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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라의 시> 시간의 퇴적과 母川 회귀의 여정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3. 15. 12:45

 시간의 퇴적과 母川 회귀의 여정


                                                    - 이미라의 시 세계


                                         나 호 열 (시인, 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장)


자아는 어디에 있을까?


 이미라 시인의 첫 시집 『봄날의 반란』을 읽는다. 창작자와 독자의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전제를 염두에 두어도 여기저기 귀담아 들었던 문학의 가치가 정리가 되지 않는다. 대체로 특정한 어느 시대의 사회를 반영한다거나, 인생에 관한 여러 식견들을 알려준다거나 좀 더 본연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 수사적 표현의 절묘함, 자연에 대한 미학적 접근 등 문학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의미망은 몇 가지 관점으로 모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봄날의 반란』은 이러한 문학 행위의 효용성에 조용히 반기를 든다. ‘세계의 자아화’라는 일반적인 논거에 충실한 듯 하면서도 그 어떤 색깔로도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체취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좀 더 부연한다면 시집 전편에 일관되게 흐르는 서정은 ‘세계의 자아화’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자아’ 그 자체를 또 다른 ‘자아’에서 탐색하는 것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시 쓰기와 자아찾기 」에서 이은봉은 ‘자아를 발견하도록 하는 자아탐구는 타자탐구에서 비롯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아가 가장 먼저 인식하는 타자는 가족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들로부터 자아는 처음 타자를 인식하고 경험한다. 타자를 인식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주체가 저 자신을 작동시킨다는 뜻이다.’ 라고 주장하는데 이미라 시인의 시 쓰기는 바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발현하는 도구로서 작동한다.  가족이라는 중심으로부터 확산되어가는 계절의 변화, 여행, 이웃의 삶은 다 같이 시간이라는 연속성의 관계 하에 놓여 있다. 諸行無常이라든가 ‘만물은 유전한다’라든가 하는 삶의 유한함을 체득한다는 것은 오히려 운동과 변화 속에 놓여져 있는 부동의 자아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유발한다. 서양에서 이식된 현대시론은 작가와 작품이 관계를 별개의 독립적 구조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전통적 동양의 시학은 시를 詩言志 즉 性情을 가다듬고 인격을 도야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우세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미라 시인은 끊임없는 詩作을 통해  부지부식간에 자아를 갈고 닦으며 이 세상에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유형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독립된 실체로서의 ‘나’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자와의 관계에 놓임으로서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는 것은 시간의 경과에 이행되는 다양한 삶의 체험이나 체계적 지식 습득으로도 가능할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投射가 이미라 시인의 삶에 용해되어 있다는 사실이 『봄날의 반란』을 통독하면서 얻게 되는 귀중한 소득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원천적인 투사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받아들이게 된 - 선천적 성품과는 다른 - 정서를 말하는 것인데, 앞 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족이나 자연, 계절의 변화, 사물 등 다양한 소재를 시로 형상화 하면서도 그 각각의 핵심에는 세상을 긍정적이고 따듯하게 보는 힘, 맑은 눈이 한 치도 흔들림 없이 적확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 우문과 우답이 허용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대답을 할 것이다. ‘왜 시를 쓰게 되었나요?’ 라고 물은 후에 ‘아마도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이 세상에 돌려주려는 것은 아닌가요’ 라고 대답을 준비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봄날의 반란』이 이미라 시인의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헌사라는 것을.



부재는 상실이 아니다


『봄날의 반란』은 가족으로부터 특히 부모로부터 출발한다. 가족이 해체되고 가정의 의미가 퇴색해 가고 있는 와중에서 현대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나’는 부모로부터 파생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넘치거나 모자란 상호간의 관심과 이해 때문에 파국을 맞이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도할 수 있다. 이미라 시인은 시를 통하여 세세한 가족사를 들추어내지는 않지만 부모가 가슴에 내려놓은 사랑을 기꺼이 받을 줄 알고 받들 수 있는 따스함을 지니고 있다.

  


그 집앞 정류장

이제 그곳에 내릴 이유가 없어졌다

길가 작은 연립

해가 스며드는 아침이면 화사하던 집

해가 질 때면 문밖을 서성이시던 당신 모습

날마다 연기처럼 피어오르던 따뜻한 숨결

아직도 그 집 앞 정류장 지나치면

가슴이 자분자분 아파온다

그 집 앞 정류장엔 시외버스가 별로

정차하는 일이 없던 곳

빨간 신호음 내는 벨을 나조차

누를 이유가 없어졌다

마음으로만 수없이 눌러대는 빨간 버튼

갑자기 버스가 정차한다

황당히 내려버린 정류장

뒤따란 내린 사람 나를 앞질러

휭 하니 건널목 건너고 있다

신호등 빨간불, 그리고 파란 보행등

다시 또 빨간불, 파란불

파란불, 빨간불

빨간불, 파란불

빨간불-

파란불-

어머니, 저 가야겠어요


                                     시 「  어머니. 9 」 전문


 시인의 부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재는 그리움과 회한을 동반하지만 결코 感傷에 휘둘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부재야말로 시인의 자아를 성숙시키는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신에게 투여한 부모의 사랑을 생략한 대신 그 자리에 그리움을 채워 놓으므로서 오히려 부모의 사랑을 함축한다. ‘어머니의 외로움을  방치한 죄/어머니 삶의 무게를 가중시킨 죄/

어머니 손을 놓쳐버린 죄 ‘ -시 「아버지. 3 」부분처럼 시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아프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곧바로 ’그 모두를 내가 덜어드리면 /하얀 백구두 신고 걸어 나오실 수 있을까 ‘라고 고백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행한 일들을 과연 어머니를 대신하여 해토할 수 있는 일인가?  아버지와 어미니 사이에서 양자 간의 화해와 갈등을 적극적으로  감싸 안으려고 한다.  ’‘그 모두를 내가 덜어드리면’ 이 의미하는 바 함께 고통을, 아픔을 나누겠다는 토로는 시인이 느끼고 체득했던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군대간 아들을 그리는 「신서면 대광리 사서함 106-15호」나 딸을 시집 보내면서 축시로 대신한 「아름다운 두사람, 아름다울 두사람」에 드러나는 애틋함은 배우고 체험하지 않으면 쏟아낼 수 없는 그리움의 結晶일 것이다. 부재를 넉넉한 그리움으로 채우고 다시 발산하는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성숙되어가고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꽃이라 부르기에 민망한 개망초에게‘ 겸허한 눈꽃’ 이라고 부르겠다는 긍정의 미학은 사랑의 체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꽃을 꽃이라 부르지 않아도

어제 종일 찌든 먼지 밤이슬로 헹궈내고

무리지어 처절하게 아름다워라

아무곳에나, 아무에게나

쉬이 눈에 들어 천박한 이름으로

지천에 깔렸구나

더는 아파하지 말아라

나는 너를 겸허한 눈꽃이라

부르리


                                               시    「 개망초」전문



 

생명을 노래하다


 다른 한편으로 시인은 계절의 변화 속에 드러나는 자연 현상이나 사물 속에서 생명의 소리를 듣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데 소홀함이 없다. 시집의 표제로 쓰인 시 「봄날의 반란」을 읽어보자.


겨울잠

깊은  늪에서

담금질 하며 콩닥대던

가슴이 웬지 몰라

처마끝 간지르는 낮볕에

갸우뚱

고개 내밀어 보니

바람이네,

꽃물 묻어나는 바람이네,

개나리꽃 시샘으로

창이 노랗게 물들었네,

그거야, 그거야

화들짝 놀라 튕겨나온 함성

와 우 .........

반란이 일고 있어

헐렁하던 하늘 쪽엔

뽀얀 꽃비가 후두둑

매화꽃 망울이

가지마다 진홍빛 눈물을 찍어놓고

아름다운 반란에

몸을 사르고 있어

나도 타오르고 있어

내가 타오를 줄이야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적절하게 활용되면서 새 봄의 약동과 생명의 환희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는 가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연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어 인간인 내가 꽃이 되고 바람이 되고 아름다운 반란의 주인공이 되는 환상적 외침이 리드미컬하게 전개되고 있는 역동성은 사랑과 생명이 불가분의 등식관계에 놓여 있음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햇살이 탐스러워 한 소쿠리 받아볼까

무심코 옮긴 발길

엊그제 내린 가랑비에 목 축이려

쑥,쑥, 쑥

새 순 내밀었을까

반가워 들여다본 눈길 사로 잡혔네

쑥밭에 주저앉아 무아지경에 빠져

이건 윗집 친구네,옆집 친구네,아랫집

이건, 이건, 이건

한 웅쿰씩 뽑아올린 쑥 향에 취해

할 일도 잊은 채 오늘 하루

쑥밭이 되어버린 나


시 「쑥 밭에서」는 「봄날의 반란」보다 더 자연 깊숙이 몸을 던지고 마음마저 ‘쑥밭’이 되어버린 봄날을 노래하고 있다. 도시화되어가고 그만큼 우리 곁에서 멀어지는 자연을 호흡하는 생명의 나눔은 정겹고 또 정겹다.


 이와 같이 시집의 2부와 3 부에 수록되어 있는 다수의 시편은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고귀함과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때로는 직정적인 묘사가 역사의 현장을 찾아갈 때 튀어나오고 그 소회가 상식에 머무르는 경우도 산견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까닭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해소되지 않는 부조리한 삶이 존재한다는 자각으로 이어질 때 또 한 번의 반전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오리


고통이 쏟아내는 인간의 괴성

전생에 괴로웠을 인간의 환생인가

오리는 왼종일 질러댄다

꽥 꽥 꽥 꽥

너의 몸은 값진 보양식으로 상에 오르고

깃털은 인간을 감싸주는 귀한 대접을 받았는데

누구의 잘못 일거나

알기나 하느냐

조류 독감 오명아래 무더기로

폐사당하는 너희의 운명을

다음 세상에 태어 나거든

오리의 시절을 그리워 마라

닭도 말고 오리도 말고

인간의 먹이 사슬에서 벗어나

백조처럼 태어나거라



장자는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지 말고 用과 不用의 상대성을 깨닫고 주어진 본성에 충실할 것을 권유한다. 오리는 오리의 삶이 있고, 닭은 닭의 삶이 있으며, 인간은 인간의 삶이 있으므로 幸도 불행도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오리에게 말한다. ‘닭도 말고 오리도 말고/ 인간의 먹이 사슬에서 벗어나 / 백조처럼 태어나거라’ 라고 할 때 그 오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버려지고 떠도는 자들, 변두리로 몰려가는 낮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구원의 기도처럼 아득하게 밀려 온다. 이 측은지심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그것은 관계의 소중함을 가족으로부터 배우고, 배운  것을 사랑으로 실천하며, 사랑의 핵심이 생명의 고귀함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밝게 비출 줄 아는 전 생애에 걸친 시인의 진면목이 아니었던가!



세상에 기대다


 원초적인 생명과 사랑과 세계 내의 자아를 굳건하게 구축하였다 하여도 시인도 세파에 시달리리지 않을 수 없고  급변하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이 순간에도 시인이 정주하고 있는 도시는 확장되고 그만큼 자연은 더 멀리 밀려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시인도 세월의 더께에 함께 묻혀가고 있다.



세월에 밀려와 돌아보니

삶의 여정 고단한 길

굵어진 손 마디마다 시름이 묻어난다

묻어둔 가슴앓이 명치끝 아리고

세월의 헤아림 만큼

응어리진 일상

숨가쁜 달음박질 이제와

허허롭다

                      시 「중년」 전문


시인도 어쩔 수 없이 세월에 밀리고 숨 가쁘게 중년에 도달하고 보니 마음이 헛헛하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달린다.


 jogging


달려,달린다, 달려온다

하늘 구름 다가 오는 산

어느새 내 뒤로 달려간다

뚝방 끝 노인 한 분 어정어정 걸어 오시더니

나보다 더 뒤에 쉼표 하나 찍은 듯 아득하다

침묵을 물고 있던 강이 달린다

내가 달리면 멈추고 마는 강물, 물

물 말라 멈추면 강이 달린다

돌아보면 거꾸로 매달린 하늘, 구름, 산........

그리고 나

세상 것 모두 거꾸로 매달려 언제 추락할지 모르지

사는 동안 지구력 길러 당당히 버티어 봐

지구가 어지럽대, 속도를 늦춰볼까

     power working

다시 또 달려, 달린다


언제 추락할 지 모르지만 어지러운 지구와 함께 이제 익숙해진 도시의 천변을 달리는 시인은 아파트 생활의 도식성과 천박함에 실망하고 -「 아파트 여자들 」참조 - 자본주의 논리에 터전을 잃고 떠나가야 하는 삶에 두려움을 느끼며 



어느날 철거는 시작되고 끼니를 잇기위해 폐품을 실어 나르며 구슬을 꿰는

정말 빈곤한 삶을 누이던 판자촌 한 지붕 밑에 노부부의 허기진 기침소리

찢어진 문풍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데 정체 모를 문패 주인들의 또아리 틀던 야심은

골목, 골목 마다 꿈틀 거린다  

                                         시 「재개발 동네 」마지막 부분


이윽고 공룡과도 같이 거대하고 흉측한 도시에 갇히게 된 절망을 노래한다. - 시 「도시 」참조


 이제 시인 앞에 당도해 있는 것은 거대한 절망과 절망 속에 유폐되는 참담한 지경이다. 순응하거나 떠나거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우리는 전자를 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황량한 도시 한 가운데서 ‘자연’을 찾고 가꾸는 희망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저기로 가 보자」는 일견 사랑을 갈구하는 연인의 심정을 표출하는 시로 읽히기도 하지만 심층에는 생명과 사랑을 함축한 존재가 살아있음을 희망하는 긍정의 시학을 펼쳐 보이고 있다.


너를 찿기 위해

눈뜨면 떠올리던 일

눈 감기 전까지 떠올리던 일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우연 인듯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을 쏟아 내던 일

끝없이 상승하는 꿈을 키우며

이제는 떼어 놓을 수 없는 뿌리의 얽힘으로

나무 한 그루 지상으로 피워 올렸다

우리 이제 그늘을 만든곳

그곳으로 가보자

간간히 불어 가는 바람 소리, 새소리, 아이들 소리

귀열어 듣기도 하려니

햇살에 굴러가는 너와 나의 투정 같은 삶의 자투리

잎새마다 묻어 가려니

다시 또 숲을 이룰 내일이 아직 남아 있는

그곳으로 가보자

                          시  「저기로 가보자 」전문



시간의 퇴적과 모천 회귀


『봄날의 반란』은 이미라 시인에게 있어서 삶의 반환점이라고 생각이 된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기억으로 퇴적되고 퇴적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들처럼 생명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이미라 시인이 하늘로부터 얻은 사랑은 생명을 낳고, 생명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삶과의 화해를 이루었다.  시집을 덮으며 시인이 이룩해야 할 크낙한 평화를 바라볼 수 있음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태풍 같은 세월이 묵은 곳, 태양도 달도 온갖 생명을 잉태하며

세상을 살찌우는 산, 소리없는 소리들 어둠을 일으키며

해질녁 아우성 같은 세상 고요히 먹빛으로 기대어

눕는다


지금까지, 여기까지 온 만큼 앞으로 이미라 시인이 가야할 길은 멀다. 이미라 시인이 수행해야 할 과업은 시인이 이룩한 ‘생명의 산’. ‘세상을 살찌우는 산’ 을 우리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그 속에 삶의 내밀한 살결과 물결을 아로새겨 미적인 형상으로 이루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이미라 시인의 시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