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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킹스톤에서의 하루 (1)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8. 20. 23:27

킹스톤에서의 하루
나 호 열

 

 

1. 촛불을 켜며

 

촛불을 켜다

 

 

밝고 맑은 날에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길 잃어 힘들어질 때
저는 비로소 당신 곁으로 달려가
당신의 발 밑에 엎드리는 작은 불빛입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저는 예비합니다
밝고 맑은 날에도 저는 영혼의 심지를 올려
어둡고 비바람 치는 날이 오지 않기를
사랑의 촛대 위에 눈물을 올립니다

 

 

저녁 식탁에 혼자 앉아서 책을 읽을 때나 와인을 마실 때, 편지를 읽을 때 촛불을 켠다. 촛불이 만들어내는 너울거림, 그림자와 음영이 가져다주는 펄럭임이 불필요한 시선을 삭제해주고 명징과 혼돈 사이의, 빛과 어둠의 경계를 부드럽게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일 주일의 여행기간 동안 빨간 양초 두 자루가 늘 내 곁에 있었다. 암호화된 카드를 넣어야 열리는 호텔의 방문, '이리 오너라!' '나야, 문 열어!'와 같은 살 겨운 외침이 없어도 그 문은 무뚝뚝하게 열리고, 왈칵 어둠을 쏟아내면 나는 전등 대신 초에 불을 당겼다.

수없이 불러보는 나의 이름과 뒤로 사라져버린 시간들의 틈새로 촛불은 바구니 속에서 고개 숙이는 장미 꽃잎으로 가만가만 나를 대신해서 울어 주었다. 슬플 때 울지 않고, 기쁠 때 웃지 않고 슬플 때는 웃고, 기쁠 때 눈물 흘리는 또 하나의 단단한 가면이 이국의 검푸른 어둠 속에서 그렇게 차곡차곡 내려 쌓이고 있었다.
나는 촛불을 켜고 시를 쓰고, 편지를 썼으며 한 켜씩 떨어지는 그 빛 속에서 육신의 아름다운 마멸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리의 생명이 잠시 숨결을 멈추는 촛불처럼 쉬임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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