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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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전갈/ 류인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1. 24. 00:09

전갈/ 류인서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

 

                                                     -  시와 시학 동인시집. 2 『백지, 흰 어둠을 받쳐 들다』 2009 수록

 

 긴 기다림이 그리움을 만든다

 

 언제 편지를 써 보았나? 이메일 말고 편지지에 쓰고 봉투에 넣고 봉인을 하고 우표를 붙인 다음 우체국이나 빨강 우체통으로 총총 걸음을 옮긴 적이 언제였나? 세금 고지서, 교통 벌칙금 통지서 그런 것 말고 내가 듣고 싶은 말, 간절하게 들어야 할 말을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쓴 그런 편지를 기다린 것이 얼마나 오래 되었나?

 

 「전갈」은 동음이의어를 찾아내어 발상의 새로움을 담아낸 시이다. 소식의 다른 뜻인 전갈과 치명적 독을 가진 사막의 전갈을 동의어로 사용하면서 품사의 전화 轉化를 이루어 낸 1연은 상큼하다. 화자의 기다림대로, 바라던 바대로 편지의 내용은 달콤했으리라. 음지식물인 버섯이 웃고 음습한 곳에 꽃처럼 피어나는 푸른 곰팡이까지 웃을 수 있는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다. 그러나 마지막 연의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는 의미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더 기다려야 한다는, 그리하여 여름 뙤약볕에 몸을 사루어 내일을 기약하는 씨앗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언은 그리움을 영글게 하는 기다림이 시간의 흘려버림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성숙의 계기임을 일러 말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