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하늘로 오르는사다리(시)

생물 시 모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7. 15:09

 

 

젖소

 

젖소는 일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풀과 사료를 먹으면서

아무 생각없이

젖을 만든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고무장갑의 큰 손이

우유를 가져가기 위해

방문한다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그들에게

젖소는 반항하지 않고

화내지도 않는다

젖소는

제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결코 젖소는

제가 젖소인지 모른다

대를 물려가는 혈통은

검은 얼룩을 지우지도 못하면서

서정적인 목장 풍경 속에

우리의 뒷골 속에

되새김 되는

초식동물

우리의 뒷모습을 오늘도 보지 못한다

 

누에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

수천 년 동안

누에는 그의 속성을

바꾸어 본 적이 없다

뽕나무는 뽕나무대로

누에밥이 되는

즐거움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본 적이 없다

 

한 마리 나방이 되기 위하여

수고스럽게 고치를 지어야 하는 노동을

생략하지 않는다

한숨인 양 뿜어올리는 실오라기를

한 줄씩 잡아당겨 명주를 만드는

착취의 손에 대하여

이빨 한 번 드러내지 않고

집 잃어 징그러운 몸뚱이로

이리저리 비틀며

몰매 때리는 세상 밖으로

길을 만들며 죽어 간다

 

투우鬪牛

 

그랬었지. 붉은 천 펄럭이는 깃발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던 철 모르던 시절도 있었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불끈 코힘을 내뿜으며 오만과도 같은

뿔을 믿었지

그때는 화려했었어, 흙먼지가 일도록

터져나오는 함성과 박수갈채만 있으면

두려운 것이라곤 없었지

신기루 같았어

온톤 환각제뿐인 붉은 깃발은 사랑이 아니었어

사랑 뒤에 숨은 그림자, 그것은 분노였어

깨달을 새도 없이 사납게 길러진 우리,

풀 대신 피 냄새를 맡으며 자라난 우리

밭갈이나 달구지를 모는 대신

원형경기장에 길들여진 그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

고슴도치처럼 소심하게

등에 꽂힌 무수한 창칼에도 아픔을 모르는 채

또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늙은 소들

 

코뿔소

 

둥글둥글 살아가려면 적이 없어야 한다고 하시다가도

생존은 싸늘한 경쟁이라고 엄포도 놓으시던

어머님의 옳고도 지당하신 말씀

고루고루 새기다가

어느새 길 잃어 어른이 되었다

좌충우돌 그놈의 뿔 때문에

피헤서 가도 눈물이 나고

피하지 못하여 피 터지는

삿대질은 허공에 스러진다

이 가슴에 얹힌 묵직한 것

성냥불을 그어대도 불붙지 않는 나의 피

채찍을 휘둘러도 꿈적을 않는

고집불통 코뿔소다

힘 자랑하는 코뿔소들

쏟아지는 상처를 감싸쥐고

늪지대인 서울에 서식한다

코뿔소들이 몰래 버리는

이 냄새나는

누가 코뿔소의 눈물을 보았느냐

 

노새의 노래

 

그 때가 그립다

튼튼한 어깨위에 그대를 싣고

가자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며

사랑은 아름다운 노역이라고

믿었던 그 때가

 

생각은 무겁고

갈 곳이 막막한 노인처럼

캄캄한 과거에

뒷발질을 해 본다

 

어디에도 우마牛馬가 갈 길은 없다

 

 

오리털이불

 

한결같이 입을 봉한 이불들

따스함에 깃드는 내력이

가볍게 잠 위에 얹힌다

흘러가는 청명한 물소리

풀먹인 옥양목 같은

겨울 하늘을 저어가던

끼룩대는 울음소리

안락한 잠은 갈대 기슭에 닿고

꿈속에서 부화하는

몇 개의 알이 보인다

일렬종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눈 가린 오리들의 미래

가끔씩 봉합되지 않은 생애의 틈새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오는 깃털을 보며

없는 날개를 몸서리로 친다

 

오징어

 

바다 앞에 섰다

길게 늘어선 덕장 앞으로

푸른 잉크가 쏟아진다

내 몸을 감싸던

눈 밑에 눈물점을 없애야 해

먹물주머니 말라붙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

머리라고 알고 있는

지느러미를 꿰뚫는 막대기에

거두절미하고 매달려 있다

오장육부를 덜어내고

이렇게 압축될 수도 있구나

흔들릴 때마다 해탈이다

주검 밑에 모래밭이 가득하다

 

조롱 받는 새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고

노래해도 운다고

조롱받는다

 

조롱 속에서 사람들이

조롱 밖의 새에게

한 움쿰의 모이와

물을 준다

 

너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할 텐데

 

싸움닭

 

벼슬 같지 않은 벼슬 세우고

깃털 치켜올리고

발톱도 벼려보고

아, 날지도 못하는 주제에

싸움을 건다

이기지 못할 것 알면서

세상에 저 무량한 허공에

싸움을 건다

다가오지 마라

나는 칼이다

나는 쇠꼬챙이다

뒷걸음질치면서

꼭이야 꼭! 꼭! 꼭!

 

종종걸음으로 통닭이 되어간다

 

달팽이의 꿈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내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 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구겨 넣는다

언제나 노숙인 채로

나는 꿈꾼다

 

내 집이 이인용 슬리핑백이었으면 좋겠다

 

* 서천시인협회 2024 게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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