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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그곳에 가고 싶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2. 29. 11:00

돌아보자면 때로 고단했지만 즐거웠던 여정이었습니다. 문화일보 LIFE & Style이 한 해 동안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여행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다섯 곳을 추려 봤습니다. 깊은 산중의 오지마을과 태풍에 넘어지고만 괴산의 아름드리 왕소나무, 그리고 계절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났던 남도의 땅…. 때로는 감동으로, 때로는 탄성과 함께 마주했던 곳들입니다. 이 다섯 곳 여행지를 비롯해 올 한 해 LIFE & Style의 여정은 www.munhwa.com/travel을 통해 다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화전민이 떠나고 난 뒤 청정자연의 원시림이 그대로 남아 있는 늡다리의 칠룡폭포 계곡을 늡다리의 유일한 주민인 김필봉 씨가 내려다보고 있다. 김 씨는 새해가 되면 꼬박 1시간 30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깊은 오지에서의 산골생활 17년째를 맞는다.



2012년에 문화일보가 찾았던 최고의 여행지는 강원 영월의 ‘늡다리’였다. 화전민이 떠나고 난 뒤 40여 년 동안 사람의 발자취가 끊긴 오지 중의 오지. 늡다리는 강원 영월과 경북 봉화, 충북 단양의 경계에 솟은 어래산과 선달산 북쪽 자락의 계곡에 깊이 숨어 있었다. 맑고 청량한 계곡과 원시림의 짙은 숲. 손대지 않은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던 곳. 거기에 김필봉(48) 씨의 집이 있었다. 계곡의 물길을 따라 꼬박 1시간 30분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 전기도 없고, 군용 전선으로 위태롭게 놓은 전화선마저도 자주 끊어지는 곳에서 김 씨는 제 먹거리만 거두면서 살고 있었다.

늡다리를 기사로 소개하는 데는 고민이 적지 않았다. 취재 내내 발목을 잡던 생각은 ‘이렇듯 청정한 원시림을 공개했다가 자칫 밀려드는 행락객들로 더럽혀지지 않을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자연이 좋다고 해도 여기까지 찾아올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태평스러워했다. 결론은 김 씨의 말이 맞았다. 깊은 오지의 청량한 풍경과 함께 김 씨와 보낸 별이 쏟아지던 하룻밤에 대한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의 문의는 쇄도했지만, 정작 늡다리를 찾아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계곡을 따라 김 씨의 흙집으로 오르는 산길이며 김 씨 집 주변의 원시림은 빼어나게 아름다웠지만, 그 광경을 보려면 바쳐야 하는 1시간 30분 남짓의 산길 걷기를 감내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고백하자면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에 앞서 실망스럽다는 생각이 앞섰다. 행락객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는 것을 바라는 바는 아니었지만, 적막하고 청량한 숲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 2012년 최고의 여행지 목록의 맨 앞줄에 늡다리를 꼽는 이유는, 티끌만큼도 훼손되지 않은 빼어난 자연 풍경과 거기에 기대고 사는 김 씨의 삶이 더없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늡다리가 오래도록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김필봉 씨는 지금 푸근하게 눈이 쌓인 늡다리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쌀이 떨어져 계곡 아래 마을로 쌀을 사러 나왔다가 연결된 전화에서 그는 “늡다리에서의 열일곱 번째 겨울을 보내기 위해 땔감을 넉넉히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늡다리의 겨울 풍경은 과연 어떨까. 궁금하다면 김 씨에게 전화(033-378-7024)해 보시라.

전북 익산에는 의외로 다양한 풍경과 수많은 이야기를 숨겨둔 명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백제 왕궁 터에 기품 있게 서있는 왕궁리 석탑을 찾아간 날에 마침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전북 익산의 왕궁리 석탑 주변의 화사하게 피어났던 벚꽃. 아쉽게도 그 벚꽃을 다가올 봄에는 보지 못한다.

지난 여름 잇따라 내습한 두 번의 태풍으로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적잖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익산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명소들이 익산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백제 때의 것인 우람한 왕궁리 석탑이 있고, 한때 한강 이남에서 가장 컸다는 대숲도 있으며, 그윽한 편백나무 숲도 있고, 꽃잔디 화려하게 피어나는 아늑한 한옥의 찻집에다 금강의 유장한 물줄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경치 못지않게 익산에서 감동했던 것은 풍성한 이야기들이었다. 호사가들이 그럴싸하게 꾸며내거나 이리저리 터무니없는 전설 따위를 덧댄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을 관통하는 잘 삭은 이야기들이다.

고대국가 백제의 유적인 미륵사지와 왕궁리 석탑에는 물론이거니와 옛 선비가 부모를 위해 세운 제각인 영모정에도, 난데없는 판소리 공연장을 들여놓은 절집 심곡사에도 이야기들이 펄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바위성당과 두동교회, 함라의 돌담마을에도 마치 대하소설과 같은 유장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낭산면의 절집 심곡사와 정정렬 명창에 얽힌 이야기였다. 근세 5명창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정정렬. 말년에 명창으로 우뚝 섰지만 사실 그는 음색도 탁하고 성량도 부족했다. 오죽하면 ‘떡이 목에 걸린 것 같은 거친 소리’라 해서 ‘떡목’이라 불렸을까.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평생 심곡사 등의 절집을 떠돌며 피를 토할 정도로 극단의 수련을 했고 수많은 좌절 끝에 끝내 명창으로 거듭났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 승승장구하면서 업적을 이룬 이들도 위대하지만, 이런 삶이 보여주는 감동의 농도는 더 깊고도 짙었다.

붉은 수피를 뒤틀고 마치 승천하려는 용처럼 당당하게 서있던 충북 괴산의 왕소나무. 범접할 수 없는 기운과 위엄이 느껴지는 왕소나무는 무수한 풍파를 견디며 600년의 시간을 건너왔지만 지난 여름, 이 사진을 찍은 지 나흘 만에 태풍에 쓰러지고 말았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천연기념물 왕소나무는 그 풍모만으로도 ‘왕’이란 이름에 마땅히 값을 하고도 남았다. 괴산과 경북 문경, 상주 등을 돌아보는 순환형 도로를 따라 명소를 찾아갔던 취재에서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왕소나무였다. 붉은 껍질의 거대한 밑동을 뒤틀며 구불구불 가지를 힘차게 펼치고 선 소나무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위용이 대단했다. 뒤튼 가지마다 나무가 지나온 600년의 풍상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취재를 다녀온 지 나흘 만인 8월 28일 왕소나무는 태풍 ‘볼라벤’에 거짓말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허망하게도….

기사가 나간 뒤 사진으로나마 왕소나무의 마지막 위용을 대한 독자들은 아쉬워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2주 후 찾아간 왕소나무는 드러난 뿌리에 황토가 덮여진 채로 가지를 부직포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고, 가지에는 수액주사가 놓아지고있었다. 넘어진 왕소나무를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했다. 넘어진 나무를 찾은 이들은 드러난 뿌리를 보고 안쓰러워했고, 나무가 서있을 때 얼마나 위용이 당당했을까에 대해 이야기했다.

괴산군에 왕소나무의 이즈음의 기별을 물었다. 왕소나무는 위태위태하게 숨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소나무 회생에 나선 전문가들은 일찌감치 둥치를 일으켜 세우기를 포기하고, 누운 그대로 와송(臥松)으로 보존하기로 했었다. 최근에는 누워 자랄 공간을 만들어 주면서 주위에 안전시설을 설치했다. 아직 왕소나무는 죽지 않았지만 살아날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괴산군의 관계자는 “내년 봄 누운 소나무의 가지 끝에 푸른 새잎이 돋아나야 비로소 회생 판정이 내려질 것”이라고 했다. 봄날에 새잎을 내면서 왕소나무가 다시 청청했던 빛깔을 되찾을지, 아니면 누운 채로 그대로 목숨을 다할지는 ‘반반’이라고 했다. 살아난다 해도 승천하는 용처럼 웅장했던 예전의 자태를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누운 채 노쇠한 모습으로라도 예전의 크기와 위엄을 추억하며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봄날 이른 아침에 전남 함평의 불갑산 연실봉의 능선에서 굽어본 함평들을 휘감은 안개. 사람 사는 마을과 들판에 가득 고여 출렁이는 봄 안개가 막 떠오른 햇볕을 받아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은 올 한 해 만난 풍경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다. 아래 작은 사진은 불갑산 자락의 수채화 같은 신록.



남도 땅의 봄 풍경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이 들판을 뒤덮은 안개와 산자락의 신록이다. 전남 함평의 불갑산에서 두 가지를 다 만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다 지워 버리고 그저 ‘경관’만을 놓고 겨룬다면 봄날 함평 불갑산에서 만난 풍경을 한 해 중 최고라 해도 좋겠다. 봄날, 함평의 들판에서 몽환처럼 번지는 안개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단연 불갑산의 연실봉이다.

함평의 너른 들은 봄이면 안개로 휘감긴다. 이른 새벽 낮게 안개가 깔린 들판 뒤로는 첩첩이 이어진 산자락의 그림자가 수묵화처럼 번져 나간다. 산 아래 함평 들판에 고여 출렁거리던 안개가 가장 빛나는 때는 햇살이 막 퍼지기 시작할 무렵. 비스듬히 해를 받은 안개가 짙은 황금빛으로 물든다.

황금빛 안개는 동네 어귀의 미루나무를 감고, 농가의 슬레이트 지붕을 덮고,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둑을 지나서 이제 막 이삭이 팬 보리밭의 이랑 사이로 흘러간다. 봄이면 함평의 들판에는 열흘 중에서 여드레쯤은 안개가 밀려온다고 했으니 내년의 봄날에도 이런 풍경을 만날 수 있을 터다.

불갑산 자락의 신록도 못지않았다. U자형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능선에 활엽수의 새잎이 물들어 보여주는 신록은 감탄사를 절로 토하게 했다. 함평군 해보면과 신광면 사이의 금계저수지를 끼고 가는 비포장 임도. 금계리에서 용천사 입구로 이어지는 이 길은 불갑산 신록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아니 우리 땅의 가장 아름다운 신록을 가로지르는 가히 최고의 길이라 이름할 만했다.

신록으로 샤워를 하는 길. 숲 아래로는 현호색, 노랑괴불주머니, 제비꽃, 애기똥풀 등 야생화들까지 아우성처럼 피어났다. 더불어 용천사와 불갑사를 잇는 단정한 길, 구수재를 걸어 넘어 보아도 좋겠다. 이 고갯길에서는 1908년 농부가 놓은 덫에 호랑이가 잡혔다고 했다. 그저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잡은 호랑이의 박제 표본이 목포의 유달초등학교에 기증돼 여태 보존하고 있다니 말이다.

올해 초 전북 무주의 덕유산에서 마주했던 눈부신 설경. 화려한 눈꽃터널과 순백의 부드러운 능선, 여기다가 거대한 덕유의 산자락을 넘실거리며 몰려다니는 운무까지 보태지니 가히 ‘압도’의 아름다움이 펼쳐졌다.



겨울 덕유산의 매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해발 1000m를 넘나드는 산이라면 겨울철에 눈꽃이나 상고대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유독 덕유산을 눈꽃여행의 최고 목적지로 손꼽는 이유는 아마도 스키리조트의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서 손쉽게 눈꽃을 만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리라. 이맘때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덕유산이 빚어내는 장엄함이란, 만나 보지 못한 이라면 감히 짐작조차 못한다. 하지만 겨울 덕유산은 곤돌라가 다니지 않는 이른 새벽의 풍경이 단연 최고였다. 겨울철 눈꽃도 눈꽃이지만, 여기에다 운해가 겹쳐지자 덕유산은 그야말로 장엄한 아름다움을 보여줬다. 특히 동엽령의 설원 뒤로 남덕유산의 삿갓봉과 서봉이 운해에 잠겨 있는 모습은 히말라야 고산준령의 것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이쯤에서 단언한다. 지금껏 겨울 덕유산의 설경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면, 겨울 여행의 진수를 아직 만나지 못한 것이다. 덕유산 설경을 봤다 해도 눈길을 제 발로 딛고 올라서 이른 새벽의 운해로 뒤덮인 덕유산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진면목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좋겠다. 눈꽃터널의 화려함을 지나 철쭉의 관목이 눈으로 뒤덮인 능선의 웅장함을 만나고, 눈 덮인 산자락을 이리저리 빠르게 넘나드는 운무까지 마주친 이후에야 ‘겨울이 빚어낸 최상의 풍경’과 마주해 보았다고 자랑할 수 있다. 밀려든 운해가 일순 걷히면서 순백의 설원 위로 깨질 듯 푸른 겨울 하늘이 드러나는 광경의 감동은 정지사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덕유산에서 만나는 것이 어찌 눈부신 설경뿐이랴. 향적봉을 오르는 길에서, 중봉을 향하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고사목들은 스스로 지나온 시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 그리고 넘어져서 또 1000년의 시간을 보낸다는 주목의 나뭇결을 따라 피어나는 하얀 상고대는 순백의 장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번 겨울에도 덕유산은 자주 이런 장엄한 풍경을 빚어내리라.

글·사진 =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2년 12월 26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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