불좌로 쓰였음 직한 거대한 바위가 남아있다. 그 위에 불상이 놓였으면 이 층 혹은 삼 층의 웅장한 건물이었을 것이다.




# 꿈틀거리는 용 여덟 마리…흥법사지

시간은 분절되지 않는 법이다. 매듭 없이 시간은 흘러갈 따름이다. 어제와 오늘, 혹은 작년과 올해는 회고와 반성, 혹은 다짐과 계획 안에서만 구분되고 나뉜다. 신년의 이즈음에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서 건너온 폐사지를 찾아가는 마음이 그렇다. 전란 속에서도, 승전의 영광과 패전의 고통 속에서도 시간은 간다.

차곡차곡 쌓인 시간이 텅 빈 절터에 몇 기의 탑비와 석탑으로 남아 있는 곳. 강원 원주 땅에 남아 있는, 그 위로 1000년의 적막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폐사지를 찾아간다.

강원 원주에는 이름난 폐사지 세 곳이 있다. 폐사지란 ‘절집이 허물어져 흩어진 터’를 말한다. 흥법사지와 거돈사지, 그리고 법천사지. 없어진 절집이 몇 기의 석물만 남아서 이름을 전해 오고 있는 곳들이다. 이 세 곳의 절집은 모두 비슷한 시기인 삼국시대 말엽에 지어졌다. 어디가 먼저고 어디가 나중인지는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순서가 있다. 절집의 창건 기록은 없지만 석탑이나 비석 등은 세워진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 순서대로 동선을 짜야 한다. 이렇게 순서를 정하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석물의 새김과 절집의 배치가 어떻게 변해 갔는지를 하나하나 짚어볼 수 있다.

먼저 지정면 안창리의 흥법사지부터. 남한강과 만나기 직전의 섬강변 구릉 위에 남아 있는 흥법사 터는 사방이 경작지로 포위되다시피 했다. 국보 하나와 보물 세 점을 품고 있던 곳. 국보와 보물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간 뒤에도, 보물 두 점이 제자리에 당당하게 남아 있는데, 초라해도 이리 초라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흥법사는 고려 태조 왕건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절터에서 섬강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뾰족하게 솟은 산이 있다. 건등산이다. 왕건이 올랐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이 산에서 왕건이 진을 치고 견훤과의 전투를 지휘했다고 전해진다. 흥법사는 전쟁 당시 왕건의 병참기지이자, 백성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세력을 규합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고려 태조로 등극한 왕건은 당시의 흥법사에 왕사(왕의 스승)로 삼은 진공 대사를 내려보낸다. 왕이 스승으로 모시던, 나라 안의 최고 승려가 머물던 곳이었으니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겠다. 이 진공 대사가 입적한 뒤에 그를 기리는 탑비는 호화롭게 지어졌다. 진공 대사를 아꼈던 태조 왕건이 직접 탑비의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명필로 이름난 당 태종의 글씨를 뽑아서 새겼다.

흥법사지 빈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탑비다.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 머리와 받침인 거북 돌만 남아 있는데, 비석 머리에 입체적으로 새겨진 여덟 마리 용의 형상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낸다. 구름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꿈틀거리는 용에서 끓어오르는 힘과 기운이 느껴진다.

비석 머리와 받침돌은 남아 있는데 비석은 어디로 갔을까. 비석의 글씨는 후대의 선비들이 ‘기운이 형상을 삼켰으니 참으로 천하의 보배’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관동지와 전국지리지에 남아 있는 기록을 간추리면 이렇다. 비문의 글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후대의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단다. 중앙의 선비들이 너나없이 비석의 탁본을 뜨러 원주 땅을 드나들자 지방의 수령이 아예 비석을 뽑아다가 관청 안에 두었다. 그러던 것을 조선 시대에 관청 옆에 들어선 대장간에서 비석 돌을 가져다가 모루로 썼고 그 바람에 조각이 났다고 전해진다. 깨진 비석 조각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흥법사지에 서 있던 국보 염거화상탑과 보물 진공대사탑도 일제강점기이던 1931년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됐다가 돌아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법천사지의 지광국사현묘탑비. 거북이 지고 있는 점판암의 비석에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그림이 숨겨져 있다.

# 1000년의 시간을 지켜본 느티나무

다음 순서는 원주 부론면 정산리의 현계산 아래 거돈사지다. 원주의 세 곳의 절집 터 가운데 ‘비워진 아름다움’으로 가장 빛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삼면이 야트막한 구릉으로 닫혀 아늑한 느낌의 절집 터는 일찌감치 발굴과 복원을 마쳤다. 복원이라고 해서 절집을 다시 세우거나 단장한 것은 아니고,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주춧돌로 절집 건물이며 회랑 터를 구획해 놓은 정도다. 강당과 요사, 법당 자리를 흙으로 돋아 두어 건물 규모를 짐작하게 했는데, 단지 그것만으로도 웅장했던 절집을 마음으로 지어볼 수 있다.

텅 빈 절터의 중심에는 삼층석탑이 자못 당당하다. 적절한 비례와 조화로 상승감이 느껴지는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빈 공간이 꽉 차는 느낌이다. 탑 뒤쪽으로 금당이 들어섰던 자리에는 본존불의 대좌로 쓰였을 법한 바위가 있다. 그 위에 불상이 놓였을 것이니 크기로 미뤄 보면 법당은 이층 혹은 삼층의 웅장한 목탑건물이었을 것이다. 목탑건물 저쪽에는 강당이, 이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자리에는 긴 회랑이 있었으리라. 절집 입구에 세워졌던 당간지주가 400m 떨어진 폐교 운동장에 서 있을 정도로 거대했던 절집은 시간을 건너오면서 지어진 순서의 역순으로 허물어져 갔을 것이다.

절터 한쪽에는 거돈사가 지나온 시간을 다 보았음 직한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절집을 세울 당시의 쌓은 석축 위로 활개 치듯 가지를 뻗고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다. 거대한 뿌리가 석축의 돌을 끌어안고 있어 ‘돌을 먹는 나무’로 불린다는데, 아닌 게 아니라 뿌리가 바위를 물고 있는 듯 보인다. 느티나무의 수령은 1000년. 절집의 나이와 얼추 비슷하다.

절터 한쪽에는 원공국사 승묘탑비가 있다. 힘이 끓어 넘치는 흥법사지 탑비의 역동감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대신 단정하고 소박한 장식미가 느껴진다. 고려 초기의 탑비 양식이 이렇게 변해 갔다. 탑비의 비 머리는 채석장이 있는 문막읍 비두리 부근에서 정성껏 새겨서 가져온 것이라는데, 한 고승이 홀연히 나타나 소의 혼만 데리고 가서 옮겨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비석 머리가 넘어간 곳이라 해 ‘비두네미’라고 불렸던 것이 지금의 비두리란 마을 이름이 됐단다.

탑비와 함께 세워져 있었다던 승묘탑은 일제강점기에 반출됐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대신 훼손된 부분까지 재현해 놓은 복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조품인 탑비 대신, 거기서 해질 무렵 바라보는 삼층석탑이 거느린 빈터의 풍경이 자못 감동적이다.

# 도솔천의 세상을 새겨 놓다…법천사지

거돈사지에서 차로 20분 거리. 명봉산 자락 아래 법천사지가 있다. 아직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 중인 이곳에도 승탑과 탑비가 있다. 고려의 역대 왕들이 왕실로 초대해 법문을 들었다는 지광 국사의 것이다. 고려 문종도 지광 국사와 가까이 지냈는데, 넷째 아들을 출가시켜 그에게 맡겼을 정도였다. 그 아들이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다.

층층이 기단을 놓아 구획을 지어 놓은 빈 절터에는 지광국사의 현묘탑과 탑비가 남아 있다. 현묘탑은 고려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국보인데 일제강점기에 오사카(大阪)로 반출됐다가 반환돼 경복궁 경내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하면서 옮겨가려 했으나 원형 훼손이 우려돼 경복궁에 남겨 둔 것이다.

법천사지의 압권은 검은색 점판암으로 세워진 탑비다. 이것 역시 국보인데 무른 돌인 점판암의 양쪽 모서리에 비늘 하나하나를 뚜렷하게 새긴 용을 그려 놨고, 비석 위에는 글과 함께 마치 펜으로 그린 듯한 다양한 그림과 문양을 새겼다. 특히 비석의 위쪽에 그려진 도솔천은 압권이었다. 미래의 세상에 도래하는 미륵불이 그 아래서 설법한다는 용화수를 비롯해 9개의 바다와 8개의 산, 삼족오와 보름달 속의 토끼 등이 마치 비누 조각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석비의 높이가 5.5m에 달해 거기 새겨진 그림은 발돋움을 해도 잘 보이지 않는데, 문화관광해설사 목익상 씨가 품에서 조심스레 꺼내 보여준 탁본을 보고서 입이 딱 벌어졌다. 먹으로 찍어낸 탁본 안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 놓은 용화 세상의 꿈이 담겨 있었다. 법천사지 안내판에다 딱딱한 연대기 말고, 이런 탁본 사진 하나쯤 팻말로 세워 두었으면 좋았으련만….

폐사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도의 경계를 넘어가긴 하지만, 여주군 북내면 고달사지까지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 법천사지에서 고달사지까지는 차로 30분 남짓이면 충분하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고달사지에는 국보인 승탑과 보물인 원종대사탑, 석조대좌가 있다.

거기서 더 길을 잇는다면 원주와 여주 일대의 폐사지에서 반출됐던 탑과 탑비를 보존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경복궁까지 닿겠다. 그것이 꼭 국보와 보물이래서가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저편을 증거 하는 것들의 실존이 주는 감동은 상상 이상이다. 가능한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박물관으로 들어가고만 옛 절터의 유물들을 제자리로 다시 돌려놓는다면 그 감동의 깊이는 얼마나 더해질까.

▲ 원주에 머물렀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얼굴을 새겼다고 전해지는 미륵불.

# 신라 왕의 얼굴이 미륵으로 새겨지다

원주에서 시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곳 하나를 더 보태자면 귀래면 주포리의 경천묘다. 경천묘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경순왕은 왕위를 이어받은 지 9년 만에 기울어 가는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이곳 원주의 미륵산 아래 머물렀다.

경천묘가 있는 곳의 행정구역이 귀래면이다. ‘귀한 이가 돌아왔다’는 뜻의 ‘귀래(貴來)’라는 지명은 경순왕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해서 지어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긴 했어도 멸망한 나라의 군주가 어찌 ‘귀한 이’라는 칭호로 불렸을까. 그건 경순왕의 속수무책의 항복을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랜 전쟁의 참상에서 신음하는 무고한 백성을 위한 결단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경순왕은 미륵산 아래 머물면서 산 위의 바위에다 미륵 마애불을 새기고 그 아래 두 곳의 절집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미륵불을 깎은 석공이 경순왕의 얼굴을 미륵의 모습으로 새겼다는 구전도 있다. 그 미륵불이 미륵산의 8분 능선에 있다.

산 아래 자그마한 절집을 거쳐 거친 미륵산을 짚어 오르는 길. 그 길 끝의 아슬아슬 비탈진 암벽 앞에서 비바람에 깎여 보일 듯 말 듯 부드러운 표정의 미륵 얼굴이 보였다. 미륵은 첩첩이 산 그림자가 겹쳐진 원주의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던 이 땅의 백성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냈다는 것만으로도 미래의 구원을 보았던 것일까.




폐사지 가는 길=영동고속도로 문막나들목으로 나가 원주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42번 국도 동화교 아래에서 농공단지 쪽으로 좌회전한다. 농공단지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섬강을 건너자마자 흥법교를 건너면 이내 흥법사지다. 거돈사지는 부론면 소재지를 지나가는 531번 국도를 타고 남한강 물길을 따라가다 정산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가닿는다. 흥법사지에서 거돈사지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거돈사지에서 법천사지까지는 9㎞ 남짓. 거돈사지에서 부론면 쪽으로 가다 면사무소에 닿기 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금방이다. 미륵산 미륵은 귀래면의 황산사를 겨눠서 찾아가면 된다. 자그마한 절집 황산사 뒤편에 신라 경순왕의 영정을 모신 경천묘가 있다. 경천묘에서 미륵 마애불까지는 산길로 40분쯤 걸린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원주는 숙소 사정이 좋은 편이다. 리조트부터 특급호텔은 물론이고 시설 좋은 관광호텔이나 모텔까지 다양하다. 가족여행이라면 오크밸리 리조트(1588-7676)가 최고의 선택이다. 원주 역사박물관 옆에는 특급호텔 인터불고 원주(769-8114)가 있다. 위치는 좀 외진 편이지만, 시설이 깨끗하다.

원주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추어탕이 꼽힌다. 문막읍의 오일장 인근의 장터추어탕(033-735-2025)은 원주식 추어탕으로 이름난 곳이다. 원주 시내의 ‘박순례 손말이고기 산정집’(033-742-8556)은 우둔살을 얇게 저민 뒤 깻잎과 쪽파, 미나리 등을 넣어 말아 구워 먹는 ‘손말이 고기’를 내는 곳이다. 예약 손님만 받는데도 손님들로 넘친다. 원주중앙시장 안에는 한우거리가 있다. 거리라기보다는 작은 골목인데, 18개 한우식당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다. 치마살, 부채살 등 특수 부위를 한 접시에 담아서 내는 ‘소고기 특수부위 모둠구이’가 가장 인기 있는 메뉴다.

원주=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6년 1월 13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