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 저리는 세상 만들자”…‘비겁한’ 최재천의 양심선언
카드 발행 일시2025.02.07
에디터 선희연
“저는 우선 숨었습니다. 솔직히 다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놈의 ‘얼어 죽을 양심’ 때문에 결국 나서고 말았습니다.…부디 혼자만 잘살지 말고 모두 함께 잘사는 세상을 이끌어주십시오.”
2년 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71) 석좌교수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조금 불편한 말씀 하나 드린다”던 그는 “나는 태생적으로 비겁한 사람”이라 고백하며, “입으로만 번드레하게 공정을 말하는 여러분의 선배들처럼 살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양심’
동물행동학과 진화생태학을 연구하며 ‘통섭’ ‘숙론’ 등 사회에 꼭 필요한 화두를 던져온 최 교수가 2025년에 던진 키워드입니다. 누군가는 “개미 박사가 개미나 관찰할 것이지 무슨 양심이냐, 알지도 못하는 분야에 나대지 마라”고 훈수를 두기도 했다는데요. 최 교수의 답변은 이랬습니다. “저는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동물을 관찰하는 게 주특기이고 일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동물이 개미·꿀벌·하이에나·사자도 있지만 인간도 있죠. 인간의 사회란 저에게는 너무 당연한 연구 주제입니다.”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석좌교수는 인터뷰 내내 '학자로서의 양심과 태도'에 관해 말했다. "배우면 알게 되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김종호 기자
최 교수는 요즘 같은 계엄·탄핵 시국에 양심은 더 중요한 화두가 됐다고 말하는데요. “나랏일을 책임지는 분들이 더 양심 있게 행동한다면 훨씬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지난달에는 그의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 제작팀과『양심』(더클래스)을 출간했는데요.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고, 돌고래 제돌이 야생 방류 등에 힘쓰며 양심 앞에서 고뇌했던 자신의 이야기도 담았습니다. 최 교수가 꿈꾸는 “모두 수시로 제 발 저리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런 내용을 담았어요
📌왜 하필 지금, 양심인가
📌“여러분은 제발 그런 선배 되지 마세요”
📌“난 비겁한 사람, 그럼에도…차마, 어차피, 차라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1. 왜 하필 지금, 양심인가
책 제목이 왜 하필 ‘양심’이었나요?
이 세상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들이 있어요. 모른 체하고 내 것만 챙겨도 되는데, 마음속 무언가가 계속해서 나를 찌르거든요. 한강 작가는 이런 마음을 두고 그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이라고 했고, 저는 ‘꺼지지 않는 작은 촛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양심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남을 속일 수 있어요. 잘 감추면 양심적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근데 절대 못 속이는 딱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에요. 감추지 못한 사실이 끊임없이 나를 찌르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마음, 그게 바로 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부턴가 다들 양심을 말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 단어를 부활시키고 싶었죠.
우리 사회에 양심이란 단어가 사라졌다는 이야긴가요?
적어도 제가 어릴 때는 양심이란 단어를 일상적으로 들었어요. 90년대 인기 프로였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에서 정지선 잘 지키는 운전자에게 ‘양심 냉장고’를 주기도 했으니까요. “양심에 털 났냐” 같은 말도 자주 썼고요. 전 지금도 양심에 왜 털이 나야 하는지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만(웃음).
근데 지금은 일상 대화에서 잘 쓰지 않아요. 사회에서 단어가 사라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다른 말로 대체됐거나, 쓰임새가 사라진 거예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양심을 대체할 단어가 없더라고요. 억지로 찾아낸 게 ‘쪽팔리다’였어요. 기껏 찾은 말이 ‘쪽팔리다’ 정도인 걸 보면 양심은 용도 폐기된 단어 같아요. 양심이 용도 폐기됐다니, 참 불행하잖아요. 양심 지키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 분위기가 된 것 같거든요.
그래서 2025년의 키워드로 꼽은 거군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따위 양심에 흔들려서 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양심 때문에 고민하면 ‘마음 약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하고요. 심지어 “유권자 앞에 가서 뻔뻔하게 해라” “얼굴 두껍게 해라”는 정치인도 있잖아요. 많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훈련받고 사는 느낌이에요. 이 시점에 화두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양심이 이야기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단어가 사라지는 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죠. 그리고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전 팬더믹 때 희망을 봤거든요.
어떤 희망을 봤나요?
코로나 19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정부가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발표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마스크를 야외에서도 안 벗는 거예요. 한 언론사 설문조사에서 ‘왜 마스크를 벗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60%가 ‘혹여 내가 남에게 옮길까봐 불편해도 쓰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결과를 보고 울컥했어요. 남을 배려할 수 있는 마음, 이게 양심이죠.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속에 양심이 되살아나고 있던 거예요.
🍀2. “여러분은 제발 그런 선배 되지 마세요”
최 교수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은 현재 구독자가 74만 명이 넘는다. 이에 최 교수는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건 무서운 일"이라며 "말 한마디에도 신중해진다"고 했다. 김종호 기자
2023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양심을 더 먼저 언급했어요.
엄청나게 영광스러운 자리였죠. 저 같은 사람도 축사를 다 하게 되는구나. 전 사실 서울대에 두 번이나 떨어졌고, 두 번째는 2지망이라는 얄궂은 제도 덕에 당시 서울대 이공계 쪽에선 커트라인 최하위였을 동물학과에 턱걸이로 들어갔거든요. 그러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학위를 받았으니 학점 세탁을 기가 막히게 잘한 셈이죠.
영광스럽지만 한편으론 고민도 많았어요. 바로 1년 전 수학의 노벨상이라 부르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가 참 멋진 축사를 했거든요. 고민 끝에 떠오른 단어가 양심이었어요. 양심을 주제로 얘기해보겠다고 주변에 말하니 단 한 분도 표정이 밝지 않았습니다. 허준이 교수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나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생각했죠.
축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제가 한 가지 수학 공식을 제안했는데요. 공평+양심=공정. 공정을 실천하며 살지 않는 분들, 입으로만 공정을 떠드는 사회 기득권층 사람들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잖아요. 이건 아닌 것 같다, 여러분은 말만 번드레하게 공정을 외치는 선배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혼자만 잘살지 말라고요.
당시 축사 전문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재미없는 이야기였는데 뜻밖에 반응이 좋았죠. 인터넷에 떠도는 그림 중에 세 사람이 담장 너머 야구장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거든요. 키 큰 사람, 중간 사람, 키 작은 사람이 저마다 박스 하나씩 받아 그 위에서 보고 있죠. 근데 키 작은 사람은 여전히 못 봐요. 이때 키 큰 사람이 자신의 박스를 키 작은 사람에게 양보하면 키 작은 사람은 박스 2개 위에 올라서니까 세 사람 모두 경기를 볼 수 있어요.
그림 밑에 해설이 쓰여 있는데, 똑같이 하나씩 박스를 받았을 땐 ‘공평’이라 쓰여 있고 키 작은 사람에게 박스 2개를 준 경우엔 ‘공정’이라고 쓰여 있죠. 공정(公正)은 바를 정(正)을 쓰잖아요. 세상을 바르게 만들려면 공평으론 부족하고, 가진 자가 조금 더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왼쪽이 공평, 오른쪽이 공정.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3. “난 비겁한 사람, 그럼에도…차마, 어차피, 차라리”
스스로 ‘비겁한 사람’이라고 말하셨지만, 사회적 이슈에 앞장서기도 했죠.
신혼 시절부터 아내에게 비겁하다는 꾸지람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사과하는 걸 참 못했거든요. 겁도 많아요. 위험한 일 안 하고 싶고, 욕먹기 싫고, 무슨 일 터지면 숨고 싶죠. 그렇게 비겁하게 살면서도 때로는 위험천만한 일에 겁 없이 나섰더라고요.
2003년 호주제 폐지의 정당성을 옹호하며 헌법재판소에 의견서를 제출해 진짜 욕 많이 먹었어요. 어떤 할아버지는 제 중요 부위를 손으로 움켜잡으며 “남자 맞네. 그런데 왜 그렇게 여자에게 아양 떨면서 살아?”라는 말까지 했으니까요. 2013년엔 불법으로 포획한 남방큰돌고래 제돌이와 친구들을 고향 제주 바다로 돌려보냈고요.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와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반대하다 연구비 다 끊기고 계좌추적과 세무조사를 당하기도 했어요. 이게 다 그놈의 ‘얼어 죽을 양심’ 때문이에요. 차마 어쩌지 못해, 어차피 괴로울 거라면, 차라리 해버리자. 차마, 어차피, 차라리… 그 세 단어 때문에 이렇게 됐습니다. 나중에 주위를 돌아보면 제가 제일 앞에 나와 있더라고요.
"언제나 양심이 최선의 선택은 아닐 수 있다"는 최 교수. 옳은 선택으로 가기 위해선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 김종호 기자
‘나만 양심을 지키는 거 아닌가’ 하며 억울해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를 바꿔야 해요. 자기 것을 기꺼이 나눠주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죠. 아마 절대다수가 후자일 겁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사람들이 괴로워했으면 좋겠어요. 양심을 지키지 않는 모습, 공정하지 않은 상황에 익숙해져 무덤덤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나눠주는 사람을 보면 양심에 찔려 아파했으면 좋겠어요. 왜 그런 마음 조금씩 있잖아요. 누군가를 도우며 사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자꾸 할 수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세상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양심에 따르는 건 늘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닐지도 모릅니다. 양심에는 객관적 기준이 없어요. 나는 양심적으로 행동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양심적이지 않을 수 있죠. 히틀러조차도 “나는 누군가에게 충분히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말했으니까요. 제가 최영(1316~1388) 장군의 20대손이거든요. 장군의 이야기를 하나 해볼게요. 장군의 조카가 살인을 저질렀을 때, 장군의 아랫사람이 그 일을 덮어줍니다. 그걸 나중에 알게 된 장군은 사건을 다시 조사해 결국 조카를 감옥에 보내죠. 마을 사람들은 칭송합니다. 근데 가족의 입장에선 매몰차다고 느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양심의 잣대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럼 내 행동이 올바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영어로 양심(conscience)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걸(scientia) 함께 나눈다(con)는 뜻이에요. 또 한자로는 어질다(양·良)는 의미가 있고요. 이걸 합쳐보면 어떨까요. ‘많은 사람이 어질고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거죠. 최영 장군도 가족 입장이 아닌, 마을 공동체가 끄덕일 수 있는 선택을 했잖아요. 결국은 함께한다는 게 중요해요. 함께 고민하고, 함께 불편했으면 좋겠어요. 여럿이 고민하면 내 안에 작게 타오르는 양심이란 촛불이 옆 사람에게 번지거든요. 누구나 마음속에 촛불 하나씩은 있었으면 좋겠어요.
🍀4.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양심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만든 말이 하나 있어요. ‘알면 사랑한다’. 제자들은 조금 유치하다며 웃는데, 전 아무래도 멋있게 못 만들겠더라고요(웃음). 하지만 진심입니다.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해쳐요. 만약 수리부엉이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고 합시다. 갑자기 누가 와서 수리부엉이가 살고 있는 나무를 벤다고 하면, 삶의 터전을 잃을 부엉이 때문에 마음이 아프겠죠. 우리가 자연을 해치는 건 몰라서 그런 거예요. 인간도 마찬가지죠. 같은 반 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어떤 취향과 성품을 지녔는지 안다면 무작정 때리고 괴롭힐 수 없어요. 그러니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려면 알아야 합니다. 공부해야 해요.
더 사랑하기 위해선 결국 공부해야 하는군요.
그게 학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학자로서 논문을 쓰고 연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결국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젊은 시절의 저보다 지금의 제가 퍽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더 많이 알게 됐으니까요. 많이 알수록 남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공부했나 봅니다. 이렇게 저만의 합리화가 멋지게 됐네요.
앞으로는 어떤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은가요?
글쎄, 모르겠습니다. 그때그때 다를 것 같아요. 앞으로도 어떤 큰일이 터지면 숨고, 도망갈 겁니다. 그렇지만 차마 어쩌지 못해, 어차피 괴로울 거라면, 차라리 해버리자며 또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곳에 서 있겠죠. 양심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양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최 교수는 "나는 비겁하고, 양심적이지 않은 사람. 그렇기에 끊임없이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호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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