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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 지금이 내 인생 '9월의 이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7. 14. 13:44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 지금이 내 인생 '9월의 이틀'"

 

초등학교 교사하다가 환갑 넘어 도보여행가 된 황안나(71)씨

40년간 아이 가르치다 '나' 위한 삶 찾아 퇴직 지리산 종주이어 국토 종주 도보여행 맛들여 한반도 해안일주까지걷다 보면 '아름다운 세상' 몸으로 느낄 수 있어

 

 그해 내 나이 쉰여덟, 1998년 봄이었어요. 인천 부평서초등학교 6학년 담임으로 아이들 학예회 지도하고 내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불쑥 '2년 후면 60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춘천사범학교 마치고 19살에 산골학교 선생님이 됐어요. 39년6개월간 내가 좋아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나 자신을 감동시키며 살아온 삶'은 아니었어요.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니 과감해지데요. 1학기 끝나자마자 조기퇴직했어요.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어요. "노는 것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3년간 매일 새벽 4시 30분부터 3시간 동안 뒷산을 두 바퀴씩 돌았어요. 체력이 붙자 평생 달고 살던 감기가 뚝 떨어졌어요.

 

 

                                                                              ▲ 1998년 퇴직을 앞두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황안나씨. /황안나씨 제공

 

 

예순한살 되던 2001년 11월, 지리산 종주를 결심했어요. 로터리산장 주인이 "폭설 때문에 아이젠 없는 사람은 더 못 간다"고 해요.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되짚어 아이젠을 사서 신고 돌아왔어요. 산장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할머니가 이 눈을 뚫고?' 3박4일간 천왕봉·뱀사골·노고단을 거쳐 성삼재로 내려왔어요.자신이 생기더군요. 2005년 국토종주에 도전했어요. 남편(75)에게 "마누라는 40일간 길 떠나니 알아서 차려 드시라"고 했어요. 떨리더군요. 땅끝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하루 40㎞씩 혼자 걸었어요. 이틀 만에 두 발이 물 담은 비닐봉지처럼 부풀었어요. 20㎝ 길이 무명실을 꿴 바늘을 양쪽 발에 각각 10개 넘게 꽂고 잤어요. 정말 무지하게 아프더군요. 왜 안 아프겠어요? 밤새 실을 타고 흐른 물이 3만원짜리 여관 방바닥을 축축하게 적셨어요. 이튿날 신발을 신고 일어서다 "인어공주가 땅을 디딜 때 이랬나 보다" 했어요. 하지만 견디고 걸었어요. 차츰 두 발이 얼얼하게 마비됐어요. 열흘 뒤 물집이 벗겨지고 발바닥이 단단해졌어요.

 

 

 

                            ▲ 2007년 스페인 도보여행길에 나선 황안나씨. 그는 환갑 넘어 시작한 도보여행으로 책도 세 권 쓰고 방송에도 출연했다. /황안나씨 제공

 

 

  할머니가 국토종주에 성공한 게 소문나서 KBS '아침마당'에 나갔어요. 주위에서 "책을 쓰라"고 할 때마다 손사래를 쳤는데, 젊은 편집장이 집까지 찾아와 "수다 떨듯 쓰면 된다"고 했어요. 용기를 내서 쓴 첫 책이 8쇄까지 찍었어요. 제목은 '내 나이가 어때서'(샨티·2005년). 책이 나온 날 떨리는 마음으로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서성거렸어요. 중년 남자가 내 책을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어요.찡했어요. 말은 못하고 살았지 만 어릴 때 대학 가서 작가 되는 게 꿈이었거든요. 하지만 가난했어요. 사범학교 졸업반 때 시골역장 하시던 아버지가 간경화로 쓰러졌어요. 생활 책임이 6남매의 맏딸인 제 어깨로 옮아왔어요. 막냇동생은 두살이었지요. 몸져누운 아버지가 나를 나무라기에 "아버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느냐"고 꽥 소리쳤어요. 그때 아버지 눈빛이 지금도 짠해요.시집간 뒤에도 가난을 못 면했어요. 남편이 사업에 10번 넘게 실패해서 번번이 제 봉급이 차압됐지요. 빚 갚다가 나이가 쉰이 됐어요. 그런데도 남편이 밉지 않았어요. 그이가 애쓰는 줄 알았으니까. 첫 아이 가졌을 때 중국집 쇼윈도에서 물만두에 김이 확 피어올라 입맛을 다셨어요. 남편이 "돈 많이 벌어서 물만두 사줄게" 했어요. 그만한 돈도 없는 마음은 오죽하랴 싶었어요.그이 사업이 망할 때마다 "노력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안 풀릴까" 안타까웠어요.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남편 사업이 궤도에 올랐어요. 물만두 사줄 돈도 없던 남자가 직원 50명 두고 샤워 꼭지 만들어 수출하는 사장님이 됐지요. 사글세 살다 쉰네살 때 처음 내 집으로 이사 가던 날, 식구들이 잠든 뒤 집안을 서성이며 벽도 만져보고 바닥도 쓸어봤어요.인생은 이상해요. 젊어선 입고 싶은 옷도 많고, 갖고 싶은 가방도 많았는데 돈이 생기니 100만원 넘는 옷을 사 입어도 흥이 나지 않았어요. 그때 도보여행이 제게 참된 재미를 가르쳤어요. 국토종주 마친 뒤 110일 걸려 한반도 해안을 일주했어요(통일전망대~부산~목포~강화도~임진각).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잠을 안 자고 100㎞를 걷는 '울트라 걷기 대회'도 두 번 완주했어요. 네팔·티베트·스페인 등 30여개국도 다녀왔고요.걸어보면 알아요. 세상은 아름답고 사람 사는 데 필요한 건 많지 않아요. 배고플 때 먹을 수 있고 캄캄할 때 조그만 몸을 누일 수 있으면 족해요. 류시화씨가 '9월의 이틀'이라는 시를 썼어요. 엊그제 젊은이들과 어울려 물 소리·새 소리 그윽한 충북 괴산 숲길을 걷다가 그 시를 떠올렸어요. 뭉클했어요. "이보다 좋을 순 없어. 지금이 내 인생의 '9월의 이틀'이구나."

 

- 조선일보 입력 : 2011.07.06 22:42

 

구월의 이틀

류시화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 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 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 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 온다해도 나는

소나무 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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