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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무거움에 대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5. 26. 20:44

 주제의 무거움에 대하여
                                                  나호열

  마침 이야기의 주제가 ‘무거움’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평상시에도 글의 ‘무거움’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무거움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가벼움에 기대기도 하는데, 온통 가벼움으로 둥둥 떠다니는 세상에서 무거운 사유와 글은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일 것이다. 가벼움은 감각에서 나오고, 감각의 즉각적인 반응에서 나온다. 디지털의 시대에서 사유의 멈춤은 곧 죽음에 비견된다. 그러나 어쩌랴! 글은 가벼움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사유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가라앉히는 것... 그래서 문학의 소외, 문학의 위기가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어느 날 갑자기 공룡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우리 곁을 떠나게 될까? 문학을 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우려를 - 문학의 위기에 대한 - 표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효용성에 기반을 둔 문학의 威儀를 인정하고 안심한다. 속도와 시각의 휘황함에도 불구하고 반성과 기억이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은 언어의 영토 안에서 보존되고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사유는 떼어내려고 할수록 더욱 들러붙는 속성을 가졌다. 사유는 여러 방향으로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지만 - 영화, 음악, 사진 등의 영상 매체 - 최후로 그 사유를 검열하는 곳은 언어의 영역이다.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 언어의 불투명성과 싸우고, 이 언어의 확장성에 기대를 걸면서 분투를 거듭하고 있다. 감정을 드러내는 도구로서만 언어를 인식하는 사람은 결코 문학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문학은 감정을 드러내는 일 보다 더 그 감정을 분석하고 통제하면서 사유에 새로운 빛깔을 입히는 일에 골몰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 문학은 인간을 사물화 하는 기능주의, 사람을 기계로 전락시키는 속도주의, 인류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획일주의에 대항하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휴머니즘으로서의 역할과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지한 문학이 우리에게 일구어주는 반성적 사유, 창조적 영감, 초월에의 꿈, 인간다움의 덕성은 달리 그리고 어느 다른 곳에서는 얻어낼 수 없는 인류의 고결한 정신의 영원한 원천입니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2002년 5월 30일, 계명대학 신문사에서 주최한 강연에서 “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를 설파했다. 여기서 진지한 문학이란 무엇일까? 이 말 속에는 진지하지 않은 문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어조가 깔려 있다. 진지한 문학과 진지하지 않은 문학의 경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 짓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문학의 엘리트 주의자는 사회를 계몽하고 담론을 생산해내는 주체자로서 엄연히 이 땅에 군림하고 있다. 그들의 글은 대부분 엄숙하고 복문이며 따라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이에 반해서 문학의 대중화를 꿈꾸는 집단들은 이해하기 쉽고, 고도의 독해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들을 생산하고 전파하는데 여념이 없다. 문학의 엘리트주의를 ‘무거움’으로, 대중주의를 ‘가벼움’으로 이분화 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지만, ‘사유는 가라앉는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감정의 묘사나 진술에 치중하는 대중문학이 좀 더 가벼운 느낌을 수반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진지한 문학은 엘리트 문학이든, 대중문학이든 간에 인간의 사유를 휘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의식의 지층 속에 묻어두고서 오래 그 발아를 지켜보는 작업을 수행하는 문학이 될 것이다.
  감정의 修辭에 골몰하는 현상은 마치 밤의 여인들이 白晝에 짙은 화장을 하고 활보하는 것과 같다. 짙은 화장은 어두운 조명 아래서는 빛나겠지만 밝은 대낮에는 불쌍 사납다. 내용은 없으면서 온당하지 못한 비유와 논리가 부족한 상상 아닌 상상으로 목청을 높이는 작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현상은 엘리트 문학에도, 대중추수 문학에도 쉽게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진지한 문학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김병익의 이야기를 좀 더 살펴보자.

  

  21세기의 디지털 문명 속에서 이 진지한 문학을 추구하고 수행하는 장인적 예술가는 틀림없이 외롭고 가난하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 진지하게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없기에 외롭고, 시장 경제의 교환가치 체계로부터 밀려나 있으니 가난할 것이며, 풍요와 쾌락을 즐길 수 있는 길을 두고 가난하고 힘든 길을 타고 있으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고독하고 빈곤하고 고난스럽기에, 바로 그렇기에, 그 길은 고상하고 명예롭고 의미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학은 그런 고상함과 명예로움과 의미 있음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진지한 문학은 사유의 무거움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문학의 목표가 어디에 설정되어 있느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느냐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감정의 토로나 분출의 문학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 가벼움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가 어떠느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활자화 된 작품을 놓고 아마튜어나 프로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활자화된 작품의 주인은 이미 작가인 것이다.
 
  교육의 평준화와 생활 여건의 향상은 여가를 발생시키고, 여가 활동의 집적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통로로서 많은 사람들이 문학 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현실에서,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태도와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불순한 집단의 이해가 맞아떨어짐으로써 진지한 문학과 진지하지 않은 문학의 불투명한 경계가 확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의식적으로 문학을, 우리의 사유를 무겁게 내려놓을 필요는 없지만 일회적인 우리의 삶을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는 세계의 매커니즘과 대비해 놓고 볼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존재의 무거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실은 쉽게 확인된다. ‘무거움’은 사람마다 그 무게가 다르다. 어느 사람은 모래알 하나에서 지구 전체의 무게를 느낄 수 있고, 01. 톤의 몸무게를 가지고도 무거움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라면 당연히 아주 작은 것에서 삶의 비의를 찾고, 풍경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시간이 남아서 심심풀이로 글을 쓰든, 세상에 이름을 내고 싶어서 글을 쓰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작품 속에 삶의 비경이, 비의가 얼마나 생생하게 담겨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문제가 하나가 있다. 글을 씀에 있어서 사실과 진실의 거리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면 아무래도 절실함이 더 묻어날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파헤치려고 과욕을 부리면 우리는 과장된 몸짓과 치장에 함몰될 우려가 있다. 그렇다고 절실함이 묻어나는 것이 상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또 동어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을 창공에 띄어 올리는 두 날개이다. 체험이 부족한 상상력은 절실함과는 거리가 멀고. 너무 체험이 강렬하면 독자에게 강요된 감정의 이입을 요구하게 된다. 이 두 날개를 융합하는 일이 지난하기 때문에 그래서 작가는 사실과 진실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을 감추는 일에 골몰하게 되는 것이다. 페르소나라고 하기도 하고, 화자라고도 불리우는 가면은 작가를 유능한 사기꾼으로 인식하게 하기도 한다. 유능한 사기꾼은 남에게 자신이 사기꾼임을 알리지 않지만, 자신이 사기꾼임을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진지한 문학은 자신의 정체가 사기꾼임을 인식하는 작가의 괴로움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로 하자.  

 

 

빨래걸이에서 4식구가

봄바람타고

서커스 하네

 

몸을 가볍게 날리며

서로 껴안고 떨어질 듯 떨어질 듯 곡예를 한다

 

청바지 총각 신이 나서

스케이트 타고

꽃무늬 원피스아기는

아빠 엄마 손잡고 공중 사가닥질 하네

 

밤에는 별들이 눈을 반짝이며

가슴 졸여 쳐다볼 것이고

초생 달은 입이 귀까지 올라가

즐거워하겠지.

 

 

  「써커스」란 시이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의 풍경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동심을 가지고 묘사한 작품이다. 빨랫줄에 걸린 풍경을 바라본 체험을 써커스라는 상상의 공간으로 옮겨놓음으로서 재미를 주고 있다. 과도한 자기감정을 드러냄으로써 무거운 의식을 표현하려 하거나 작가가 직접 화자로 등장하는 경우에는 작품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풍경 속의 화자는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글은 단선적인 의미 해석이 아니라 의미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주제의 무거움은 현상을 이야기하되 현상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의미를 추출해낼 때 가능한 것이다. 다른 시 한 편을 감상해 보도록 하자.

 

 

아마 겨울 동안 눈사람하고 한 열 번쯤 몸을 섞었을 거야

겨울 햇살과는 수도 없이 입을 맞추었던 것 같아

그러다 겨울바람에게 들켜 매서운 매를 맞기도 했지

어느 날인가 황사바람이 모포처럼 덮어주기도 했어

먼지 덮인 내 몸을 봄비가 말끔히 씻어도 주었지

따스한 봄 햇살이 젖은 몸을 말려주기도 하더라구

그리곤 어느 날인가 아주 달콤하고 황홀한 꿈을 꾸었어

그 날 이후로는 너무 나른하고 통 입맛을 모르겠어

벌 나비가 앉았던 자리마다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만

알레르기가 퍼지는 것처럼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어

예서제서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어

어쩌면 내가 입덧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정말 인 가봐

한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고 난 것 같았는데 글쎄

꽃이 피더라구, 아주 작고 예쁜 흰 꽃이 온 몸에 가득

왠지 내 몸은 서서히 배가 볼록볼록하게 나오는 것 같애

 

이상하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나와

 

 

  위의 시는 「5월 배나무」라는 작품인데, 꽃이 피기까지 개화에 관여했던 수많은 상황 들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는 재미와 상상력의 폭발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보여줄 만큼 보여주고 들려줄 만큼 들려줌으로서 독자들이 개입할 상상의 여지는 조금도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시인이 자신의 말을 다 쏟아부어내었을 때, 배설의 욕구는 충족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독자에게는 지루하고 곤혹스런 감정을 선사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해석의 통로를 막아버리는 것,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시인이 직접 화자로 등장할 때에는 대개 감정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시의 생명이 압축과 생략이라는 아주 분명한 사실을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데서 발생한다.

 

 

  절망, 슬픔, 외로움, 쓸쓸함 등의 추상어가 구체적인 심상으로 구체화되지 못할 때를 생각해 보자. 관념어를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관념을 주제라고 바꿔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주는 일, 엘리어트가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라고 했던 까닭을 되새겨 볼 때 대답은 분명해진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오월 편지」라는 시를 읽어보자.

 

목련꽃 진 자리

새 잎 피어난 창가에 앉으면

처음 그대를 만나던 날

생각이 납니다

 

거친 항해 끝에 조우하는

무공해의 햇살처럼 순수한 모습이

퐁퐁 솟아오르는 맑은 분수대의

경쾌함을 닮은 음성이

 

때로, 무거워지거나,

따뜻해지거나, 아플 때

그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슬쩍 외면하고 싶은 사랑의 말 들려주던…

 

한 줌 온기를 머금고

귀밑을 간질이던 바람처럼

곁에 있을 때 알아채지 못했던

당신께 스며들고 싶어라

 

밝은 햇살이 서러운 오월엔

오월엔

 

 

  이 시는 매우 정감어린 가슴이 따뜻해지는 작은 목소리를 가진 시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이와 같은 정서에 빠지고 싶고, 노래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이 시를 읽어 내려가면 작가의 정감이 주관적이고 소재에 지나치게 수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가 가지고 있는 記意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월의 편지와 사월의 편지는 어떻게 다른가? 4월의 자연현상과 5월의 자연현상이 쉽게 변별되지 않을 때 작가의 의도는 그 의미를 많이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시에서의 작가는 화자를 통해서만 드러나야 한다. 화자 뿐만 아니라 그 시 속에 설정된 청자가 분명히 설정되어 있어야만 시는 보다 선명해지고 그 의미가 구체적일 수가 있다. 시인이나 작가는 이 세계의 삼라만상에 관여하는 존재이다. 지나가는 바람부터 실업자의 문제까지 아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발에 밟히는 개미의 죽음이 ‘나비효과’를 가져온다는 이치를 몸서리치게 받아들일 때  진지한 문학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오롯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