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젖음, 생명의 근원을 묻는 고통의 熟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8. 20. 16:17

젖음, 생명의 근원을 묻는 고통의 熟考

 

 

                                                 나호열( 시인, 『시와 산문』편집위원)

 

  이경교 시인을 만난 것이 삼 년 전쯤일까? 내가 잠시 몸담고 있던 문학회의 초청 강연자로 짧은 해후를 했을 때, 그의 단호한 어조와 형형한 눈빛에 놀라고, 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단련이 무엇인가를 그는 이미 알아채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같은 해에 같은 잡지로 등단을 하고 또 몇 년 간을 함께 동인활동을 해 왔다는 인연으로 만났다가 각기 자신의 길로 걸어갔던 이 십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친밀함(?)이 퇴색하지 않았던 것은 『이응평전』( 1988), 『꽃이 피는 이유』( 1990), 『달의 뼈』( 1994), 『수상하다, 모퉁이』 (2003)에 이르기 까지 한 번도 잊지 않고 보내 준 그의 시집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명한 서정과 어우러지는 비감 悲感, 쉬임 없는 언어의 담금질에 투영된 그의 시에 대한 인상은 그와의 連帶感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지루한 장마가 주는 눅눅함과 폭염에 속수무책인 몸처럼 그의 시 앞에 나는 무력하게 서 있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 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김현)는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화두로 삼아도 됨직한 원초적 질문에 아직도 명확한 답변이나 창작의 방법론을 내놓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에 비해서 이경교 시인의 내적 분발은, 이미 단호한 어조와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 '쓴다'는 행위는 어쩌면 한 번 사랑함으로써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수펄의 생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침이 닿는 자리마다 꽃은 꿀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나의 시도 꿀 같은 생의 정수가 되길 희망하며...”( 시집 『ㅇ평전』自序)과 같은 첫 시집을 엮으며 정의했던 그의 시관 詩觀이「전환, 하이퍼, 파괴」(『문학과 창작』2002.7월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명되고 있다.

 

  기성세대들은... 아직도 그들은 확실성에 익숙하며, 중심과 주변, 주와 객을 따지는데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면 남이거나 적이라는 편협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대, 질서를 무질서로 전환하는데 인색한 세대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비슷비슷한 사유의 한계, 상투적인 이념의 한계, 안일과 나태로 함몰된 철학성, 낡은 감수성, 고갈된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치열성이 사라진 자리엔 실험의식이나 새로움을 창조할 여력조차 남지 않는 법이다. 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기성 문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이 여기 있다.

 

 시관 詩觀이라고는 했지만 그의 첫 시집 자서 自序나 평론에 드러난 견해를 '시의 정의'로 받아들이기는 성급한 것이다. 시의 정의는 잠시 뒤로 물려두고 '시'라는 정체불명의 그림자 앞에서 그 그림자를 어떻게 포획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간(시인)의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의 언명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성을 찾아내려는 도구로서의 시에 대한 인식과 정체되지 않고 부단히 변화해가는 의식의 분발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철학의 진리관에서 보면 삶의 진정성은 이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불변의 이데아이다. 그런가 하면 기성문인에게 촉구하는 관습과 일상성으로부터의 탈피는 프래그마티즘이 Pragmatism 즐겨 주장하는 진리의 가변성을 함의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논리적 모순에 부딪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에 대한, 인간과 문학에 대한 일관적 태도가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야 한다는 창조성과 과연 행복하게 융합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순은 이경교 시인의 시를 일별하면서 풀어야 할 문제이고 시인 이경교가 지향하는 진정한 삶과 창작의 방법론을 규명하는 열쇠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한 권의 시집도 아니고 삼 십 년에 가까운 창작활동 끝에 태어난 수 많은 작품에서 대표작 몇 편을 고르라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그것도 시인 스스로에게 내민 선택권은 가혹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그런 편집자의 주문에 시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 지 궁금하지만 아마도 시인에게 망설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고른 다섯 편의 대표작은 모두『수상하다, 모퉁이』 (2003)에 수록된 시들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수상하다, 모퉁이』이전의 시들을 과감하게 파기했던 것일까? 혁신과 파괴의 시학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지난 시절의 섬세한 서정과 지사적 시풍을 일거에 버리기에 시인으로 첫 출발을 할 때의 '나의 침이 닿는 자리마다 꽃은 꿀이 되어줄 것을 믿는다'는 결의는 너무도 강렬하지 않았던가? 필자의 억견일지 모르지만 그가 골라 뽑은 대표작은 독자가 뽑는 대표작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시집들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라면 최근의 작품들 보다 초기의 작품들에서 더 큰 감동을 받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정서의 농밀함은 여전하지만 그의 대표작이나 신작시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깊은 은유보다 더 묵중한 상징의 숲이 시의 전편에 깔려 있는 까닭에 감상 차원의 시를 읽는 사람들이나 난해시를 비판하며 쉬운 시를 지향하는 시인들에게는 까다롭기 그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경교의 시는 최근에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이는 근거 없는, 좌충우돌의 우연적 상상력에 기대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시는 탄탄한 논리적 구성과 즉물화된 관념을 배제하는 독특한 시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땅거미 지는 이 시각, 밀려오던 어둠이 일순 정지하였다

까마귀 한 마리 잿빛 마을을 가로 질러 날아간다

무슨 빛깔의 소리에 이끌려 지구가 기우는 순간

나는 다리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선 어둠을 예감할 때가

진정한 어둠이다

어둠이란 언어까지 지워버린 뒤 찾아올 밤은

어둠이라 말할 수 없다

까마귀의 날개짓마저 켜버릴 것이므로

하지만, 아직 입술의 윤곽 희미하게 남아있는

저물녘 안개 다리 끌며 내 앞을 스쳐갈 때

죽음이 들불처럼 번지는 저 소리

어둠을 한 발 앞서 맞이하는 이 순간

이제 나는 다리 위에서 곱게 지워져야 한다

아니, 까마귀와 함께 잊혀져야 한다

등 굽어 발 밑 푹푹 꺼지는 아버지*

나는 지금 그 분께 가고 있다

아버지는 아니 계시다!

봉분의 흙도 마르지 않은 저 어둠 속 어디

검은 꽃잎만 화석이 된 이 길

 

 이 시는 『수상하다, 모퉁이』에 수록된 「어둠, 길 화석」이라는 시이다. '인물시의 유형' 이라는 강의 자료로 이 시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을 때의 난감함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시의 말미에 주석으로 붙어 있는, '* 이우목 (李愚穆 1925- 1998) 역사에 등재될 수 없는, 이름없는 농부로 평생 살았다. 일제의 징용에서 탈출하였으며, 1950년 인공군에 편입되었으나 다시 탈출하였다. 그래서 그는 질곡의 우리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를 증거한다.'는 설명으로도 시의 요의를 체득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매헌이라든가, 매천이라든가 하는 우국지사나 역사적 인물을 詩化하거나 부모와 같은 피붙이에 대한 회억을 토로할 때의 과잉된 정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시집『달의 뼈』( 1994) 말미에 시인은 아버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일찍이 상처하고 새 장가를 들었는데 인공군에 징집되어 가는 도중에 옻나무 잎으로 용변을 처리한 탓에 옻에 옮아 대열에서 격리되어 탈출하였다고 한다. 시인은 「역사의 碑」에서 아버지의 일화를 소개한 후 이렇게 적고 있다. " 우리 시대의 평온과 무감각, 고민을 상실하고, 연민이 사라진 시대는 태평성대도, 감수성의 시대도 아니다. 본질을 잊은 채 껍질에만 급급한 삶을 문화란 미명으로 위장하는 그 허위를 나는 거부한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해답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방식으로 반드시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시인의 태도를 이해할 때 이 시는 형체를 드러낸다. 지구의 흔들림, 어둠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거대한 법칙이다. 인간은 이곳과 저곳 -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이항 대립은 무수히 존재한다- 을 이어주는 다리에 서 있고, 기억 속의, 현존하지 않는 아버지, 검은 꽃잎으로 표징되는 어둠의 화석으로 영원히 역사에 등재될 수 없는, 이름없음으로 남는다.「어둠, 길 화석」은 필연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무상함을 직시하면서도 어둠에 동화하지 않고 차라리 화석이 되어버리는 장삼이사의 적멸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경교 시인의 시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이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그러나 결코 본질 자체를 정의할 수 없다는 절망감을 내포한 채 항해를 거듭하는 과정 속에 놓여 있다. 그가 내놓은 대표작이 가장 최근의 시편이라는 사실은 그가 이전의 그의 시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이전의 시들은 시인의 삶의 지반으로 침강沈降함으로써 기꺼이 새로운 시들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근거를 갖게 된다.

 

  이 세상에는 이름에 걸맞는 아름답고, 훌륭하며, 감화와 교훈을 주는 시들이 있다. 읽히지 않는, 기억되지 않고 노래로 불리지 않는 시들은 얼마나 허망한가!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독자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시를 전파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눈치를 본다. 새로움의 충격을 선사하기 위하여 일탈과 이른바 상상이라는 모험적 사색을 거듭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위대한 사상에 입술을 대고 달콤한 액즙을 빨아들이는 시인들도 존재한다. 한 마디로 학 學 은 넘쳐 나는데 습 習 은 찾아보기 힘든 세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시란 무엇인가?'를 해결하고 난 후의 행위는 기교에 빠지기 쉽다. 한 생애를 통해서 시인은 시를 써 가면서 시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한다. "친구들의 내왕마저 뜸해진 서울 변두리의 달 밝은 밤에 나는 닫혀진 것의 소중한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달팽이나 올빼미, 마늘이나 양파, 그리고 달의 뼈는 그 속에서 만난 사물이거나 관념들이다. 이제 어떻게 궁핍한 현실을 넘어 내 속내를 다스리고, 정신의 속살 깊은 곳 까지 다가가는가 그것이 문제다. 나는 그지없이 외로우므로 행복하다.( 『달의 뼈』)" 는 격절의식은 시작 행위의 목적을 온전히 영혼의 청결성을 찾으려는 열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경교 시인의 첫 시집 『이응평전』의 평설 評說에서 시을 읽는 기쁨이 시 속에 내재된 영혼의 청결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발견하지 못한 ) 영혼의 청결성을 시에서 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인의 영혼이 청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후소 繪事後素의 다양한 해석만큼이나 영혼의 청결성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영혼이 청결해야 할까? 아니면 영혼의 청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시를 쓰는 것일까? 그도저도 아니면 시인과 시와 영혼의 청결성은 아무런 연관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컨대 이경교 시인이 수 십 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온 정신적 기반은 영혼의 청결성을 찾기 위한 시 쓰기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회적이고 창 없는 모나드의 운명을 지닌 개체의 고양 高揚이 이경교 시인의 덕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꽃이 피는 이유』에 수록된 산문「삶의 흰 뼈에 이르기 위하여」에서 시인은 만해를 가장 존경하고 만해의 정의감과 '석가도 본래 보통사람'이라는 말씀을 각인하고 있다고 술회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시 쓰기는 투철한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시 쓰기의 수련을 통해서 영혼의 청결성은 물론 정체불명으로 뒤로 돌려 놓았던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려는 적극적 의지를 내보이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응평전』의 평설 評說이 이경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꽃이 피는 이유』의 서문으로 재수록되고 있는 것에서 시인의 태도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체 体를 바탕으로 시의 방법론으로서 용 用의 문제는 이경교 시인의 체험적 시론에서 '감응'의 시작법으로 드러난다. 즉, '시인이 오브제를 선택하는 행위는 시인의 감수성 속으로 대상을 끌여들여 적시고 건져내는 행위' 로 규정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 광포한 상상력의 폐해를 지적한 바도 있지만 그것은 상상력의 발휘가 문제가 아니라 상상력의 근거를 물을 때 파생되는 문제이다. 시인에 따르면 대상의 변형과 재조합은 마음의 감동, 즉 浸禮가 행해졌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사물, 현상, 대상과 시인의 정신이 혼연일체가 되기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기계적 의인화가 아닌, 진실한 말 트기가 되기 위해서는 고독을 인내하는 영혼의 청결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과정을 필자는 젖음의 시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근대적 이성의 이분법적 분해가 아니라 사물과 정신이 서로 젖고 적시는 과정(감응)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을 함유하고 있다. 서로에게 생명을 건네는 은밀한 내통이야말로 이경교 시인의 시를 상징의 크나큰 품으로 이끄는 통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대표작) 이경교. 5편

 

꽃사태

지상의 모든 무게들이 수평을 잃기 전, 다만

햇빛이 한번 반짝하고 빛났다

저 꽃들은 스스로 제 안의 빛을 견디지 못하여

그 광도光度를 밖으로 떼밀어 내려는 것

야금야금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스스로 빛의 적층을 이루던,

빛도 쌓이면 스스로 퇴화한다는 걸 알고 있는지

도대체 누가 그 붉은 암호를 해독했을까

이웃한 잔가지 한번 몸을 떨 때마다

일제히 안쪽의 문을 두드려 보며

더운 열꽃처럼 스스로 제 체온을 덜어내려는

꽃들의 이마 위엔 얼음주머니가 얹혀있다

체온의 눈금이 떨어질 때마다 연분홍 살 속에 꽂혀있던

눈빛들은 다시 컴컴한 안으로 되돌아 가야한다

몸을 흔들어 수평을 허무는 꽃들이

어두운 고요 속에 일제히 틀어박힐 때

문을 닫기 전, 다만

햇빛이 한번 반짝하고 빛난다

 

 

미역줄 나무

 

미역줄 나무가 내 살갗 가장자리로 뾰족한 톱니를 내미네 나는 노박덩굴과에 딸린 갈잎덩굴 식물이 아니라, 어느 땐가 미역치란 바닷물고기의 등줄기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었네 추억이란 톱니가 우리를 찌르는 것처럼 나는 베이기 쉬운 잎새였으며, 한번쯤 누군가의 살갗에 박힌 가시였는지 모르네 저 미역치란 가시고기의 과거가 미역줄 나무였듯이 나도 그쪽의 유전인자를 지니고 있던 시절이 따끔따끔, 통증을 몰고와 흉부와 늑골사이가 들쑤시네

 

 

부음을 받다

 

나무들이 뻑뻑해진 눈망울을 거두는 저녁

문상을 깜빡 잊고 있었네 갑자기 나무의 어두운

그림자가 잎들이 잠잠해진 틈을 타

부음을 전해왔네

나무의 여린 속잎들도 귀를 열고 있었는가

살아서 지나온 길만큼, 캄캄한 죽음을 알까

화신花信처럼 전해진 부음이 사실은 꽃잎 한번

흩날리는 틈새, 잔가지들의 손사래 마냥 가깝네

저녁이 깊어 벽 속까지 조용해질 때

내 삶은 얼마나 소란스런 도랑물인지

한결 가벼워진 꽃잎의 무게가 알리네

마음도 해뜨고 저무는 걸까

몸을 어둠에 맡긴 그의 얼굴 이젠 떠오르지 않네

문상 가는 길, 꽃잎은 모두 화살표가 되네

화살표가 가리키는 저쪽, 영안실 문지방 넘어설 때

나무 그림자가 나의 부음을 전하네

 

 

안개는 둥글고

 

다리 천천히 끌며, 안개밭 지날 때

내 눈은 은회색으로 저문다

예민한 잎새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고

새들의 흐린 눈에 알전구가 켜진다

나의 창은 비릿한 졸음, 나의 정원은 잠의 숲이다

지금 반짝이는 건 안개의 눈이 아니다

절뚝절뚝, 다리 끌며 건널목을 지나가는 저건

기억이란 이름의 기차다

건널목은 추억의 저쪽까지 뻗어있다

신호등 불빛이 지워진 안개 교차로

은회색 그림자 마디마디 끊어진다

추억은 언제나 느릿느릿 모퉁이를 돈다

안개의 모퉁이는 둥글다. 기다림도

저처럼 모가 지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예각의 축축한 골목길을 서성인다

내 사랑은 아직도 은회색이다

칼날캍은 저 잎새들도 둥글고 싶어졌는가

안개 속에 슬며시 목을 디민다

 

저녁비

 

나 폭풍우 몰아치던 어느 저녁을 거슬러

그대의 언덕에 이르네

별꽃 지는 자리마다 세상은 물에 불어

내 안이 갑자기 축축해지네

습기 걷히고 햇살 눈부시던 시기도 있었으나

비바람에 얼굴 묻은 채

다시 저녁이 올 때

내 혈압의 눈금도 보랏빛으로 저물어 가네

이별이란 별똥별처럼 꼬리를 끌며

저녁마다 이어지는 것

어두운 습곡의 한 때, 나의 현은 눅눅해져

떨림판을 오래 울리지 못하네

소리의 부스러기들 꽃잎처럼 떨어져

세상의 무덤이 젖네

나, 비 개인 저녁을 거슬러

그대의 언덕에 이르지 못하고 마네

 

 

신작시 5편 . 이경교

 

 

안개, 연금술

 

내가 그대 향해 고개를 들자, 서리꽃 한 송이 눈을 뜹니다 순은으로 빛나는 꽃의 자궁, 그대 몸의 어느 부위에서 안개비 양수 터지고, 입을 오무려 안개젖을 빠는 사물들, 얼굴이 지워지면서 연금술 안쪽으로 길이 뚫립니다 저건 언제 죽었던 풍경일까요 숲이 증발한 자리에서 태어나는 무덤과 아이들, 다시 한 여자의 자궁이 열리고, 안개비 양수 흐릅니다 살아있는 건 스미는 일이었음을, 젖빛 바다에서 부활하는 저 서리꽃은 누구의 입김일까요

 

내 안의 현악

                    ―강은일의 해금연주, 오래된 미래―

 

내 눈물샘 속으로 누군가 깊이 빠지네

공기방울은 캄캄해지자 못 견디게 외로워지고

해안선 흰 테두리가 몰래 벗겨지네

내 몸의 현을 건드리는 저 현악의

너무 오래된 비명은 안에 쟁여있던 울음이네

외로움도 낡으면 정겨워지는 법이어서

깽깽깽, 고음을 따라 맥박도 다급해지네

어느 먼 옛날, 숨가쁜 저 격랑을 나는 지나왔을까

나이를 더해가는 건 딱딱해지는 일이기도 하여

파도소리도 지치면 목이 쉬네

울컥울컥, 내 목젖 부위를 두드리는 파장

저 떨림도 방파제에 부딪히면

시큼한 맛으로 산화酸化하거나

내 눈물샘 속에 도로 빠지네

 

푸른 바위에 적다

 

모두들 누워서 죽을 때, 자 이제 나는 간다,고 서서 죽은

수도승이 있지 눈보라에 갇혀 산새들도 날지 않는 겨울

하늘, 달빛 야금야금 야위어 갈 때, 홀로 눈썹이

자라난 노승도 있지

누구 몸이 똥이며 뜰 앞의 잣나무란 말, 구름 문장

처럼 귓전에 흘렸던 것인데

번쩍, 달빛 칼날이 내 정수리를 겨눈다 아무래도

저 달은 잠과 생시의 중간쯤에 걸친 징검다리,

불을 숨긴 칼집인 모양이다

 

단풍잎 편지

가장 외진 자리만 골라 단풍은 불을 켭니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신지요 단풍도 외로운 걸

좋아한다고, 세상 누항陋巷의 골목마다

누구의 등불이 더 고운가 시합하듯이

지금 내가 당신께 편지를 쓰는 동안

내 마음 속 어두운 골목길에도 불이 활활

당겨지고 있습니다

산이 벌겋게 발열을 일으키네요

지금 내가 쓰는 편지지에도

붉은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내 마음은 왜

외진 응달쪽만 기웃거리는 걸까요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처음에 나는 무사武士였다. 내 칼이 한번 허공을 가르면 꽃잎의 머리가 기울어지곤 했다 그의 목에서 선혈이 떨어져 땅바닥을 환하게 적셨다 꽃의 이마를 가로지르고 있는 무수한 주름살들

죽은 꽃잎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히자, 내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창백한 꽃잎들이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렇게 화평할 수 없었다 갑자기 빛방울이 떨어져 내 얼굴을 덮었다, 따스했다

 

 

 

 

<체험적 시론>

 

시를 위한 몇 개의 단상斷想

이경교

1. 부활 시론

좋은 시인을 갖고 있는 시대는 분명 행복한 시대이다. 역설적으로, 시가 문화의 변방으로 떠밀리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 우리 시는 오히려 때깔이 짙어지고 깊이 또한 깊어지고 있다고 말하면 나만의 오해일까. 그것은 영상이 문화의 주류로 나서면서 개성을 잃기 시작했다는 내 진단과 짝을 이룬다. 상품성이 강조되다 보니, 영상물들은 유행의 물결에 휩쓸리거나 베끼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은 윤택해진 사회조건, 후기 자본주의적 욕망이 요구하는 자본으로서의 예술, 생산물로서의 예술이 빚은 비극이다. 예술성이 대량생산의 욕구에 부응하거나 화폐가치로 전환되는 세계는 황폐한 예술시대의 서막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시는 자유로운 장르이며, 버려짐으로써 높은 정신의 밀도가 유지된 예술분야이다. 이것은 분명 축복이다. 시가 죽은 시대는 오히려 위대한 시가 성장할 징후이며, 위대한 시가 출연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시의 고결성을 믿는 소수의 시인, 예술에 대한 집념과 그 잠재적 욕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실현될 것이다. 사실 그러한 조짐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2. 뜻밖의 정경

지구의 지하핵은 엄청난 용광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내부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하 2900킬로 안쪽의 핵 부분부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 정신의 어느 지점에서 돌연 마주치는, 저 극적인 변화야말로 깨달음의 상징이며, 전복적 반격의 다른 이름이다.

좋은 시는 극적인 변화 위에서만 가능하다. 세계의 반영이나 모사가 아니라, 전혀 뜻밖의 정경을 빚어냄으로써, 상투적 감수성이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을 이끌어내는 행위가 그것이다.

 

3. 차이로서의 자연

시는 시인의 내면화된 행동이다. 시인의 내면을 지배하는 요소 중, 자연에 대해 성찰해 보자. 자연이 더 이상 음풍농월의 잔재로 머무는 낭만주의 방식으로는 안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인공적인 자연은 혐오감을 줄 수도 있다. 시인에게 선택된 자연대상은 사실 시대인식의 반영이며, 시인의 세계관이 투사된 현장이다.

21세기의 자연은 어떤 모습으로 해석과 여과의 과정을 거치는 걸까. 탈근대적 시대의 자연은 전근대적 인식으로서의 자연과 분명히 다르다. 이 시대의 특성을 탈중심decentering 과 소멸disapperance 이라고 부르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더 이상 중심이나 권위를 용인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가 지적했듯이, 문화의 구조는 우열이 아니라 차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이들이 다양성을 낳는다. 자연을 보자. 자연이야말고 다양한 차이들이 다양성을 낳는다. 자연이야말로 다양한 차이들이 평등하게 존속하는 현장이다. 자연 속엔 단풍드는 수종이 있는가 하면 상록이 있고, 침엽과 활엽이 나란히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연만이 아니다. 인간관계 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타자지향적 세계관이 싹튼다.

시 쓰기란 무엇일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관계의 맥락으로 수렴되는 행위이다. 그 순간 시인은 이미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대상들 속에 자리한, 미소한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시의 영감이 빛나는 순간, 시인의 이상이 궁극에 도달한 유토피아의 상황인 것이다.

 

4. 열림과 번짐

시인의 사유방식을 열림과 번짐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건 닫힘과 쏠림의 반개념이다. 노자老子가 유약이 견강을 물리친다고 말했을 때, 그 진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드러운 사고와 유연한 감성만이 상투적 인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이란 제 몸 안에 새겨진 상처마저도 아름다운 문양으로 바꿔야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 물은 삼라만상을 제 안으로 끌어들여 모양을 빚거나 형태를 변화시킨다. 물거울에 비친 산과 나무를 보라. 그것은 분명 현실의 산과 나무지만, 뭔지 새롭고 다른 느낌의 산과 나무가 되곤 한다. 그래서 한번 물에 젖으면 모든 사물은 축축해지고, 더 선명해지며 부드러워진다.

 

5. 감응

시인이 오브제를 선택하는 행위는 시인의 감수성 속으로 대상을 끌어들여 적시고 건져내는 행위는 아닐까. 침례浸禮의 절차처럼, 시인은 자신이 골라낸 시적 대상들을 스스로의 감동 안으로 침수시켜 전혀 다른 양태로 그것들을 변형하고 재조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창조적 정서를 감응感應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말 그대로 감응이란 사물에 접촉할 때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시인은 잘 감동하고, 그 감동으로 인하여 마음이 열리는 사람이다. 하찮은 사물 하나에도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이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우선 대상과 시인 자신을 가르는 경계가 사라진다. 대상과 시인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좋은 시인일수록 사실은 그러한 감각적 착락을 자주 느끼는 법이다. 아니 그런 황홀한 신비체험을 빈번히 경험하게 된다.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는 대상을 자신의 감동 속으로 생포하는 일이며, 오브제들을 감응의 물로 적시고 헹궈내는 작업이다. 시인의 무의식은 언제나 그 일을 쉬지 않고 반복한다. 그렇다. 물에도 길이 있듯이 물에도 결이 있다.

 

 

충남 서산 출생

동국대 및 동대학원 문학박사

1986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이응평전」「수상하다, 모퉁이」등

저서 「즐거운 식사」「푸르른 정원」 등

현재 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

 

 

계간 <<시와 산문>> 2009년 가을호 게제

'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옹스님 토굴가  (0) 2010.01.31
먹고 사는 일  (0) 2010.01.27
황금빛 주단  (0) 2009.05.09
2070년 헤이리 카메라타  (0) 2009.03.24
제일 양장점  (0) 2009.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