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1] 여름의 문턱에서 살랑살랑
새잎에 부는
바람이 살랑살랑
귓가에 닿고
若葉吹[わかばふ]く風[かぜ]さらさらと鳴[な]りながら
어느덧 여름의 문턱, 입하에 들어섰다. 이제 계절은 풋풋한 봄을 지나 뜨거운 여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파릇파릇 돋아난 새잎이 따사로운 볕을 쬐고 자라나 신록은 눈이 부시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면 이파리가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부드럽게 귓가에 다가온다. 종종 내리는 비에 초목은 더욱 싱그럽게 자라나 저마다의 깊이로 초록을 발한다. 아름다운 오월의 한 줄기 바람을 그대로 문자로 옮겨 놓은 듯한 이 하이쿠는 말하듯이 자연스러운 구어체 시로 이름난 이젠(惟然, 1648?~1711)의 시다.
오늘은 하이쿠 번역 이야기를 해볼까. 일본어 ‘사라사라(さらさら)’는 사물이 서로 가볍게 부딪히며 어렴풋이 내는 소리라는 뜻이다. 바람이 불어와 푸른 이파리들이 서로 볼을 비비며 소리를 낸다. 바람의 소리다. 우리말 ‘살랑살랑’은 바람이 가볍게 부는 모양을 뜻한다. 소리가 아니라 움직이는 모양이다. 바람의 모양이다. 소리를 표현하는 우리말로는 ‘사각사각’이 있지만 바람과 영 어울리지 않는다. 사과를 씹을 때,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쓸 때나 어울리는 소리다. 오월의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야 제맛이다. 그러면 마지막 다섯 자가 관건이다. 원문은 ‘소리를 내고’이다. ‘살랑살랑’은 소리가 아니니 ‘소리를 내고’가 올 수 없다. 그러나 소리도 진동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귀에 닿는 것이리라. 그러니 ‘살랑살랑 귓가에 닿고’라고 번역해 본다. 바람의 소리를 바람의 모양으로 의역했다. 번역의 시간은 언제나 이런 고민의 줄다리기다. 사라사라, 살랑살랑. 소리와 모양으로 뜻이 다르긴 해도 ‘ㅅㄹㅅㄹ’이 반복되고 어딘가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 닮았다. 오월의 공감각이다.
우리도 오월엔 황금 같은 휴일이 많지만, 일본에는 관용어가 아니라 정말로 황금 주간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휴가 있다. 이름하여 골든위크.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약 일주일에서 열흘을 쉬는데,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연중 가장 아름다운 날씨에 얻은 이 긴 연휴를 일본인들은 손꼽아 기다리곤 한다. 이 기간에 지정된 휴일은 4월 29일 쇼와의 날, 5월 1일 근로자의 날, 5월 3일 헌법기념일, 5월 4일 식물의 날, 5월 5일 어린이날. 그 사이사이에 주말이 끼고 대체 휴일이 적용되어 일주일에서 열흘 가까이 연휴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유롭게 푹 쉬면서 살랑살랑 재충전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사람. 사랑. 그러고 보니 ‘ㅅㄹ’이 어딘가 그립고 좋은 이유가 있었다.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 꽃잎의 색처럼 시대의 색도 변한다 (2) | 2024.11.14 |
---|---|
[12] 아침 얼굴의 씨앗을 뿌리며 (2) | 2024.10.29 |
[10] 밥을 짓는 시간 (0) | 2024.09.12 |
[9] 기다리던 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간다 (4) | 2024.09.02 |
[8] 토끼와 다로와 목련과 제비꽃과 (0) | 2024.08.22 |