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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시세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8. 16. 19:09

안도현의 시세계

 

 

구정 연휴도 지나고, 이제 졸업과 입학 그리고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많이 기다리셨을 것으로 생각되면서도 예정을 넘기게 되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우선 여러분들께서는 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안도현 시인에 관련된 자료들을 꼼꼼히 읽어 주셔야 하고 그렇게 하셨을 것으로 간주하고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안도현의 시집 『그리운 여우』를 읽으신 것으로 판단하겠습니다.

지난 8주차 강의록 말미에 숙제 내드린 것 있지요? 시 제목 알아 맞추기. 시 제목은 <석류>입니다. 시를 쓴 이가림 시인은 사랑하는 이에게 향하는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석류가 막 터져 나오는 모습에 대비시키면서 진한 감동과 아름다움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시를 읽고 감동한다는 것은 미묘한 것입니다.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참 맛있다!’라고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맛있다’를 측정할 도리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정서와 감동의 강도는 각자 틀릴 수밖에 없지요. 시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사랑은 모든 예술 분야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아지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홍역처럼 일생에 한 번 이상은 거쳐야 하는 감정의 통로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 이 강좌를 보고 계신 여러분이 <사랑>에 관련된 시를 한 편 쓰신다면 어떤 시를 쓸까요?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사랑>이라는 것처럼 관념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는 무수히 많고 아가페적인, 에로스적인, 상호 호혜적인 여러 부류의 사랑을 논할 수도 있고..... 언제부터인가 국적불명의 발렌타인데이(바로 오늘이군요), 화이트데이가 서로의 사랑을 전하고 확인하는 행사로 젊은이들 사이에 성행하고 있는데 막상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차이가 무어냐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난감해지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막연한 관념의 상태를 구체적인 실물로 재현해 내는 연상의 법칙을 기억하고 계시지요. 여러분들은 자주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감정을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까? 하고 궁리를 거듭하다 보면 상상력이 깊어집니다. 일상적으로 무심하게 지나가던, 말하자면 상식적으로 눈에 보이던 사물이나 현상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올해 신춘문예 작품들을 살펴보면 제가 말씀드린 새로운 의미 해석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 호 열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서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제가 쓴 <사랑은>이라는 시입니다. 2,3년 전에 결혼한 젊은 부부를 축하하기 위하여 쓴 시입니다. 마침 며칠 전 황청원 시인이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언급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 시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설명을 하더군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란 서로를 그리워하고, 감촉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사랑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랑의 의미는 다르고 사랑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신기루를 향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헌신하며 실체를 완성하려고 하는 과정, 그리고 그 이후에 남겨지는 또 하나의 의미이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가림 시인의 <석류>가 훌륭한 시인 까닭은 사랑을 느끼고, 그리워하는 감정을 넘어서서 비극적인 자세, 자신을 낮추어 낮은 땅 위로 떨어지는 행위- 헌신하는-를 보여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용한 저의 시의 소재는 무엇일까요? 뚜렷하게 드러나는 소재는 보이지 않고 <꽃>, <열매>, <사랑>과 같은 일반적이면서도 관념적인 의미를 지닌 명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지금 빨리 자료실로 이동하셔서 ‘시의 네가지 유형’ - 이승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오. 그 네 가지 유형 중에 제 시는 어디에 속할 것 같습니까?

이쯤에서 여러분은 조금 혼돈스러우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시는 소재와 자신의 생각을 연상의 법칙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뒤에서는 그와 상반되는, 사물의 묘사가 아닌 시의 형태를 보여 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은>은 사랑을 정의합니다. 무엇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엇이기 때문이다의 형식으로 논술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제 제가 의도하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석류>의 형식이 <사랑은>의 형식보다 훨씬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형태, 동작, 일련의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자신의 생각을 연결시키는 작업이 좋은 시를 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관념적인 내용을 관념적인 표현으로 구사한다는 것은 시의 완성도에 있어서 문제가 많다는 점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원로시인이신 조병화님은 시는 짧을수록 좋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시들이 난삽해지고, 산문화되어가는 경향이 많은데 어디까지나 시의 본령은 ‘언어의 압축’을 통해서 상징화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위의 시는 안도현 시인의 시이지요. 본 강의는 안도현 시인의 시세계를 폭넓게 조망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창작할 때 필요한 테크닉을 배우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시를 깊이 연구하고 싶으신 분은 자료실의 평론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너에 묻는다’라는 시는 정말 짧습니다. 어려운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잊고 있었던 진실 하나를 화살처럼 우리 가슴에 꽂습니다. 우리를 반성시키는 것이지요.

연탄재,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긴 겨울밤 우리들의 등짝을 덥혀주던 연탄이, 다 타고나면 좁은 골목길에 하얀 얼굴로 버려지던 연탄재, 눈오는 날이면 비탈길 미끄러지지 말라고 길 위에 부서지던 연탄재, 화난다고, 심심풀이로 발길질하던 연탄재를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연탄으로 활활 타오르던 그 시절을 생각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동심의 세계를 그리워합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마음을 점점 잃고 산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 점점 더 이기적이 되고, 물질에 어두워지고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기가 쉬운 까닭이지요. 갑자기 공자의 말씀이 생각나네요.

 

子曰(자왈), 君子有三戒(군자유삼계) 하니, 少之時(소지시)에는 血氣未定(혈기미정)이라 戒之在色(계지재색)하고, 及其壯也(급기장야)하여선 血氣方剛(혈기방강)이라 戒之在鬪(계지재투)하고, 及其老也(급기노야)하여선 血氣旣衰(혈기기쇠)라 戒之在得(계지재득)이니라

 

군자가 경계하여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 연소할 때에는 혈기가 아직 진정되지 못하여 여색을 경계하여야 하고, 장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굳세어 남과 다투기를 즐겨하므로 이를 경계하여야 하고, 늙어서 혈기가 쇠약해지면 재물을 탐내므로 이를 경계하여야 한다.

 

 

쉬운 듯 하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말이지요.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신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요즈음은 사람들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지요, 좋으면 만나고 싫어지면 헤어지고, IMF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는 현상을 우리는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지요. 자식이 가출하고 지아비가, 지어미가 집을 떠나고,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백년가약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있지요. 정글의 법칙이 횡행하는, 제로섬의 번득이는 칼날이 날아다니는 이 세상에서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연탄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몸을 태움으로써 타인을 따뜻하게 하는 힘! 자신은 소멸하면서 타인을 일으켜 세우는 헌신!

시인은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연탄재처럼 쓸모 없다고, 늙었다고, 능력이 없다고, 함부로 홀대하고, 그러나 그런 존재들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꿈과 희망이 있었음을 알고 있냐고, 연탄처럼 자신을 소멸시키는 그런게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세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삶에 대한 곧고, 건강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논어를 읽고, 노자도덕경, 장자를 수 백 번 읽어도 자신의 생활에 접목시키지 못한 채 識者然 한다면 좋은 소양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시를 쓰는 마음은 맑고 깨끗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바와 같이 안도현 시인은 전교조에 가입하여 해직 당하고 (젊은 나이에), 생활의 신고를 겪어내면서 이 사회와 가족과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곧게 가꾸어온 시인입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씨도 섬진강가의 조그만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동심의 세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출세에 대한 열망을 접고 사람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천착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존경과 좋은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타인에게 묻고 다시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의 건강성을 위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쑥부쟁이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쑥부쟁이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또한 쑥부쟁이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자연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산서에서 내가 얻은 소득이 있다면, 부끄럽지만 그것은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아주 조금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환경운동이나 녹색운동, 혹은 생명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이들처럼 적극적 자연주의자는 아니다. 차라리 나는 인간을 위한 그러한 모든 운동을 폐기하고, 쑥부쟁이의 입장에서, 느티나무의 입장에서, 돌고기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그들의 입장에서 인간을 테러하고 싶은 과격한 생물이 되고 싶다. 유사 이래 문학과 철학과 과학의 배후조종자인 인간중심주의의 이기성을 나는 쑥부쟁이에게서, 느티나무에게서, 돌고기에게서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지금 나의 삶과 문학의 중요한 스승이다. 인간아, 입장을 바꿔 사유해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이 나에게 건네는 말의 깊이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요즈음 하루에 한 번 이상 그들에게 엎드려 절한다.

 

시인이란 거칠게 말하면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는 사람,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보는 세계를 비상식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발상 자체를 바꾸어 봄으로서 이 세계를, 사람들을, 자연을 다른 방면으로 해석하고,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를 또 하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위의 글은 안도현 시인이 직접 쓴 글(자료실에 올려져 있음)입니다. 밑줄 그어진 강조 부분을 보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발상을 바꾸어 본다고 해서 기괴하거나 퇴폐적이거나 하는 쪽으로 흘러가서는 안되겠지요? 시인은 건강하여야 합니다. 특히 정신은 어떤 외압이나 고통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강인함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과 맞서는 힘이 있어야 시로서 독자들에게 희망과 삶의 기쁨을 전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시인이란 이런 자가 아닐까. 이 세상의 모든 관계와 관계의 긴장 상태를 들여다보는 자. 연자새를 감고 있는 아이와 공중에 떠 있는 방패연과의 팽팽한 관계, 들길에 핀 쑥부쟁이 한 송이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사이의 그윽한 관계, 그 둘 사이의 긴장.

 

우리가 시를 쓸 때 관찰의 중요성을 자주 말합니다. 관찰이란 다른 말로(안도현 식으로) 나 아닌 것들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나의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입장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관찰을 행하기 위해서는 속도에 민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어떻습니까? ‘핏자를 20분 안에 배달하지 않으면 핏자값을 받지 않습니다’ ‘속성 20분 현상’ ‘퀵 서비스’ 모든 일상의 일들을 속도를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조급증은 이제 우리의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한국 사람이 영국사람 보다 1분당 보행 속도가 배가 빠르다고 하더군요. 밥 먹는 속도는 어떻습니까? 저도 반성해야 합니다. 3분이면 식사를 마치니까요. 식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프니까 그냥 먹는거지요. 속도가 나면 날수록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음미할 시간을 놓칩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런 속도전쟁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남이야 가던 말던 느린 걸음으로 꽃 한 송이, 싹 하나가 세상에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끈기 있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컴퓨터를 모르면 세상에서 완전히 낙오되어 버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다음 세대엔 또 무엇이 우리를 스트레스 받게 할까요? 그렇게 허겁지겁 세상 살다가는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제 걸음을 조금 늦추고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봅시다.

 

지금까지 안도현 시인의 시를 감상하면서 시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1. 삶에 대한 진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냥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들을 반성적으로 탐색하고 행동하는 자세를 견지한다는 것

 

2. 상식으로부터의 탈피를 꾀하는 것

기존의 세계가 아닌,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상에 대한 관찰을 행하는 것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확고한 자신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을 갖는 것을 포기하면 좋은 글을 쓰기 힘듭니다. 관점이라고 말하면 자신의 세계관, 인간관, 등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장이 되겠지요, 편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매우 가난한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지니게 될까요? 세상이 모순투성이다. 살고 싶지 않다.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 가난해도 떳떳하게 살겠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의 주장이고 관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써야할까요? 가난에 대하여? 왜곡된 사회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방도에 대하여? 기성시인들이나 아마추어 시인에게나 다같이 필요한 것은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수 십 편, 수 백 편의 시를 써 보는 것입니다. 쓰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고, 직설적인 주장이 묘사를 통해서 하나의 아름다운 글로 되살아나고 하면서 수많은 태작이 버려지고 하는 것입니다.

자, 쓰고자 하는 내용이 정리되었습니다. ‘아! 저 꽃은 아름답다. 저 꽃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전하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시의 형식에 대하여 생각이 갑니다. 형식이란 그릇입니다. 접시에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여러분들이 전하고 싶어하는 글에 합당한 그릇을 찾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형식에 대해서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운 방식대로 습관적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지금부터 그러한 습관을 의식적으로 탈피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인용한 <너에게 묻는다>는 단 3 줄로 시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여러분)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마세요)

(여러분은) (연탄처럼) (몸을 달구어)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뜨거운 사람인 적이 (있습니까)

 

이 시를 산문투로 바꾸어보면 바로 위 글처럼 될 것입니다. 화자는 나이고 청자는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에 여러분이라고 해야 되겠지요? 그러므로 마세요. 있습니까? 라고 부드러운 청유형의 질문을 하게 되지요. 위 글은 시가 아니지요? 왜 그럴까요? 시는 언어의 압축과 비유를 통한 상징화 작업입니다. 어떤 시가 잘 형상화되어 있다라고 말할 때, 형상화는 하나의 뚜렷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라고 다시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이미지가 뭐냐? 라고 물으면 대답이 곤란해집니다. 각자가 느끼는 그 이미지는 매우 심리적이고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너에게 묻는다>에서 너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입니다. 시인은 가짜 사랑이 횡행하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묻기 전에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정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을 지니고 있는 시인은 어느날 버려져 있는 연탄재를 발견합니다. 이제는 쓸모 없이 버려진, 그러나 한 때는 온 몸을 사루어 우리를 따듯하게 했던 그러한 존재..... 아무 조건 없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닌지요. 시인은 명령합니다. ~ 마라. 굉장히 강한 어투입니다. 그 다음 ‘너는’ 이 한 줄이 한 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일 ‘너는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왜냐하면)누구에게 너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렇게 구성한다면 굉장히 늘어지지는 문장이 되지요. ~마라 라고 강한 어조로 명령한 다음 ‘너는’ 이 한 줄을 배치하므로서 1 행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바로 너 라고 손으로 지적하는듯한 1:1의 대립 구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3 행의 ~ 느냐 라고 되묻는 것은 완곡하게 너는 그렇지 않았다라는 사실을 각성시키는 것이지요.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이 시인에게 사랑이란 정의는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옆에 붙어서 우는 것’으로 인식 됩니다. 울지 읺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부연합니다. 시는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습니다. 여백의 미, 독자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전통 동양화(수묵화)는 검은 먹 하나로 그림을 그리고 여백이 훨씬 많지요. 그것은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고결한 상태를 상징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입니다. 시인은 매미가 우는 까닭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라고만 말하지 더 이상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의 여백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독자들이 생각하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 시인의 또 다른 할 일 입니다.

 

인생

 

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者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이 시의 키포인트는 전라선입니다. 전라선은 이리로 해서 남원, 구례, 순천, 여수까지 가는 노선이지요. 전라선을 타 보지 않은 자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니! 이 무슨 소리입니까? 전라선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폭에 따라 이 시는 천차만별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분명히, 시인은 전라선을 타 본 경험이 있을 터이고, 전라선을 타고서 느낀 어떤 정서가 있을 터이고, 밤에 전라선을 타고 가면서 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자신의 정리된 생각이 있을 터인데 더 이상 자신의 설명을 붙이지 않지요. 그 다음은 독자들이여! 알아서 하라! 참 무책임하고, 독자들을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이 시를 읽기 위해서 전라선을 일부러 타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정서란 한 구비 한 구비 넘어가는 첩첩 산중과 가물거리는 몇 점의 불빛, 덜커덩거리는 기차 바퀴 소리,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상기시키는 寂寞江山, 어떤 쓸쓸함 정도로 어림짐작이 되지만 그 이후에 남는 여운은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바 있듯이, 시를 잘 쓸 수 있는 첫 번 째는 대상의 입장에서 나를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제가 잘 쓰는 말로 대상에게 말걸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풀, 나무, 구름, 별, 달, 이런 것들을 나와 대화를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 안도현 시에 서 연탄이라든가, 매미라든가 하는 무생물 또는 생물을 의인화하는 것입니다. 연탄과 매미를 뜨거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존재로 등치시키는 능력. 안도현 시인의 많은 시들은 의인법의 묘사를 구사하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의인법을 잘 익혀 두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그는 삼라만상을 일단 닥치는대로 의인화시켜놓고 본다. 의인법 뿐만 아니라 무릇 그 모든 비유법들이 시에 동원되는 일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육회 안주를 특별히 좋아하는 안도현의 식성처럼, 그가 어쩌면 편식이다 싶게 즐기는 이 의인법이라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편들은 쉽고 만만하게 여겨지면서도 독특한 참신성을 자랑하게 된다.

- 시집 『그리운 여우』 발문 이병천 111쪽

 

 

삼라만상을 닥치는대로 의인화 시킨다는 것은 시 씀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삼라만상을 나와 대화가 통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겨울 강가에서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그리운 여우> 전 편을 통해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데요, 여기서도 예외없이 눈과 강을 의인화하여 자연의 아름다움, 저마다의 이치를 가진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감동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눈이 내리고, 강이 어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相生하는, 절대로 相剋이 아닌 평화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진작가가 포착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의인화의 기법으로 펼쳐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 속으로 허망하게 빠져드는 눈발이 사라짐이 안타까워 제 몸을 얼리는 행위는 이 번 강좌에서 일관되게 언급한 ‘사랑’의 관점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눈이 오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강물이 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눈과 강, 그리고 얼어붙음은 모두 서로 서로를 사랑하는 그윽한 눈빛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윽한 눈빛은 탐욕으로 얼룩진 일상의 눈에 담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린 상태에서, 잔잔한 애정을 가져야만 들여다 볼 수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시를 통해서 우리는 알지 못했던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이 세계에 대한 喚起가 보다 큰 시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월에서 4월 사이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하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산서라는 곳은 안도현 시인이 복직되어 교사로 근무한 전라북도 산촌의 면 소재지입니다. 사실적으로 열거된 꽃들이 순서대로 피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3월과 사월 사이에 우리나라를 지나가는 봄을 역동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몇 개의 장소와 꽃들을 열거하므로서 마치 봄이 발걸음을 옮기는 듯한 동작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궁리를 해 보세요, 요모조모 따져보고 옮겨도 보고 그러는 가운데 맛갈스런 시의 형태가 갖추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어떤 시집을 읽을 때 쉽게 읽지 마시고, 그 시인이 구사하는 시적 기교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참신성, 그리고 만일 내가 같은 주제로 글을 쓴다면 어떻게 할까 하고 따져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스개 소리로 집에 100권 이상의 시집이 없으면 시를 논하지 말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시를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충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료실에 올려져 있는 방민호 평론가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글에서 방 평론가는 안도현 시인이 시인 백석의 영향을 받고 일정 부분 백석시를 본뜨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20년에 걸친 안도현 시의 세계를 음미하면서 시인이 걸어왔고 앞으로 지향해야할 세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시를 읽고 자신의 경향에 맞는 시인이나 시를 닮아보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눈이 뜨이는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런 한 편의 시를 위해서, 수 백 편의 시를 쓰고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