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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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知天命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7. 14. 22:51

知天命

                                  나 호 열

  너무 오래 걸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쯤에서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좀 쉬고 싶다는 마음을 들여다 보면 영락없이 너구리나 오소리 같은 작은 짐승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이 밀렵의 시대에 , 이 산하 어느 곳에서 창에나 덫에 걸려 온 몸을 결박당한 채 상처를 핥고 있는 가여운 짐승들의 눈망울을 보았는가? 추위를 이겨내려고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는 짐승들만큼 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어디 있겠는가?

 

 아침 저녁으로 숲을 지나면서 겨울 숲이 참 아름답다라고 느낀다. 한여름 무성한 넝쿨과 잎새들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저 숲이 이제는 다 비워주고, 덜어내면서 길의 끝까지 속을 보여주는 모습, 나는 가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 그 숲을 바라보곤 한다. 이파리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저 나무들이 왠지 짐승들처럼 보인다. 겨울을 견뎌내기 위해서 끝없이 중얼거리며 서 있는 가족처럼  보인다. '조금만 참자, 금방 봄이 올테니, 배 고파도 조금만 참자, 잠들면 안돼....'

 

 조금만 참자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오십이 되어버렸다. 달라진 것은 하나 없는데 더 이상 덜어낼 것도 없는데 무엇인가 달라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슬처럼 온몸을 감싼다. 묶임으로 가득찬 生, 덫에 걸려 발목이 잘린 채 절룩거리며 걷는 상처투성의 삶.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훨씬 적은데 아직도 허우적거리며 잡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노안(老眼)이 온다. 작은 글씨가 안 보인다. 참 다행한 일이다. 이제는 작은 일에 마음 쓰지 말자, 남의 작은 흠집에 콩놔라 팥놔라 하지 말고 이 세상의 어여쁨에 눈을 크게 뜨자. 여기까지 쓰다보니 참 道에 가까운 경지에 이르른 것 같다. 정말 그런가? 한갓 바램일 뿐이다. 남보다 앞서 가고 싶어하고 남보다 더 높이 자리하고 싶고, 남보다 빛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 바램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명예는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남이 주는 것이다. 남이 주는 것이므로 거두어가는 것도 남이다. 이 땅의 수많은 시인들, 그 턱없이 많은 시인들 틈에서 나는 질식해 버릴 것 같다. 시인은 모름지기 돈하고 거리가 멀고, 명예하고도 거리가 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토마임처럼 제 하는 짓거리를 남에게 보여주는 일에 일생을 거는 사람 쯤으로 생각한다. 얄팍한 지식으로, 기교로 한 세상을 제멋대로 재단해 버리거나 그 반대로 치기에 가까운 감정토로가 시 인양 거들먹거리는 시인들 틈 사이에서 나는 붓을 꺾는다. 국가와 민족을 거들먹거리며 목청 높이는 정치인을 믿지 않는 것처럼 온 몸을 땅에 부벼대어 뚝뚝 떨어지는 살점과 핏방울로 삶의 향기를 길어올리는 대신 세간의 명성에 눈 돌리는 시인들 또한 믿지 못할 존재들이다.

 

  그러고 보니 '조금만 참자'라고 되내인 것은 시인의 됨됨이에 대해서 스스로 영글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금만 참으면 좋은 집을 얻고, 조금만 참으면 좋은 차를 타게 되고, 조금만 참으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다면 천 번 만 번이라도 참고 또 참으리라. 그런데 무엇을 참는다는 것인가? 치욕? 굴신? 욕망의 제어? 나는 고개를 내젓는다. 산다는 것은 세월을 견뎌내는 것 그리하여 결국에는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삶을 마감하는 것. 그러므로 오늘의 풍경은 아름답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표현하는데 기꺼이 바쳐져야 하리라.

 

  여행을 즐긴다고 하면  '참 팔자좋은 사람이군' 하는 표정을 내보인다. 이 바쁜 세상에 이곳저곳 둘러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긴 그렇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사랍들이 많은데 왠 여행 타령이냐고 타박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명산대천을 찾아서 좋다는 곳만을 골라 다닌 적이 없으니 이 또한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아름다운 경치와 유적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도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를 저버릴 수는 없다. 이름도 모르고 그저 지나쳐 버리고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건조하고 막막한 내 삶에 윤기와 여유를 주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의 여유를 드러내 보여주고 진정한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사랍들이다.

 

  지난 해 가을이었을 것이다. 서울 근교를 다녀오다가 마침 포도 수확철이라 길가 포도 좌판에 차를 세웠다. 삼십이 조금 넘어 보이는 젊은 아낙네가 아이를 들쳐업고 포도 한 송이를 내밀며 먹어보라고 권한다. 한 두 알도 아니고 큼직한 포도송이를 내밀며' 맛없으면 그냥 가세요'라고 말을 건넨다. 마침 군용 트럭 한 대가 서고 하사관 한 명이 차에 내리자 그녀는 포도 한송이를 또 내민다. '어디에다 쓰실려구요?''우리 사병들 줄려고요' 트럭에 사병들이 빼곰히 쳐다보고 있다. 그녀는 내게 부른 값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포도를 판다. '아줌마, 왜 나한테는 비싸게 팔아요?' '아뇨, 손님에게 비싸게 판 것이 아니라 군인 아저씨한테 싸게 판 거에요. 군인들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리고 사병들 먹이려는 마음 이쁘잖아요? 그러니까싸게 팔아야지요.'

 

  나는 입을 다문다. 오는 사람마다 포도 한송이씩 건네주면 무엇이 남겠나 하는 생각을 가진 나와 그녀는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거든다. 서양으로 여행을 다녀본 사랍들이 제일 곤혹스러운 일이 아마도 팁을 지불하는 것일 것이다. 택시에서도, 음식점에서도 어디에서든 팁을 준비해야하니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어느 호텔에 묵었을 때이다. 외출하기 전에 책상에 동전 몇 닢을 놓고 나왔다.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동전이 놓였던 자리에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Thank You very much' 룸 메이드가 써 놓은 것이었다. 팁이 당연시되는 나라에서 동전 몇 잎에 감사를 전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룸 메이드의 마음은 오랫동안 훈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지금 사과를 먹고 있다. 어제 아파트 공터 과일행상에게 지갑 다 털어 산 사과를 먹고 있다.

  

   저는 청송에서 사과재배를 하고 인는 농민임니다. 농산물개방때메 벌이가수월하지 않나
   직접 아내와 함께 이곳에서 사과를 팜니다. 주민 여러분.외상으로도 판매함니다. 팔아주시면          맛   있는배 하나룰 덤으로 드림니다.핸드폰으로 전화주시면 배달도 해드립니다. 오늘  밤10시까지 임니다.

 

 

  8절지에 삐뚤삐뚤 써 내려간 신종(?) 광고전단을 보면서 포항에서 청송가는 31 번 국도의 과수원을 생각했다. 작은 등불같은 사과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던 그 낭만적 풍경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혼불
  다가서서 보면 주먹만한 햇살덩이
  청송에서 영양가는 31번 국도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얼굴 붉어지던 여자
  깨물어보고 싶던 엉큼한 속살
  지금 언뜻 광주리 좌판에 먼지 뒤짚어 쓴
  저 청승스런 신맛!

                     시 <사과> 전문

 

  저 순박한 시골 농민의 애처로운 호소와 그저 심심풀이로 사과 한 알을 깨물어 먹는 나의 현실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시 속에 투영된 사과와 땀으로 얼룩진 저 농민이 거두어들인 사과의 의미는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헤어지는가!

  

  많은 성자(聖者)들은 단순하게 살기를 권한다. 단순한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법이라고 가르친다. 과다한 의미부여는 우리의 삶을 피곤하고 짜증나게 만든다. 세상은 너무 화장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겉멋에 찌들어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화장과 거리가 멀고 겉 멋과도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저 직감으로 상생(相生)의 원리를 터득하고 그러므로 그들은 가슴에 비수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다. 비수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흔들릴 때 마다 그 비수가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피흘리게 한다. 그리고 삶의 통증이 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인 줄 모르고 남에게, 이 세상에게  그 탓을 돌리기 일쑤이다.

 

  오십이 되어서 그나마 그런 상생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음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한동안 시를 쓰지 못할 것이라는 나의 宣言은 그 상생의 원리를 깨닫게 해주는 수많은 張三李四들을 더 만나야 한다는 부끄러움과도 일치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상생활의 의미를 따져보지 않는다. 그들은 통채로 세상을 관망하고 직관한다. 노드로프Northrop가 지적하는 바대로 농경사회에 익숙한 동양인들의 직관은 무한하면서 비분화된 미적 연속체로서의 개념이다. 오늘날의 많은 시인들은 분화되고 분석적인 방법으로 시를 구성하려고 애쓴다. 현실적인 삶과 시의 세계는 무엇인가 차별화 되어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두하여 시인이 구성하는 상상력이 영원히 하늘을 떠돌아 다녀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거나  또 그 반대로 직관을 直覺的인 감성으로 잘못 해석하여 시에서 객관성을 찾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시인은 구도자가 아니다. 도를 찾으려면 토굴에서 명상에 잠기거나 경전 읽기에 몰두하여야 할 터이다. 시인은 이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하며 아직은 아름답고 신실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서 알려주어야 할 의무를 가진 존재이다.

 

 

  중국 齊 나라에 풍훤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孟嘗君이라는 제후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맹상군의 부탁으로 빚을 받으러 맹상군의 封地인 설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 빚을 받게 되면 무엇을 사올까요?' 라고 풍훤이 물으니 맹상군은 자기 집에 없는 것을 사오라고 말했다. 떠난 지 오레 지 않아 풍훤이 돌아오게 되었는데 풍헌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맹상군이 물으니 풍훤은 빚을 받아 義를 사왔다고 대답했다. 풍훤은 설 땅에 도착하여 채무자인 가난한 농민들은 불러놓고 맹상군의 명령이라고 하며 채권증서를 불태웠다. 그러자 채무자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며 맹상군을 연호하였다. 풍훤의 말인즉 맹상군같이 재물이 넉넉한 터에 빚 몇 푼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 몇 푼의 빚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맹상군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니 빚을 탕감해주는 것이야말로 의로운 일이라 풍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래 지 않아 맹상군은 제나라 왕의 강요로 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설 땅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맹상군을 맞이하였다. 그 광경을 보면서 맹상군은 풍훤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대가 나를 위해 사온 義를 이제 보게 되는구나'.

 

  그렇다. 시인은 義와 같이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풍훤처럼 몸소 실천해 보여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시인은 歌客이어도 좋고 匠人이어도 좋다. 그렇지만 시인은 시를 쓸 때 시인이며, 시를 쓰지 않을 때는 평범한 한 인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자 어느 시인이 이렇게 말하였던가! '시인은 시를 쓰지 않을 때 비로소 시인이 된다!'
 
  
 
 

    ⊙ 발표문예지 : 시와 산문 200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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