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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28. 12:43

문학지 ,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나 호 열


 공급과 수요의 원칙이 있다. 공급은 수요에 따라 결정된다는 단순한 이 논리는 현실에서는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 공급이 수요에 과잉되거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 없이 부족할 때 시장은 혼란에 빠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공급과 수요의 균형은 시장의 혼란을 막고 공급자와 수요자의 상생과 공영에 필수적인 요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을 문학으로 돌려보면 상황이 그리 간단하게 보이지 않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문제들은 쾌도난마 快刀亂麻 의 해법으로는 수습이 될 것 같지가 않은 까닭이다. 혹자는 현 시대를 문학의 위기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혹자는 문학은 결코 멸망할 수 없는 장르라고 희망을 불어넣기도 한다. 우선 문학의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는 근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영상매체의 발전은 문학 독자를 떠나게 하고 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전율할 수 있는 매체들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다. 가뜩이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언어에 의한 해독 解讀과 그에 따르는 사유는 스피드를 따지는 디지털시대에 적합하지 않다. 가볍게 소비하고 부유하는 ‘존재의 가벼움’은 사상적, 학문적 기반을 토대로 하지 않더라도 일반화된 현대인의 모습이다. 거기다가 입시지옥으로 명명되는 우리의 학교교육은 인문적 사유의 싹을 키울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 누구도 그러한 피폐한 상황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예술의 향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육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인데 우리의 학교교육은 예술, 특히 문학적 정서 배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학인은 창작자 뿐만 아니라 독자까지도 아우르는 것인데 현재의 상황은 창작자는 과잉이고 독자는 소수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문학은 지리멸렬 그 자체이다.


 그에 반해서 문학의 위기를 반박하는 입장은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사유의 근거는 언어에 기초할 뿐 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은 보고, 듣고, 몸으로 느끼는 그 모든 현상들을 언어로 구조화한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인 이상, 사고를 구조화하고 논리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학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고,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문학은 소멸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문학은 - 다른 순수예술 장르도 마찬가지이겠지만 - 대중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문학의 위기를 거론할 때 적시하고 있는 교육이 수행되지 않고서는 문학의 위의를 알고 향유하기는 쉽지 않다, 즉, 문학은 다중을 향해 열려 있지만 교양을 갖춘 소수만이 문학의 위의를 체득하고 생활 속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현상은 지극히 마땅한 형국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학의 문제는 무엇일까? ‘공급과잉’과 ‘수요부족’이라는 사태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의 진실은 무엇일까?


다다익선 多多益善이라고 시인, 작가가 넘쳐나는 것이 모자란 것보다 낫다는 논리는 문학의 대중화라는 신념과 교묘히 맞물려 있다. 삼 백 여종이 넘는 이 땅의 문예지에서 쏟아내고 있는 시인, 작가들은 서로를 위무하고 작품을 소모한다. 다른 편에서는 그 실체를 인정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문학권력이라고 통칭되는 자본과 학연으로 얽매어진 집단들이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에 전파함으로서 일정 부분 상업적 이익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건전한 유통이 문학이라는 시장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다중과 소수를 소통시키고, 창작의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 작가를 발굴하고 양성하는데 필요한 잣대를 우리의 현대문학 100년사에 내려놓고자 하는 시도를 그 누구도 깊이 고민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계간 『시와 산문』이 지령 60호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2008년 겨울호에 게제한 <축하글>들은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빠짐없이 지적하고 있다. 예전과 달리 시인, 작가들은 인쇄매체에 연연하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통로는 불로그, 개인 홈페이지 등으로 다양해진 까닭에 유력한 매체가 아닌 이상 그 선호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독자와 창작자를 매개하는 문학지는 좋은 작품을 게제하기 위한 방도를 찾아야 한다. 그 방도는 첫 번째 적절한 원고료를 지급하는 일이다. 수많은 문학 잡지가 원고료 없이 작품을 게제하는 것은 우수한 시인, 작가들을 절망하게 하는 일이다. 당장은 열악한 현실을 타파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장기적 안목에서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태도는 단지 창작자들을 위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만나기를 바라는 독자들에게도 훌륭한 서비스가 된다. 두 번째로 문학지의 재정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함량 미달의 신인들을 마구 배출하는 것은 문학지들이 스스로 마시는 독약이다.

 세 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독자와의 간격을 좁히고 원활한 소통의 통로를 가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인, 작가들의 발굴이나 양성에 힘을 기울이는 만큼 독자들과의 현장에서의 만남에 주저하지 않아야 한다. 여건 상 난관이 많을지 모르겠으나 독자들이 참여하는 독서 토론회, 문학 강연, 독자와의 문학 기행, 백일장 등 작은 모임들을 활성화 하여 문학지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도 모색해 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시와 산문』은 여러 문제들을 살펴볼 때 과거보다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여러분들이 지적하신 내용 중에 시와 산문의 제호에 걸맞게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게제하여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소설, 평론과 같은 노작 勞作에 대해서 다소나마 원고료를 지급하고 있는 까닭에 많은 작품을 게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답변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신인 발굴에 있어서 인색하리만큼 엄정한 기준에 따라 배출한 시인, 작가들이 이제 웅비의 날개를 펼칠 때가 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시와 산문이 꿈꾸어 왔던  당찬 포부와도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계간  『시와 산문』 2009년 봄호 권두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