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한상림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20. 01:11

메주꽃 



평생 콩 농사를 짓던 어머님

아파트 베란다 창살에

줄줄이 메주덩이 매달아 놓으셨다

인큐베이터 양파망에 담긴 미숙아들

검버섯 핀 어머니의 손은 발효기다

볏짚에서 보름 동안 엎치락뒤치락 다독여

볕에 내걸면 곰삭은 꽃눈이 튼다

송글송글 찬이슬이 땀방울처럼 맺히고

정월 찬바람에 쩍쩍 터지는 몸통 사이로

콩타작 도리깨질 소리 엇박자로 흘러나오면

오래오래 숙성된 어머니처럼

활짝, 메주꽃이 핀다





나무봉 


끊임없이 제 몸을 두들겨 맞아야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맑은 소리를 위해

종은 계속 울어야 한다


소리를 담는다

너의 둥근 원음을 복제하며

수없이 내 몸을 담금질한다

로스앤젤레스 공원

에밀레 종소리를 흉내내는 우정의 종

내내 쇳소리만 내고 있었다


두웅, 두웅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떨림, 그

여향(餘響)으로

나는 수없이 자진한다

부딪힐 때마다

너는 소리로 화답한다



호미목탁



청평사 풍경(風磬)이

오봉산 옷자락을 잡고

법당중창불사공덕비 (法堂重創佛事功德碑)

공덕비문을 읽어준다


대웅전 옆 돌거북이 짊어진

공덕비 옆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는 노인

산새 소리에 맞춰 탁탁

호미목탁을 친다


호미처럼 굽은 그녀

합장하듯 두 손으로

읽는 주름진 경(經)

몇 겁을 건너온 바람이

종일 풍경(風憬)을 등에 진

거북등의 경을 읽는다


염주알처럼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바람이 읽어 주는 경(經)에

할매의 막힌 귀가 뚫리고



고비나물엔 어머니가 보인다 



지장박골에 살던 어머니

남의집살이에 잔뼈가 굵었다

군대간 아버지 기다리며

열아홉에 나를 낳고

서모와 큰어머니, 시누들 틈에서

나를 키우셨다



화장품 외판원 삯바느질에 퉁퉁 부은 몸

병원 한번 못 가보고 신장이 곪았다

고비 고비 넘기다 고비처럼 쇠 버린 몸

추스릴 겨를 없이


옆구리에 주머니 매단 대장암 아버지

온갖 치다꺼리에 꺽꺽 토악질을 하신다


억센 고비순을

푹 삶아 우려낸다

떫은 어머니는

우려도 우려도 우려지지 않는다





 벽조목



팔순 조딸막 할머니 인공관절 심던 날

함지박 가득 핏물 쏟았다

이깟 것 대수냐고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오십 년 전,

주머니에 햇 대추 몇 알 넣고

장에 소 팔러 간 남편

기다리며 꼬박 밤을 지새운

다음날, 이게 웬 날벼락

동네 도랑에 처박힌 남편

눌린 돌덩이를 헤쳐 보니

누군가 내리 친 도끼날에

두부처럼 쏟아진 두개골

그 후, 눈에 뵈는 게 없었단다


청상으로 키운 육 남매

짝지어 보낸 늙은 대추나무

가을햇살에 붉다

삼베옷으로 갈아입은 텃밭 옥수숫대

소슬바람에 서걱인다



시평 / 나호열 시인 (예술세계  편집주간)



  한상림 시인의 시편들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 오늘의 삶을 되짚어 보는 탐색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의 소재 속에서 실타래 풀리듯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유연하고 능숙하다. 바로 이 유연하고 능숙하게 글을 다루는 솜씨가 오히려 시인의 개성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기는 하지만 낱말과 낱말의 이어짐 또한 충돌에서 빚어지는 이미지의 새로운 창출에 눈길을 주기보다는 시인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차분히 설득력 있게 들려주는 힘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내공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발표한 "나무봉'. "호미목탁"은 불교적 사유의 기반을 가지고 있고, "고비나물엔 어머니가 보인다", "벽조목", "메주꽃"은 가족사가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좀 더 세밀히 말한다면 "호미목탁"도 가족사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종종 어떤 교리에 의거해서 그 교리를 증명하거나 시인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하는 과정을 보게 되는데, 실제로 독자들이 작품을 통해서 음미하고자 하는 것은 그 교리나 그 교리의 증명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서 얻어 들인 사유의 통로를 들여다 ! 보고자 하는데 있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더 나은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사실, 한상림 시인의 시를 논함에 있어서 필자가 건져 올린 심상은 단순히 종교적 깨우침이나 역경의 가족사를 들여다보는데 있지 않다. 한상림 시인의 시들 속에 일관되게 숨어있는 코드는 "노동"의 문제이다 영웅호걸들의 삶이 거대한 역사의 용트림 속에서의 투쟁이라면 장삼이사 長三李四의 투쟁은 살아가기 위한 "노동"에 있다. "노동"은 위대하지는 않지만 그 "노동" 속에도 삶의 진정성은 녹아있기 마련이다. "콩타작 도리깨질 소리 엇박자로 흘러나오면/오래오래 숙성된 어머니처럼/활짝, 메주꽃이 핀다-"메주꽃" 마지막 부분"이 필자에게는 "오래오래 숙성된 어머니/활짝 메주꽃으로 핀다"로 읽히는 것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시간과 부대끼면서 이룩한 '노동'이 꽃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퍼뜨린다는 통각으로 강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때로는 말하고 싶은 것을 안으로 누르고, 겉으로 뛰쳐 오르는 것을 안으로 감추는 미학이 한상림 시인에게서 개화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