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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경의 시> 흐린 세상을 닦아내는 눈물 같은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5. 19. 21:04

          흐린 세상을 닦아내는 눈물 같은 시


                                            - 최윤경의 시 세계


                                                      나호열 (시인)

시인에게 말하다


 시를 쓰고 있다고 느낄 때, 기뻐도 소리 내어 웃지 않고 슬퍼도 울지도 않고 그 대신 푸른 잉크를 묻혀 백지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시라고 느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아니 가슴은 가만히 따스해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아무나 그런 내공을 쌓을 수는 없는 것, 시마 詩魔가 들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제 목소리를 제 가슴 안에 절절하게 담아둘 수 없는 법이다. 마치 무당에게 신이 내리듯 시인에게 쓰지 않으면 못 배기게끔 하는 것이 있으니 시인이 말하는 바는 하늘의 소리이며 바람의 소리가 될 것이다. 일찍이 이규보는「구시마문」에서 “삼라만상의 천만가지 형상을 닥치는 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붓끝으로 옮겨내어 겸손할 줄 모르게 하는 죄다”라고 하면서 시마 詩魔의 정체를 밝히고 있는데 물론 이것은 반어 反語로 읽어내야 할 것이다. 즉 시인은 눈 앞에 주어진 대상에 대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관찰하고 탐구하여 그 비의 秘意를 찾아내는 존재라는 것이다. 비의는 현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본질로서 항구적인 것일 텐데, 이 또한 목마름이 없이는 쉬이 다가설 수 없는 시인의 영토이기도 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그 강함은 순수와 열정이 어우러질 때 빛을 발한다. 억지로 장식하거나 침소봉대하는 것은 시 뿐만 아니라 시인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한다. 시마 詩魔가 어쩐지 무시무시한 느낌을 준다면 요정이라고 바꾸어도 좋겠다. 시인에게 시를 쓰도록, 아니 시를 불러주는 요정이 살고 있는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우리는 아름다움을 배운 적이 없지만 목젖이 울컥거리거나 눈시울이 까닭 없이 젖어들 때 아름다움의 실체를 경험한다. 아름다움은 기쁨에서도 오고 슬픔에서도 온다. 노여움에서도 오고 가엾음에서도 온다. 뭐라고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아득함이거나 어렴풋한, 희노애락의 모든 신경이 하나로 접속될 때 느껴지는 전율 같은 것. 그것은 우연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반복되고 겹쳐지면서 이윽고 하나의 초점으로 잡혀지는 순간에 명멸하는 불빛과도 같은 것이다.

 

 최윤경의 시는 어둠 속에서 읽어질 수 있는 반짝거리는 눈물이다. 지겹게 반복되는 음울한 실내의 기억 속에서 퇴화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더듬거리는 눈빛이 길을 만든다. 이미 만들어진 길이 아니라 이제 막 눈빛으로 다듬어 가는 미완의 길, 그 길은 아직 창을 넘지 못하고 담장을 넘지 못한 채 유폐되어 있는 형국이다. 이는 너무 가혹한 일이기에 조금 더 너른 공간을 그에게 주자. 몇 마장 쯤 걸어가야 하는 집과 일터.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과 나무들, 그 너머로 숲을, 하늘을 이불보처럼 걸어두기로 하자. 그래도 그는 낮은 울타리를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울타리조차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의 동선은 늘 일정할 것이고, 태엽을 감으면 기계적으로 감았다 뜨는 눈동자가 파란 인형처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찌 그의 삶일 뿐인가. 우리 모두도 그와 같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노을’, ‘나무’, ‘바람’, ‘가을’, ‘낙엽’, ‘어머니’ ‘눈 雪’ 등, 최윤경의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어들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눈물이다. 아무리 길게 늘어뜨려도 그의 문장은 축축한 눈물을 애써 감추고 있다. 툭! 하고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그러하니 이쯤에서 최윤경의 시마 詩魔는 눈물이라고 하자. 그 보다는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샘물이 있어 그것이 내면의 흐린 세상을 닦아내는 것이라고 하자.


노을 속에는 노을이 없다


 최윤경의 시집은 11편의 노을 연작으로 시작된다.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에게도 노을이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을의 그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 서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노을이 주는 하강과 소멸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쓸쓸함과 더불어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드는 인력이 그 안에 있으나 노을 속에 들어서는 노을을 볼 수가 없다.


밥 짓는 연기

노을을 향해 걸어간다

어머니 가슴 같은 품에 안기려

다리에 힘을 주었나 보다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검게 그을린 머리채

풀어 헤치고 찾아 온 어둠에게

악수를 건네며

슬그머니 자리를 내어주고야 마는

저 불바다


 노을 연작 중 9번째 시의 전문이다. 저녁 어스름 어느 마을에 얹혀지는 노을과 연기를 오버랩 시키면서 슬며시 과거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시이다. 인간에게 과거를 기억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누가 과거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용서를 통하여 삶의 용기를 얻고 위안을 얻는다. “악수를 건네며/슬그머니 자리를 내어주고야 마는/ 저 불바다‘ 에 보이는 바와 같은 ‘내어줌’의 경지는 태생적이거나 아니면 수많은 반복학습의 결과일 것이다. 최윤경의 이러한 반복에의 집요함은 시집 전체를 아우르는 연작 형태의 시들을 통해서 쉽게 발견되는 바이지만 ‘밥 짓는 연기/ 노을을 향해 걸어간다’ 와 같은 진술도 ‘사라짐으로의 회귀의식’ 이 시인에게 짙게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하여 주는 실례 實例이다.

노을 속으로 들어가서는 결코 우리는 노을을 만날 수 없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둘 때 노을이 비로소 노을이 되듯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을 때 자아는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노을 자체를 노래하기 보다는 노을이 던져주는 의미를 찾으려는 여정을 계속하게 된다. 자아는 ‘나’를 떠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것은 ‘몸’ 속에 존재하는 ‘정신’을 찾으려는 노력과도 같은 것이다. 시인이 보기에, 노을은 바람을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전언 傳言은 ‘나무에 꿈을 누인 / 겨울바람  -「바람이 부르는 소리」 부분-’ 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같은 외로움/ 주어 담으려/ 허리를 굽히자 / 그만 멀리 달아나 버리고 - 「바람이 부르는 소리」마지막 연-’처럼 해독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삶의 여러 가지 덕목들, 이를테면 중용이라든가, 조화라든가, 희생이라든가 하는 숭고한 미덕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봄날 게으른 햇살이

음표처럼 떠다니다가

손길 닿지 않은 구석을

전등처럼 비추고 지나갔다

문득

내 생의 작은 음모처럼

가는 실오라기 너울대는 먼지

그 먼지 속에 한없이 가벼워진

얼굴이 보였다

손사레 치기도 전에 날아가

불쑥 불청객이 되어버리는 먼지

아무렇지도 않게 옷깃을 털어내는

인연의 무상이 서럽지는 않았던가

햇살이 되고 싶었다

문을 걸어 잠구어도 햇살은

몇 년 째 피지 않는

난 잎에 머물러 있던 햇살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거실 바닥에 질펀하게 어질러진

저녁노을 한 줌

                               시 「햇살을 부르다」전문


  봄날의 햇살은 소생과 희망의 징표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햇살은 동시에 가리워졌던 음습한 곳을 낱낱이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먼지가 되어버린 삶의 덕목들은 끝내 ‘.... (중략) 끝내 잡히지 않았다 / 거실바닥에 질펀하게 어질러진/ 저녁 노을 한 줌’ 으로 환원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노을 연작에서 시인이 천착했던 그 종착점은 생활의 중심인 거실 바닥에 잠시 현전하는 것일 뿐이다. 최윤경의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숲은  명상과 소요의 울울 鬱鬱함이 아니라 ‘삶의 소곡으로/ 엄습해 오는 소리 소리들 - 「숲길을 거닐다」 마지막 연 -’ 처럼 소리죽인 비탄의 축적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시인에게 있어서의 숲은 그의 집이고, 이 세상의 상징이고, 이 세상은 온통 병자로 가득한 병원으로 치환된다.


아프지 않은 생명은 없다


병원의 불빛을 밤늦도록 바라보다가 그만 울어버린 기억이 있는지 모르겠다. 병원의 불빛이 모두 꺼진 밤을 맞이한다면 아주 행복한 일이 되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병원의 창가에 불빛이 꺼진 적은 없다. 세상이 아프니 사람이 아프고 사람이 아프니 다시 세상이 아프다. 생노병사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장사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의 측은함을 노래를 빌어 위무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최윤경의 시의 발원지는 바로 병든 생명을 위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닐까?


비릿한 냄새

썩어 들어가는

진흙탕에 발을 디디면

깜깜한 밤이 되고야 만다

스스로가 갇히고 엉망이던 때가

그려지는 것이다

낮과 밤이 뒤 바뀐 아이처럼

치매에 걸린 노모의 중얼거림이

한 밤중 떠돌아다니면

어느새 진창에 빠져있는 내가 보인다

까맣게 잊어버리는 기억 속에

머무는 것이 고작 이것 뿐

세월 깊어 갈수록 기막힌 일이 늘어만 가고

줄어들지 않는다

두꺼운 벽이 분뇨 냄새에 숨 막혀

노랗게 병들어 가고 있다


위의 시는 ‘홀로 갇히는 것’ 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 「병상일기 3」의 전문이다. 노을 속에 들어가서는 노을을 볼 수 없듯이, 바람의 소리를 들으려고 해도 바람도, 소리도 사라지고 먼지만 쌓여 있듯이 바쁜 일상은 스스로 혼자 갇히게 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만든다. 온통 병자뿐인 일상에서 돌아와서도 안식은커녕  또 다른 환자 - 치매 걸린 노모- 와 조우하는 ‘나’는 진창에 빠져 있는 것이다. 빠져 나가려 하면 할수록 더욱 깊게 빠져드는 더러운 냄새 가득한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그 더러운 냄새와 친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독백을 주문처럼 외면서 자신을 비워나가는 것이다. 뇌세포가 죽어가고 기억이 사라지는 치매의 나라에서의 주문 呪文은‘ ... (중략) 다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거야 / 떠오르지 않는 기억 속에 / 파묻혀 문을 잠그고 싶다 / 열쇠 따윈 필요하지 않을 곳으로 - 「시 병상일기. 5」마지막 부분’ 처럼 치매의 상태에 이르르는 것 이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은 치매의 나라에 아직은 가닿을 수 없다는 것, 그런 불경스런 마음을 갖는 자신을 괴로워하는 것, 그래서 시인은 ‘난 알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며 / 하루를 채워 가는 지 - 「병상일기. 9」부분 -’ 과 같은 자성 自省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자성은 그러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다시 환원된다


창문 너머 숲이 부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손짓하면

어느새 한 마리 새가 되어

마음이 갇힌 새장에서

날아가고 있다

누가 가두어 놓은 것도 아닌데

온 몸이 묶여진 듯 답답하다

머릿속에서 수없는 경적이 울린다

飛上 인지 非常 인지

알 수가 없다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것은.


                            시   「창밖을 보다」전문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시인이 바라보는 숲은 생명이 살아 숨쉬고 명상이 움트는 성역이 아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자유로운 이동은 꿈일 뿐 飛上인지 非常인지 알 수 없는 혼란만이 가득한 상징으로서의 숲일 뿐이다. 그 숲은 병들어 있다. 밟으면 아픈 비명 소리를 내는 과거의 나뭇잎들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칼날 자국이 선연한, 붙박혀 있는 그림자들이 가득하다. 병든 세상을 견디어내려면 어찌 해야할까? 병든 세상과 함께 병들어 가거나, 아니면 그럴수록 더욱 병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원죄는 이데아를 갖는데서 출발한다. 주체와 객체를 알아채 버린 것.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것 그리하여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천상의 이데아를 꿈 속에 간직하고 있는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살고 광인 狂人은 광인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별이 있고 광인에게는 광인의 별이 있다. 「뮤지컬의 여배우」는 통렬하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아를 보여준다


내게 있어서 정원은

어디쯤에 꾸며 놓았을까

비누방울처럼 수많은 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무엇이 목울대를 잠기게 하는 것일까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몸짓으로

내 안에 스미어 드는 것은

가끔은 슬픔이었다가

때로 노여움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배우의 이면에

쓸쓸함이 머무는 그림자를 훔쳐본다

한없는 열정이 그녀를

그녀의 마음을 잠재운다

바닥에 머리가 닿아서 다시는 들어 지지 않을 것만 같은

침묵의 인사가 그녀를 깨운다

박수 소리는 그녀의 열매다

그 튼실한 수확을 위하여 흘린 땀과 눈물

무대 위에서 빛이 되어 흐른다

                                    시「 뮤지컬의 여배우」전문



사라져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서


최윤경의 시집은 지루할 만큼 계속해서 꿈의 조각들을 질펀하게 깔아 놓는다. 그리하여시집 한 권을 다 읽을 즈음에는 절로 가슴이 눅눅해져 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이 시인이 예상했던 전략이었다고 말한다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되리라. 어느덧 시인과 동화가 되어버려 쪽빛 물이 든 탓은 아마도 시인의 체험이 절실했던 까닭이지 시인의 삶을 장식하려는 어떤 의도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독백은 지리멸렬하지만 그 누구도 동어반복의 중얼거림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유사한 감성의 비늘 - 시인은 그것을 먼지라고 표현하겠지만 - 은  영혼의 반짝거리는 옷이며 방패인 까닭이다.

 이제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유년의 골목길’ 이기도 하고 단 한 번뿐인 ‘여행길’ 이기도 할 것이며 ‘걸어갈수록 역류하는 길’ 이기도 할 것이다. 길의 상실은 우리의 꿈과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  ‘꿈’ 또는 ‘이데아’는 신기루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일찍이 장자 莊子가 묘파한 胡蝶夢 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윤경에 있어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길’ 은 ‘살아있고’, 그럼으로써 확연히 ‘드러나는’ 길을 전제로 할 때 성립하는 길이다. 사라졌지만 어딘가 존재하는 길은 인간의 시력에 따라 영원히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현현할 수도 있는 길이다. 우리의 꿈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좌절할 때 길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된다. 아니면 우리의 욕망의 사슬이 너무 완고해서 맹목 盲目에 빠지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지 않았다

길 끝에 길이 있고

또 다른 목적지가 있었다

걸어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이

그렇게

흐릿한 시야에 머무르면

사뿐 땅을 딛고 이정표 없는

하늘로 하늘로

날아가고 싶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어

두 눈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사라진 길

                             

                               시 - 「보이지 않는 길」전문


위의 시를 읽어보면 길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이유가 세상사의 욕망 때문도 아니고, 꿈이 허황되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이 세상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가. 시인이 가고 싶은 길은 이 세상의 제도로 상징되는 ‘이정표’가 없는 하늘로 난 길이고, 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 먼 길이어서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최윤경의 행로가 아직은 희망으로 눈 앞에 펼쳐져 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된다. 이 시집의 끝머리에서 독백과 자폐의 그늘에서 빠져나오는 한 편의 시를 만날 수 있음은 커다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병자 病者와 병자의 관계가 아니라, 섬과 섬으로 격절된 그런 사이가 아니라 따뜻하게 자신의 손을 내어주는 것은 마치 엄동설한 끝에 대지를 밀어올리는 새싹을 마주하는 엄숙한 광경과도 같은 것이다. 비록 완전하게 자신을 옥죄고 있는 소멸의 의식에서 벗어났다고는 볼 수 없지만 한 발 한 발 오랜 시의 여정을 통해서 거두어들인 소통의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눈물겨움이다.



닳고 닳은 삶의 고단함에

불현듯 한 송이 꽃이 하얗게 피어 오른다

무엇이 온 가슴을 희게 만들어 놓는 걸까

포장되지 않은 채 그 누군가에게 건네어 줄 수만 있다면

온전히 꽃이 되어 주고 싶다

새하얀 꽃 이파리 검은 열매로 남겨진

다정큼열매 의 붉은 즙 이 되어

한 방울 핏빛 상처로 자리 잡은 일상의 일들

병든 노모의 헛기침 소리로 시작 하는 아침도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보도블록의

낮은 구두 발자국 소리도 살아 있다는 흔적으로 기억 되리라

가진 것 하나 없는 그 가난한 마음에

빛처럼 남겨져 아른거리던 열매가

거뭇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상의 모든 것들이

힘들고 지친 나머지

정반대의 색깔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까

백지 상태로 시작한 아침이

저녁이면 만신창이가 되어 시꺼먼 재가 되어 버리는 것

한쪽이 닳아 뒤뚱거리게 된 신발창만 탓하며

구두수선 방을 향해 가는 걸음이

소스라치게 놀란 아픔이 되어 밟힌다

                                 시  「 하루의 뚜껑을 닫다」전문



흐린 세상을 닦는 눈물을 위하여


아무리 삶이 고단하다고 하더라도 아직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것은 영혼의 호수를 가지고 있다는 징표일 것이다. 눈물이 없는 시인이 너무나 많은 현실에서 눈물이 많다는 것이 어찌 흉이 될 수가 있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사람들이 측은지심의 망막에 고이지 않는다면 세상은 결코 아름다움의 진상 眞相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최윤경 시인의 시작법은 아마도 절실한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진솔한 어법은 시에서 퍼소나로서의 화자 話者의 등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에서의 화자는 ‘나’이고 그 ‘나’는 바로 ‘시인’ 자신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또 하나 굳이 언급하자면 시인의 의도를 드러내는 매체 媒體가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자연물이나 자연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현상이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적은 장점이면서 단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매체의 상징은 직정적이어서 쉽게 시를 감상할 수 있는 평온함을 제공하지만 그만큼 시가 主情的 으로 흘러버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말 인 것이다.

 

  한 권의 시집은 시의 집이면서 시인의 우주이다. 시인의 운명은 자신이 지은 집에서 결코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집을 짓고 그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비워주는 아이러니가 시인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의무이다. 이제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시인에게 자신의 슬픔에서 벗어나 타자의 지친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지친 나그네들의 쉼터가 될 수 있는 넉넉함을 준비해 두라고 정중하게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