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뭇별이 들려주는 이야기(마음글)

'따뜻한 완서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2. 2. 10:44

 

'따뜻한 완서씨'

김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대우

 

 

2008년 4월의 어느 날 소설가 박완서씨가 전화를 걸어와 "며칠 전 '일사일언'을 쓴 최영미라는 분 전화번호 좀 알려달라"고 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돈을 좀 보내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다.

 

사연은 이랬다. 조선일보 문화면에 연재되는 '일사일언' 그달 5일자에는 국악방송 진행자였던 최영미씨가 쓴 '여성 노숙인을 돌아보는 이유'라는 글이 실렸다. 최씨는 여성노숙자 쉼터인 '열린여성센터'의 전세 입주금 마련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기획해 3년간 1억원을 모았다. 그러나 전세값이 너무 올라 집을 구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달 26일자 일사일언에는 그 후속 얘기가 실려 있다. "열린여성센터가 드디어 월세 집을 청산할 모양이다. (…) 한 저명 작가가 '여성노숙인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며 익명으로 1000만원을 기부해주셨다. 난 전화를 받으며 목이 메었다."

 

돈을 보낸 저명 작가는 박완서씨였다. 지난달 22일 박완서씨의 타계 소식을 들은 최씨는 열린여성센터 식구들과 빈소를 찾았고,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유족들에게 고인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을 전했다고 한다.

 

박완서씨가 생전에도 어려운 이들에게 돈을 보낸 사연이 수혜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곤 했다. 작년 이맘때 자택에 취재하러 갔다가 '전화 기부'의 기억이 떠올라 연유를 물었더니 박씨는 싱긋 웃으며, "남들 사는 얘기를 들으면 그 사람의 처지가 떠올라서…"라고 했다. 박완서씨의 대답은 마음이 착했던 노(老)작가의 소박한 고백이었지만, 문학이 창작되고 읽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도 손색이 없다. 남이 사는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작가와 독자 모두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상상력을 발휘해 소설을 쓰고 작품을 읽기 때문이다.

 

문단에 알게 모르게 선행(善行)을 베푸는 이들이 많은 것도 남의 인생을 상상하며 사는 것이 업(業)인 문인들의 고상한 직업병일지 모른다.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에서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고 썼던 유안진 시인은 2000년부터 지금까지 경북 안동의 한 재활원에 후원금을 보내며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씨와 김용택·안도현 시인 등 작가 190여명은 아름다운재단이 2003년부터 시작한 '나눔의 책' 사업에 인세를 기부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생애 마지막 소설집인 '친절한 복희씨'를 냈을 때, 박완서씨는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연민이라는 생각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박완서씨는 지금쯤 천국의 독자들에게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거룩한 성인의 몫일지 몰라도 남의 처지를 생각하고 돕는 것은 소설 읽을 때의 상상력만 발휘해도 가능해요"라며 '연민의 창작론'을 펴고 있지는 않을까.

 

                                                                     2011.02.02 조선일보 A30면

'뭇별이 들려주는 이야기(마음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정권 시인  (0) 2011.02.21
뼈저린 외로움   (0) 2011.02.18
어떤 주례사  (0) 2011.01.30
나는 나를 믿어   (0) 2011.01.03
‘통큰치킨’과 ‘공정한 가격’ 논란을 보며  (0) 2010.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