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 자선시 5편
공하고 놀다
상상 임신 끝에 알을 낳았다
무정란의 공
부화되지 못한 채 주렁주렁 망태기에 담겨 있다가
태생의 탱탱함으로 이리저리 차이다가
별이 될 듯 하늘로 솟구치다가
울타리를 넘어 차에 치여 사정없이 찌그러진다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공
끝내 가죽만 남아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누군가는 평생을 걸고 이 공에 대해 화두를 던졌다
이 공의 주인은 누구인가!
구름의 집
한 때 집이었고
기둥이었던 폐기물 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른다
둔탁한 광물의 알 속에서
밤새 얼룩진 기도를 마친
순례자처럼
붉은 눈물의 태양을 향해 솟아오른다
누구는 스모그라 하고
누구는 먼지라고 호명하는
새들의 뒤를
몇 점 구름이 수호자가 되어
뒤따르고 있다
버려진 폐기물들은 다시 한 번
더 버려진다
구름의 집이라는 낭만의 집
그러나 구름은 집이 없다
몸통은 없고
날개만 퍼덕이는
하루살이처럼
불타는 詩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의 화살이
동천 눈물 주머니를 꿰뚫었는지
눈발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
시인들은 역으로 나가 시를 읊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장미가 피고 촛불이 너울거리는 밤
누가 묻지 않았는데 시인들의 약력은
길고 길었다
노숙자에게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다
채권 다발 같은 시집 몇 권이
딱딱한 베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한 역사 계단 밑에서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내리시는 무언의 시가
발밑에 짓이겨지는 동안
가벼운 재로 승천하는 불타는 시가
매운 눈물이 된다
아, 불타는 시
스물 두 살
- 전태일
너도 걸었고 나도 걸었다
함께 스물 두 살을 지나가면서
너는 맨발이었고 나는 평발이었을 뿐
티눈이 박이는 세월을 막지 못하였다.
어쩌랴 너는 스물 두 살에 멈추어 섰고
나는 쉰 하고도 여덟 해를 더 걸었으나
내가 얻은 것은 평발이 된 맨발이다
나는 아직도 스물 두 살을 맴돌고 있고
너는 아직도 더 먼 거리를 걷고 있을 터
느닷없이 타오르던 한 송이 불꽃
하늘로 걸어 올라가 겨울 밤을 비추는 별이 된 너와
그 별을 추운 눈으로 바라보는 중늙은이
걸어 걸어 스물 두 살을 지나가면서
너는 맨발이었고 나는 평발이었을 뿐
같은 길을 걸었으나 한 번도 뜨겁게 마주치지는 못하였다
촉도 蜀道
경비원 한 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 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 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포에지 충남 제 12집 (2015)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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