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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존재가 사라진 세계에 던져진 풍경의 기록 - 최윤경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4. 30. 16:31

존재가 사라진 세계에 던져진 풍경의 기록

나호열(시인)

 

 변화무쌍한 요즘의 날씨는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삼한사온이 사라진따뜻한 겨울인 듯 싶더니, 3월에 내리는 폭설, 다시 영하로 떨어지는 4월의 수은주는 외부 환경에 적응하려는 민감한 몸의 반응을 일으킨다. 따뜻함에 적응하기 위해 몸이 덥혀지는 순간 급강하하는 기온은 원활한 근육의 이완과 수축작용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불쾌한 감정을 유발시키면서 유연하고 강건했던 젊은 날의 기억을 아프게 되살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 개인의 건강상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싼 환경의 급격하고 신속한 변화는 주체성과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고 급기야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가는 제도와 의식의 급류를 헤쳐 나가기에 필요한 처방은 탈이성 脫理性, 또는 본능적인 원초적 반응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면서 이 예감이 불편한 진실이 아니기를 희망하는 나약한 자신을 둘러보게 만든다. 한 마디로 현대인에게는 일생에 반드시 겪어야만 홍역처럼 ‘불안’이라는 괴물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숙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조건에 대해 되묻는다. 주인공 그레골 삼사가 어느날 거대한 독충 毒蟲으로 변해 버렸을 때, 그의 가족은 그를 한 마리 벌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아들과 오빠로 대한다. 왜냐하면 그레골 삼사에게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의식이 살아 있으며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한 개인이 지녀야할 주체성과 정체성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의 가족들은 그레골 삼사를 인간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한 마리의 독충으로 대하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독충으로 변한 그를 처음에는 인간 그레골 삼사로 인정하다가 종국에는 독충 그 자체로 내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변신』은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예기치 않은 위험과 돌발상황에 수없이 직면하면서 영위되는 위태로운 일상은 늘 불안하다. 불안의 회오리, 보장되지 않는 안락을 위해서 분투하는 나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최윤경의 첫 시집 『햇살을 부르다』를 평하는 자리에서 필자는 시인이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노을’, ‘나무’, ‘바람’, ‘가을’, ‘낙엽’, ‘어머니’ ‘눈 雪’ 등의 주제어를 주목하면서 시인의 시적 자아가 '눈물'임을 밝힌 바 있다. 즉, 이 세상은 슬픔 그 자체인 까닭에 시인은 눈물로서 슬픔을 정화하는 과정을 詩化하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신작 시편은 과거의 수동적인 체념의 서정에서 벗어나 보다 냉철하고 시니컬한 정조로 일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냉철함과 그에 따르는 시니컬한 정조는 일상의 불안함과 맞물리는 정체성의 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착하고 바르게 살아라

-건강해라

-인사 잘 해라

잔소리 같이 들리던

부모님 말씀이 경전처럼

엮이고 엮여서

이따금 꺼내어보면

너무 깊이 파인 말들이

온 몸으로 돋아난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그 어디에 쓰여 있지 않았어도

가슴으로 새겨 둔 말들

경고의 글로 눈이 먼 채

오래도록 잘도 살아있다

                            -『경고 警告』마지막 연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인간은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이 지닌 본질과 속성에 대한 자각 없이 타자와는 또 다른 독립성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자 하는 주체성이 수반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압박하여 오는 사회화의 압력을 견뎌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심리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인간의 사회화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 연령대에 주어진 발달과업을 원활하게 수행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즉 청소년기에는 타자와의 협동과 봉사, 배려 등의 학습과제가 주어지며 청년기에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취업, 결혼 등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마쳐야 한다. 어디 그 뿐인가!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양육하고 노년기에 들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보존할 때까지의 과정은 끊임없는 사회화의 문제를 던져준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와 주체성, 사회화는 아무 탈없이 융합되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 대답은 정반대일 것이다. 존재를,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면 할수록 오히려서로를 간섭하고 길항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경고 警告』는 이와 같은 명령과 순응으로 직조된 인간의 삶이 온전히 자신의 존재로 귀착되고 있는 지 반문하게 한다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경고의 글로 눈이 먼 채/오래도록 잘도 살아있다"는 언명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경고임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난치병인 불안은 외부적 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이와 같은 내면적 불화와 갈등으로부터 빚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주 작은 틈을 비집고

가슴 미어지게 싹을 틔운다

파랗게 물오르다가

초록빛 이파리 흔들리다가

물들인 낙엽으로

발길에 차여 찢어지고 부서져

양분의 거름이 되었다

한 때 기쁨 이었다가

또한 눈물 이었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었다

                        - 『꿈 』전문

 

 위의 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싹, 초록빛 이파리. 낙엽은 사실은 동일한 본질(정체성)을 가졌으되 다른 양태를 지닌 하나의 존재이다. 작은 틈을 비집고 태어나 발길에 차이고 찢기는 존재 또한 시간의 궤적만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헛된 꿈일 뿐이다. 정말 그럴까? 과연 꿈과 현실은 모순개념일까? 꿈과 현실 사이에는 한 치의 빈 틈이 없는 것일까? 현실이 허상이라는 인식을 가지려면 더 나아가서 꿈을 꿈이라고 이야기하려면 생각하는 주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꿈과 현실은 모순개념이 아니라 반대개념으로 정의해야 마땅하다. 현실이 꿈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주체는 현실과 꿈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나'와 타자'이다. 이 '나'와 '타자'는 실제로는 하나의 잎이 싹으로, 푸른 이파리로 물든 낙엽으로 불리우듯 동일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사회화된 '나'의 행동은 '타자'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온전히 나의 사라짐은 타자의 현현이고 타자의 사라짐은 복제된 나의 현현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절망으로 덧 씌워진 듯이 보이는 최윤경의 시편들은 절망을 가장한 존재에의 갈망을 환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절벽위에서 발자국 남기지 않고/걸어가는 법을 배운다 (「경계의 끝」부분) , 눈을 뜨면 시작 되는 건/ 딱딱한 나무를 쪼는 일 ...(중략) 부동자세의 취침 시간은/늘 허기가 진다( 「지극히 일상적인」부분)와 같은 표현들은 환멸에 가까운 생의 기계화를 증명하는 작업과 일치한다.

 

 최윤경의 여섯 편의 시들은 예전의 시인이 노래했던 서정적이고 여성적인 정서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예전의 시들이 흐린 세상을 눈물로 맑게 투사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물이었다면 신작시들은 보다 세밀하고 확대된 현미경의 초점으로 존재의 허상에 맞춰져 있다. 그의 작업은 지금껏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실들을 전복하여 그것들이 허위라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다. 사실 세상이나 인간이 타락했다든가 추하다든가 하는 것은 편견이나 억측에 불과할 지 모른다. 나찌가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것이나 성전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는 일이나 선과 악을 법의 잣대로 재단하는 일이나 자신의 신념이 진실이라는 잘못된 편견에 근거하고 있을 지 모른다. 인간이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이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는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합리적 이성도 따지고 보면 파편화되고 분지된 편견의 다른 이름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시계바늘 소리 잠들다」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고, 그런 까닭에 전력투구하여 찾아내려고 했던 자아의 존재증명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이 누워있는 침상은 공허하다

거친 숨소리

가슴속에 있는 응어리 끄집어내려고

안간힘쓰는 호흡이 가늘게 흔들린다

숨죽여 떨어지는 링거액

맥박을 그려내는 그래프도 졸고 있는 시간

아침을 향하여 가는 길은

아슴아슴한 추억과도 같아

가습기에서 내뱉어지는 호흡이

좀 더 거칠게 공기와 맞닿으면

흐물흐물해져 버린 시간

낡은 生이 흘러간다

끼워지지 않는 고리

맞추어 가려 애쓰는

시계바늘 소리 덧없는 버려진 세상

버튼 하나로 고통 없는

마침표를 찍는 방법을 터득하려

숨 가쁜 삶이 쉬고 있다

잠들어 있는 모두를 위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병상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시계바늘 소리 잠들다」는 놀라우리만큼 냉정한 시선으로 환자를 응시하고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물체는 몸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며 어둠 그 자체일 뿐이다. 나는 나의 몸을 장악할 수도 없고 제어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라는 의식 자체도 포획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워있는 것은 어둠일 뿐이다. 어둠이 링거를 맞고 있고 안락의 시간을 향해 호흡을 하는 것은 마침표를 찍는 방법을 터득하는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다.

 

 나는 살아 있고, 나는 네가 아니라 완벽한 나일 뿐이라고 외치는 것이 과연 현실인 것이냐고 시인은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해 시인도, 그 누구도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 물음에 대한 현답은 침묵일 것이라는 생각도 잠들어 있는 모두를 위해/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는 꿈에 불과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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