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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3. 20. 13:36

기녀와 왜군 ‘금기의 사랑’ 묻힌 자리… 바다 위로 ‘붉은 그리움’이 내려앉았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5-03-20 09:23
  • 업데이트 2025-03-20 09:33

사랑했던 왜군 수군 장수가 명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조선 여인 어란이 따라서 목숨을 던졌다는 자리인 ‘여낭터’에서 바라본 해남의 서쪽 바다. 김 양식 부표로 가득한 바다 위로 붉게 해가 지고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덜 알려져서 더 멋진… 해남의 숨은 매력 (上)

왜군의 첩보 수군에 전달한 뒤
사랑하는 이 따라 몸던진 여인
명량 뒷얘기 담긴 여낭터 바다

윤선도·최부·유희춘·임억령…
해촌서원엔 옛 명문가의 흔적
담장밖 여러 비석 보는 재미도

해남시가지 서쪽 끝 서림공원
300년 된 아름드리 팽나무도
서동사 비자나무 초록빛 가득

축구장 63개 넓이의 보해매원
매화가 만개해도 상춘객 덜해
축제없는 꽃밭서 한적한 산책

해남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대흥사와 미황사, 땅끝마을, 녹우단…. 전남 해남에는 굵직굵직한 명소가 많다. 해남이 전남 강진과 함께, 이른바 ‘남도답사 1번지’로 꼽히는 이유다. 옛것들이 많지만, 해남의 매력은 옛것에만 있지 않다. 관광단지 오시아노와 산이정원 등은 근래 들어선 해남의 명소. 지금 매화꽃 그득 피어난 보해매실농원도 여행자들 사이에서 알려진 건 비교적 최근이다. ‘해남’ 하면 떠올리는 명물이 된 해창 막걸리나 삼산 막걸리도 따져보면 역사가 얼마 안 된다.

지역에는 그 지역만이 가진 고유의 색이 있다. 지역의 레거시(Legacy). 곧 유산(遺産)이다. 그게 짙은 곳도, 옅은 곳도 있는데 해남은 짙은 쪽이다. 대형 베이커리 카페 혹은 서퍼 비치처럼 이젠 관광지 어딜 가나 있는 것이, 해남에는 없다. 대신 ‘어디에도 없는’ 것들이 해남에 있다. 남들이 다 가진 걸 또 가진 곳보다, 자기만의 유산을 가진 곳이 훨씬 더 매력적인 건 당연한 이치다. 해남 여행에서 깊은 맛이 느껴지는 이유다. 오래됐다고 다 유산은 아니듯, 연륜이 짧다고 유산이 아닌 것도 아니다. 해남에 가서 ‘어디에도 없는 것들’을 찾아 두 번에 걸쳐 얘기한다.

# 알려진 명소를 건너뛰는 이유

해남으로의 여행을 얘기하되 오래전부터 익히 알려진 곳 얘기는 빼기로 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그곳이 ‘다룰 만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역설 같지만, ‘꼭 얘기해야 하는 곳’이라서 그렇게 하기로 한다. 해남에서 대흥사와 녹우단, 미황사와 땅끝마을은 해남을 여행하는 이들이 누구나 다 가는 곳이다. 꼭 얘기해야 하는 곳이니, 다들 그 얘기를 해서 정보는 넘쳐난다. 설사 빈손으로 간대도 쉽게 그곳을 알 수 있다. 굳이 필요하다면 ‘그곳에 가서 무얼 눈 여겨봐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 정도일 뿐이다.

널리 알려진 해남의 내로라하는 명소는 사실 ‘그 앞에 서는 것’만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경관의 미감이나 역사적 의미, 혹은 인물의 자취가 주는 인상이 워낙 강렬해 군말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이런 곳들을 추켜세우는 기왕의 문장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곳 말고도 해남에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 기왕에 다 아는 곳 얘기를 줄이는 대신, 여행자들의 발길과 눈길이 좀 덜 닿는 곳의 이야기를 모은 이유다. 오래전에 있던 것인데도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나 새로 생긴 곳, 그러니까 해남에서 ‘설명이 필요한 곳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해남군 송지면에는 어란리가 있다. 물고기 알을 뜻하는 어란(魚卵)이 아니라, 지형이 난초처럼 생겼다 해서 마을 이름이 ‘어란(於蘭)’이다. 어란리 북쪽에 치켜든 엄지손가락 모양의 지형이 있는데, 그곳에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벼랑이 있다.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해를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자리다. 주민들은 ‘여낭터’라 부르는 그곳에는 ‘어란’이란 이름을 가진 여자가 묻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바위 절벽 아래 여낭터에 세워진 어란 여인의 석상.



# 왜병을 사랑한 조선의 기녀

여낭터로 간다. 어란리에서 북쪽으로 바다를 끼고 길이 이어져 있다. 가는 길은 선명하다. 한 대가 지나면 꽉 찰 정도로 도로 폭이 좁지만, 막 포장한 부드러운 아스팔트 도로다. 그 길을 따라 바다를 끼고 마을에서 1.5㎞쯤 가면 여낭터가 있다. 산길에다 누군가 의자 2개를 내놓았는데 그게 표식이다. 의자 옆에다 차를 대고서 길옆에 나무로 짜놓은 계단을 딛고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거기가 여낭터다.

이곳에 묻혔다는 여인 어란은 누구일까. 정유재란 때의 얘기다. 왜군 수군부대가 해남 어란리에 주둔해 배를 수리하고 군사를 재정비하고 있었다. 재정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전략 회의도 하고 시간이 남으면 술을 마시곤 했다는데, 그러다 왜군 수군 대장인 간 마사카게(菅正陰)는 조선의 기녀 어란을 알게 됐다. 둘은 금세 서로에게 끌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조건의 관계. ‘조선의 기녀’와 ‘왜군 장수’와의 사랑이었다.

수군 대장은 어란과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던 중 경계를 풀고 우리 수군을 치는 작전계획과 함께 구체적인 기습 시기를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들은 어란은, 포로로 잡혀 와 있던 조선 수군 김중걸을 풀어주며 왜군의 계획과 출발 날짜를 알려주었다. 풀려난 김중걸은 곧바로 이순신 장군을 찾아가 보고 들은 사실을 전했다. 이 첩보를 토대로 물살이 빠른 울돌목으로 왜군을 유인해 큰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의 뒷얘기다. 여기서는 ‘기녀 어란’이라고 특정했으나, 왜군 수군의 동태를 이순신 장군에게 처음 알려준 이가 누구인지를 놓고는 여러 버전이 있긴 하다.

왜군은 명량해전에서 대패했고 수군 대장도 숨을 거뒀다. 왜군을 격퇴한 조선의 승리는 기쁜 일이었겠지만, 어란은 사랑하는 애인을 잃게 됐다. 한 번 정을 준 지아비의 죽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란이 택한 건 자결이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으로 어란은 바다에 몸을 던졌고, 며칠 뒤 어부가 어란의 시신을 건져 올렸다. 어부는 거둔 시신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묻었다. 시신이 묻힌 자리쯤에는 당집이 지어졌고, 어란이 투신한 자리에는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상이 세워졌다.

# 어란은 실존했던 인물이었을까

여낭터 앞 호수 같은 바다에는 김 양식장의 부표가 가득 떠 있었다. 어란리 앞바다의 김 양식은 이제 막바지. 마침 해가 저물 무렵이었는데, 석양으로 붉게 물든 바다에는 두어 척의 배만 나와서 양식장의 김발을 뒤집고 있었다. 붉은 노을에 젖어가는 바다를 어란 여인상과 옆에서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았다. 금기의 사랑과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의외였던 건 여인상 아래 표지석에 어란이 바다에 몸을 던진 날짜가 정확히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1597년 9월 17일. 자그마치 428년 전의 일인데도 날짜까지 명확하다. 어란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해남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모임인 ‘해남회’에서 발간한 일본인 사와무라 하치만타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으로 전해진 것이다. 사와무라는 일제강점기 해남에서 순사를 지낸 인물. 그는 ‘문록(文祿) 경장(慶長)의 역(役)’이란 부제가 붙은 유고집을 남겼는데, 그 유고집에 어란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실 어란 이야기는 그가 남긴 유고집 말고는, 다른 기록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어란마을에 전해지는 설화도 없으니, 어란이 실존인물인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어란은 금기의 사랑으로 괴로워했던 실존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일본 순사의 판타지로 창작된 인물이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달라지지 않는 건, 여낭터에서 보는 바다가 기막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 위의 풍경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덧붙이자면 바다가 붉게 물드는 해질 무렵의 경관이 최고다.

억울하게 죽은 자를 기리는 자리라면 어디든 그렇듯 어란의 죽음에도 무속이 끼어들었다.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저마다 각자의 기도를 가지고 이곳까지 온다. 여낭터 위쪽 언덕에는 어란을 모시는 당집이 있다. 어란리 주민들은 지금도 고기잡이 나갈 때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며 당집이 있는 방향을 향해 술을 붓고 예를 갖춘단다.

# 인재를 알아보는 눈… 해남 정씨

해남에서 가문 이야기를 꺼내면 맨 앞에 나오는 게 ‘해남 윤씨’ 일가다. 고산 윤선도로 대표되는 해남 윤씨 일가는, 16세기 사화(士禍)의 시대에 해남을 넘어서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이었다. 해남의 명소 가운데 상당수가 고산을 비롯한 해남 윤씨 집안의 자취라는 것만 봐도 익히 짐작된다. 하지만, 기록을 뒤져보니 그 시절 진짜 해남의 중심이었던 집안은 ‘해남 정씨’였던 듯하다.

해남 정씨는 고려 이래 대대로 지역사회 공동체를 이끌었던 ‘호장(戶長)’ 벼슬을 세습해온 해남의 대부호 집안이었다. 조선 초기 향권을 장악한 해남 정씨 집안은 해남 일대에 드넓은 토지와 수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관아와 객사를 건립하는 데 적잖은 물자를 지원하거나, 60명이 넘는 노비를 바쳤다는 기록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큰 부자였는지 짐작이 된다.

해남 정씨 집안은 혼맥을 통해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인연을 맺었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될성부른 이들을 눈여겨보다가 사위로 삼았는데 말 그대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는 얘기다. ‘표해록’을 써서 ‘조선의 마르코폴로’로 불리는 금남 최부를 시작으로 미암 유희춘, 고산 윤선도의 고조할아버지인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등 당대 사림의 한 학파를 이룰 정도의 문인 학자들이 모두 해남 정씨 집안과 혼인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최부와 윤효정, 여흥 민씨 해남 입향조인 민중건, 임억령 등은 해남 정씨의 사위가 됐다. 이들은 처가인 해남 정씨의 후원을 통해 기반을 잡고 성장했다.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변방 중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해남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줄줄이 나올 수 있었던 건, 해남 정씨 가문의 안목과 부(富)가 결정적이었다는 얘기다.

조선 초 사위들의 약진으로 일약 명문가가 된 해남 정씨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첫 번째 성씨로 기록될 정도로 당당한 세도를 누렸다. 그러나 자손을 잇지 못하고, 후손들이 관계로 진출하지 못하면서 점차 쇠락했다. 당시에는 아들이나 딸이 모두 재산을 똑같이 나누는 ‘남녀 균분제’가 보편적이었는데, 정 호장이 재산을 사위에게 나눠주면서 경제적으로 몰락했다는 분석도 있다.

해남읍 서림공원에 세워진 관찰사와 어사의 선정비 혹은 불망비.



# 해남에도 금강산이 있다

해남읍의 진산(鎭山)은 금강산이다. 북한 땅에 있는 금강산에서 본떠 붙인 이름인데, 실상은 금강이라 이름 붙일 정도의 경관은 하나도 없다. 무엇보다 바위로 이뤄진 금강산과 달리 해남의 금강산은 펑퍼짐한 육산이다. 경관이야 진짜 금강산에 턱없이 못 미치지만, 해남 사람들의 마음속 금강산의 자리는 진짜 금강산 못잖다. 금강산 아래가 바로 해남 정씨가 살았다는 해리(海里)다.

해리에는 해촌서원이 있다. 쇠락한 해남 정씨의 흔적이나마 느껴 볼 수 있는 곳이다. 서원은 해남 정씨의 사위인 최부와 임억령, 유희춘을 비롯해 윤구, 윤선도 등 해남 출신 인물을 모시고 있다. 이곳에 최부의 강학비(講學碑)가 있다. 최부의 학문적 업적과 사화에 휘말린 과정, 6개월에 걸친 표류 생환기 등을 상세히 적은 비석이다. 서원은 다른 곳에 있다가 1999년 금강저수지 옆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서원이 들어선 땅은 무안 박씨 문중에서 기꺼이 내어준 자리다. 서원은 문이 잠겨있다. 담장 밖에 세워놓은 여러 개의 비석을 짚어 읽어보거나, 저수지 주변을 산책하는 정도라도 큰 아쉬움은 없다. 바야흐로 화창한 봄날이니까.

이제 해남읍 시가지로 들어가 보자. 해남읍 서쪽 끝에 서림공원이 있다. 옛사람들은 해남의 지세(地勢)가 다 좋은데, 서쪽이 허(虛)하다 해서 서쪽에 나무를 심어 땅의 기운을 가뒀다. 그렇게 나무를 심어 가꾼 숲이 ‘서(西)쪽의 숲(林)’이라 해서 서림(西林)이다. 공원처럼 꾸며진 숲에는 300년 된 아름드리 팽나무와 느티나무, 푸조나무들로 그득하다.

공원 한쪽에 ‘여흥 민씨 사충정려(四忠旌閭)’가 있다. 정려란 효(孝)나 충(忠)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붉은 칠을 한 문을 말한다. 사충정려는 ‘민씨 일가 4명’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200여 년 전쯤인 1822년 세운 것이다. 아버지 민신은 세종 때부터 문종에 이르기까지 형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고위공직자.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 시도에 단종을 지키려다가 그만 역적으로 몰려 본인은 물론이고 일가족까지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당한다.

사충정려는 그때 죽은 민신과 그의 세 아들 보창, 보해, 보석의 충절을 받들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런 참극의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가 있었다. 민신의 손자 민중건이었다. 일곱 살이던 민중건을 집안의 하인이 항아리에 넣어 지게에 지고 진도 군수로 있던 외삼촌에게 데려갔던 것.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중건은 이후 해남에 뿌리를 내려 해남을 대표하는 가문을 일궜다.

# 죽음사와 서동사의 꽃

세조의 왕위찬탈과 관련된 곳이 또 있으니, 바로 죽음사(竹陰祠)다. 이름에서 ‘죽음(死)’이 연상되지만, ‘대나무 죽(竹)’ 자에 ‘그늘 음(陰)’ 자를 쓴다. 죽음사는 해남읍 연동리 남송마을 민가 뒤편에 있다. 사당은 세종대의 문신 청재 박심문을 모신다. 박심문은 세조의 왕위찬탈로 단종이 폐위되자 사직해 성삼문·하위지 등과 교류하던 중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는 길에 의주에서 사육신의 처형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400여 년이 지난 철종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꺼내어져서 이조판서 벼슬이 내려졌고 시호를 받았다. 숲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영모재 아래 사당 담장에는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다. 흰 동백꽃이 피는 나무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겹잎 동백꽃이 근사하다.

꽃나무 얘기를 하자면 해남의 운거산 아래 절집 서동사를 빼놓을 수 없다. 내로라하는 절집인 대흥사와 미황사가 있어서 그럴까, 해남에서는 다른 절에 좀처럼 눈길이 가지 않는다. 화원면 금평리의 서동사도 외지인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절집은 자그마하고 이렇다 할 이야기도 전해지는 게 없다. 임진왜란 때 칡덩굴이 하룻밤 사이에 대웅전을 뒤덮어 왜군이 대웅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해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게 유일한 이야기다.

서동사에서 볼 만한 건 대웅전 앞에 활개를 치고 선 두 그루 아름드리 벚나무였다. 한동안 벚꽃 필 무렵, 남도로 내려간 길에 서동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이유다. 그런데 벚나무 가지가 처참하게 잘려나갔다. 나뭇가지 일부가 썩는 바람에 한 달 전쯤에 가지치기를 했단다. 볼품없이 몸통만 남은 벚나무 앞에서 아쉽고 아쉬웠다. 벚나무 가지는 잘려나갔어도 절집 뒤편에 동백나무와 비자나무가 어우러진 상록림은 성하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호젓하게 붉은 동백꽃과 비자나무의 초록 기운을 만끽할 수 있다.

보해매실농원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매화. 나무가 늙고 거친 데다 바탕이 온통 초록이어서 매화가 더 고결해 보인다.



# 보해매실농원의 매화가 다른 이유

마침 꽃 피기 시작하는 봄이니 해남을 들고나는 길에서 만나는, 봄에 딱 어울리는 얘기를 덧붙인다. 해남에는 ‘보해매실농원’이 있다. 황토밭 구릉에 들어선 농원이다. 예년 같았으면 매화가 만개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올해는 꽃이 늦어 지난 주말을 앞두고서야 겨우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다. 농원의 규모는 46만2800㎡(14만여 평). 여기에 1만4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다. 이게 얼마나 넓고, 많은 건지 감이 안 온다면, 축구장 크기와 비교해보자. 매화나무로 가득 찬 보해매실농원이 자그마치 축구장 63개 넓이다. 이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매화가 개화하면, 농원은 말 그대로 ‘꽃 천지’를 이룬다.

보해매실농원의 분위기는 섬진강변 광양이나 하동의 매화농원과 사뭇 다르다. 매화나무는 키가 크고, 가지가 마르고 거칠다. 이유가 있다. 섬진강변의 매화나무는 매실 수확을 위해 높은 가지에도 손이 닿도록 해마다 가지치기를 한다. 광양이나 하동의 매화나무가 키가 작은 이유다. 반면 보해매실농원의 매화나무는 위로 뻗은 가지를 굳이 잘라내지 않는다. 수확 때 기계를 들이는 대단위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매화나무 숫자가 워낙 많은 데다 일손도 부족하기 때문에 가지치기도 자주 하지 않는다. 나무가 마르고 거칠게 보이는 이유다.

해남에서 보해매실농원을 권하는 건, ‘상대적으로’ 한적해서다. 매화가 만개할 무렵의 주말을 전후한 때라면 북새통을 이루긴 하지만, 절정을 살짝 비켜나 가면 사람이 많긴 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은 정도다.

# 축제가 없어져서 반갑다

보해매실농원은 올해부터 땅끝 매화축제를 치르지 않는다. 농원 측이 매실을 길러 거두는 본업 말고는, 도통 다른 것에 관심이 없어서다. 지난해 봄에는 축제를 열긴 했지만, 그것도 딱 이틀뿐이었다. 다른 축제는 기간을 고무줄처럼 늘려 적어도 일주일, 길면 보름 이상을 하는데…. 그 전에도 코로나로, 구제역으로, 조류인플루엔자 확산 우려로 축제 취소가 잇따랐다.

사실 보해매실농원은 축제를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들머리가 좁은 논둑길이기도 하고, 농원에는 편의시설도 별반 갖춰놓지 않았다. 방문객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걸 서운해하고, 이러저러한 부대 행사나 프로그램이 없는 걸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행락객들을 끌어들이는 축제에 관심 없이, 그저 묵묵히 본업에 매진하는 매화농원도 나쁘지는 않다. 상대적으로 호젓하기도 하고….

보해매실농원이 다른 매화농원과 또 다른 점은 매화나무 군락의 경계에 동백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매화 개화는 더디지만, 훤칠하게 자라 울타리가 된 동백나무는 만개해 발밑에 붉은 꽃송이를 뚝뚝 떨구고 있다. 동백의 붉은 꽃과 초록 잎, 그리고 희거나 더러는 분홍색의 매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풍경이라니….



■ ‘여낭터’는 주소로 찾자

해남군 어란리의 여낭터나 연동리의 죽음사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은 관광안내지도에도 없고, 포털사이트 전자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다. 주민들에게 길을 묻는다 해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주소 말고는 방법이 없다. 여낭터의 주소는 송지면 어란리 산297번지. 이 주소를 입력하면 산길로 안내하는데, 거기다 차를 세운 뒤에 벼랑 아래 바다 쪽으로 나무계단을 딛고 내려가야 한다. 연동리 죽음사의 지도는 해남읍 남송2길 66-34. 차량 내비게이션이나 전자지도에 주소만 찍으면 단번에 데려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