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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한사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3. 2. 00:25

냉수 한 컵 드릴까요?

 

몇 년 전 일이다. 집으로 돌아온 내게 큰 아이가 내게 물었다.

‘ 냉수 한 컵 드릴까요?’

‘아니, 물 마시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었지만 기어코 물을 가져다주는 아이는 어딘가 모르게 흥분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알고 보니 오랫동안 사용하던 냉장고 자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신형 냉장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지 않아도 컵을 들이대면 찬 물이 나오게끔 설계된 냉장고가 아이에게는 무척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집의 어느 누구도 그 구멍에 컵을 들이대고 냉수를 마시는 사람이 없다.

 

 그 새로움은 곧 우리에게 친숙하게 잊혀져 갔다. 동네 가전 판매점에 가 보았다. 외짝 문을 가진 냉장고는 진열대에 올려지지도 못한다. 투 도어는 기본이고 은으로 도금하여 건강에 좋다는 바이오 냉장고, 김치 전용냉장고들은 한결같이 대용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 큰 냉장고 속에 무엇을 넣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맞벌이 가정인 우리 집만 하더라도 외짝 냉장고 하나에 냉동 전용 냉장고(?)를 더해 아이스 바에서 시작해서 풀죽은 파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들어 차 있어 보기만 해도 숨이 차다.

 

 가끔 아내가 생각난 듯이 냉장고 청소를 할 때에는 보지 못했던 음식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유통기한이 일 년이나 지나버린 인스턴트 생선찌개 팩, 수분이 빠진 쇠고기 몇 근 등등 냉장고 깊숙이 숨어 있던 식품이 끝도 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그 많은 식품들은 다 어디에 있었을까? 먹을 것이 없어 걱정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신선하고 공해물질이 섞이지 않은 청정한 식품을 고를 것인가가 화두인 요즘에는 수돗물을 믿고 마시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생수를 대 놓고 먹거나 아니면 비싼 정수기를 들여다 놓고 수돗물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낯설지 않은 이 풍경들 속의 주인공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더 큰 냉장고를 선호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더 많은 쓰레기들을 버리면서, 수돗물을 믿지 않은 우리들. 유해물질을 한강에 방류하여 법적 조치를 받으면서도 그 강물을 마시고 죽은 사람이 있냐고 반문하는 뻔뻔한 얼굴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뭘까?

 

어느 종교 단체의 ‘내 탓이오’ 운동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는 자세야말로 나와 너를 잇는 지름길이고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탓이오’ 스티커를 앞 유리창에 붙이고 다니는 차를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는 허울좋은 계몽에 사로잡혀 남의 뒷 유리에 붙어있는 ‘내 탓이오’를 ‘ 네 탓이오’로 받아들이면서 어둔 길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요즘의 사회는 너무 어둡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구호는 난무하는데, 널브러진 구호를 줍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몇 달 째 핵처리물 처리장 설치 문제로 머리가 아픈 남도의 어느 섬은 홍길동이 꿈꾸었던 낙원의 모델이었다. 그 섬 앞 바다를 메우는 새만금 간척 공사는 물막이 공사를 앞두고 손을 놓았으며. 매립지의 한계를 절감하고 소각방법을 택했던 대도시의 쓰레기 소각장들은 다이옥신의 배출로 거의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 서울 북부 외곽을 뚫는 사패산 터널은 자연파괴의 주범으로 강력한 저항운동에 직면해 있다. 내 동네에 강력한 전자파를 발생시키는 변전소가 들어설 수 없고, 납골당이나 장애복지시설이 들어서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와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각종 가전제품 가동에 필요한 전력시설과 우리가 죽어 한번은 가야할 화장장이나 납골당은 어디에 세워야 하는가?

 

눈앞에 자명하게 펼쳐지는 환경 파괴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환경운동은 이제 막 첫걸음을 시작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자연의 일부 훼손을 피할 수 없다는 환경론은 근대산업주의의 생산과 소비를 변화시키지 않아도 기술의 적절한 통제와 활용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경 전환점 가설을 선호하고 있다. 즉, 환경 파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기술의 발전이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고 일정수준의 경제목표가 달성되면 잉여의 자본으로 훼손된 자연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이 가설은 오늘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신속한 물자와 인력 수송을 위해 건설된 고속도로는 자동차의 대량 생산을 유발하고 유해가스를 배출하며,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아까운 인명을 살상한다. 큰 냉장고의 선호는 과도한 전력소비를 유발하고 썩지 않는 일회용품의 소비와 산업발전으로 인한 불가피한 폐기물은 토양에 치명적인 오염을 일으킨다. 이러한 난제에 환경론의 환경전환점 가설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인구밀도가 높고 국토 면적이 협소한 우리나라에서의 환경파괴의 여파는 생각보다 강력하다. 그러므로 국지적인 환경운동은 전국적인 환경운동과 연계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 지역의 문제는 전국적인 문제로 확산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의 환경운동은 그 어느 나라의 환경운동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목청 높여 환경파괴의 현장을 고발하고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도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한낱 이기적인 지역주의에 함몰되어버리고 만다.

 

그것 뿐 만이 아니다. 세계의 지구촌화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유기적이면서도 단일한 구조로 시스템화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남극 대기권의 오존층 파괴는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중국과 몽고의 산업화는 사막지역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인접국가인 한국과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골치거리로 부상했다. 급격한 이상기후의 원인이 지구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공업화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면서 생태를 보존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인류생존의 관건이라는 다급한 결론으로 이끌어지기도 한다. 우리의 중요한 에너지원인 화석연료는 무한정으로 리사이클링이 가능한 자원이 아니라 언젠가는 고갈되어 버린다는 사실에서 어떤 선택을 인간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정말 부재한 것일까?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배운다』는 극접에 도달한 현대 문명의 난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과 지혜를 제시해 주는 책이다. 현대문명의 가장 큰 특징중의 하나는 도시화이다. 생활의 편리성과 복지시설을 구비한 도시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며, 그 팽창의 중심에는 인구의 과도한 밀집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대량의 소비는 대량의 공급수단을 유발하고 쓰레기, 공기 및 토양의 오염을 가져와 종국에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러한 점에서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매도되었던 동양의 금욕정신은 오늘날 우리의 현안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은 법칙성에 매달려 있지 않고 지속적인 변화의 유기체라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 절제와 절약이라는 덕목의 실천이라는 것이 새삼 떠오른다.

 

독일 남부 지역에 위치한 흑림과 인접한 8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라이부르크는 인구 20여 만 명의 소도시이다. 프라이부르크는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에 대한 배려를 통하여 앞으로 지향해야할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천 만 명이 넘는 대도시에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배운다』는 환경을 파괴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고 그 피해자 역시 우리들임을 역설한다. 우리들이 누려야할 쾌적한 환경의 조성은 공동체 정신의 확대와 절욕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프라이부르크 시민들은 가로세로 각각 50, 20 킬로미터에 달하는 흑림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현장을 목도하고 그 피해가 바로 자신들이 삶에 미치는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신들의 프라이부르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쾌적한 삶이 절약과 절제라는 동양의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문화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통스런 제약이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편리성과 신속성을 추구하는 자동차 문화가 자신들의 폐를 망가뜨리고 교통사고를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자전거를 그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도심의 차량 운행을 극도로 제한시켰으며 공중교통수단의 편리성을 증대시켰다. 위험한 원자력 발전소를 세우지 않으려면 자신들이 전력을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실천으로 옮겼다. 과도한 전력 소비를 유발하는 가전제품의 사용 억제, 쓰레기 소각장과 매립지를 없애기 위해 음식찌거기를 최소화 시키는 방안을 채택하였고, 다이옥신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서 일회용기의 사용을 최대로 줄였으며 아예 쓰레기 소각장을 없애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그들은 무한한 경제적 성장을 욕구하는 우리의 삶이 그만큼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협한다는 지혜를 터득했다. 그들은 환경론적인 입장을 탈피하여 생태론적인 입장에서 환경관리의 차원을 넘어서서 환경철학적인 단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심층생태학 (Deep Ecology)은 어느 면에서 동양의 생명사상, 특히 불교 화엄의 일즉다 다즉일의 유기체적인 체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너와 내가 하나라는,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환경윤리적인 단계에 다다르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갈등이 요구되는 것일까?

 

『환경수도 프라이부르크에서 배운다』는 이 밖에도 일본의 가마쿠라 시의 사례를 들어 생태, 환경문제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밖에도 일본의 기타큐슈, 브라질의 꾸리찌바 등의 환경생태도시 현황을 보여줌으로서 환경파괴에 맞서는 인간에게 희망을 던져주기도 한다. 생태, 환경도시의 건설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아직 그 실적이나 영향은 국지적이고 미미하지만 대구와 부산, 그리고 남해군의 환경친화정책은 중요한 실험의 장이 아닐 수 없다.

 

환경국가, 환경도시의 건설은 유토피아의 필요조건이다.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극렬한 이기주의적 분쟁과 갈등은 생태, 환경정책을 입안하고 실천할 수 있는 행정가와 충분히 환경윤리를 교육과정으로 채택하는 시민운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물적 욕망을 최소화하고 절제하는 불편한 삶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이다.

 

노자의 小國寡民의 외침이 오늘 왜 이리 절절한가!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과 드높고 깨끗한 하늘은 영원히 우리 후손들의 재산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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